Ways of Seeing (다른 방식으로 보기) by John Berger

유화 전시에 갔었죠
네덜란드 황금기에 그려졌던 그림들이라는 테마의 유화 전시를 구경갔던 적이 있다. 약탈적 식민지 지배와 주식회사 경영을 통해 네덜란드 어디에나 흥청망청 돈이 넘쳐나던 그 시절. 명문가문들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조차 자신과 가족의 초상화를 그려 남겼다던 그 시절의 작품들을 보면서 묘하게 긁히던 기분이 이 그림에서 정점이었던 기억이 난다.
이국적인 중국 포슬란 식기와 와인잔, 한눈에 봐도 값비싼 식재료들이 무심한듯 널부러져 보이게 놓였으나 너무나 빤히 읽히는 계산된 구도. 빵 터졌던 부분은 오른쪽 하단 가재 옆에 놓여진 반지였다. ‘엄훠나~ 내가 반지를 빼서 여기다 뒀었나아?”하는 듯 다른 재료들과 아무런 맥락 없이 놓인 반지의 존재는 강력했다.
내 얼굴, 우리 가족, 내 영토, 내 소유를 다 그린 다음에는 먹어 없어질 식재료들로 ‘나 이 정도는 매일 먹고 살아.’라고 말하는 동시 은근슬쩍 신분을 상징하는 보석 반지도 껴넣은 센쑤라니. 현대의 인스타그램을 그 시대에는 유화로 그려 과시했구나.
유화란 무엇보다도 사유재산에 대한 찬양이었다. 그것은 당신이 소유한 것들이 곧 당신이라는 원리에서 나온 미술형식이다.
BBC 다큐 프로그램으로 상영됐던 내용
지금으로부터 약 반백년 전 영국 BBC에서 상영됐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다시 책으로 출간된 내용. 존 버거의 <<Ways of seeing>>은 재독을 했어도 그림들만으로 이루어진 챕터들이 어떤 메세지를 전달하려고 하는지는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이런 내용들이 그 당시 TV로 방영됐었다는 점이 놀라웠다.
책은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를 배경 지식으로 첫번째 챕터가 씌여졌고, 이후 이미지들만으로 이루어진 챕터들과 텍스트로 이루어진 챕터들이 번갈아 나오는 형식이다. 말로 설명하기 전에 이미 익숙한 이미지로 먼저 체험해보라는 걸까. 책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장. 텍스트 - 우리는 '어떻게' 보도록 훈련되었는가
2장. 이미지 - 이미지가 의미를 전유하는 방식
3장. 텍스트 - 여성은 왜 ‘보여지도록’ 구성되는가
4장. 이미지 - 시선과 권력의 시각적 패턴
5장. 텍스트 - 광고는 어떻게 욕망을 조작하는가
6장. 이미지 - 소비 이미지의 반복 구조
7장. 텍스트 - 소유, 계급, 그리고 이미지
과거의 예술과 현대의 기술복제 가능한 예술의 차이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에서 과거의 예술과 현재의 예술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과거의 예술 작품들은 일회성/궁극성을 가지고 있고, 제의적인 목적에서 제작되었으며, 공간 자체가 그 예술품을 위해 준비되었기에, 시공간을 아우르는 권위인 ‘아우라(Aura)’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현재의 기술 복제 가능한 예술의 경우 반복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실험적/유희적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고.
현대의 복제 기술이 해낸 것은 예술의 권위를 파괴하고 예술을 -혹은 새로운 기술로 북제한 예술 이미지를- 그 어떤 보호영역으로부터 떼어낸 일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예술 이미지가 순간적이며, 도처에 존재하고, 실체가 없으며, 어디서나 얻을 수 있고, 무가치하며, 자유로운 것이 되었다. 이제 예술 이미지는 마치 언어처럼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예술 이미지는 삶의 주류에 합류했는테, 이제 예술 자체의 힘만으로는 더 이상 삶을 지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권위를 잃은 예술, 정치화되다
이제 현대의 예술은 정치적 목적에 부합되어 기능하게 되었다는 점을 꼬집는다. 발터 벤야민의 글이 전후 쓰여진 글이기에 혁명과 반동에 대해 자주 언급이 되는 것을 고려해본다면 기술복제가 시작되는 초창기에 이 급변하는 예술의 시류를 어떻게 제어해야 할 지에 대한 지식인의 절박함도 읽힌다. 마치 지금 우리가 AI의 변화의 방향 앞에서 제어를 고민하듯.
작가는 이 보호받지 못하고, 스스로는 권위가 없는 복제 가능한 이미지들이 어떻게 과거의 그것을 차용해 여전히 지배 계급을 공고히 하고 있는지를 현대의 광고의 메카니즘을 통해 설명한다.
광고에 미술작품을 '인용' 하는 것은 두 가지 목적에서이다. 즉 미술은 풍요의 상징이며 홀륭한 생활의 테두리에 속하는 것이다. 미술은 세상 사람들이 부와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마련한 장식의 일부이다.
유화는 문화적인 유산에 속한다. 그것은 교양있는 유럽인들이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따라서 광고에 인용된 미술작품은 거의 상반된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얘기할 수 있다. 즉 그것은 물질적인 부와 정신적인 것을 한꺼번에 의미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미술작품이 광고에 쓸모있게 인용되는 것이다) 광고에 인용된 미술작품은 광고가 선전하고 있는 물품을 사는 일이 사치인 동시에 문화적으로도 가치있는 행위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사실상 광고는 대부분의 미술사가들보다 더 철저하게 유화의 전통을 이해했다고 볼 수있다.
광고를 통해 반복적으로 정치적 의도를 가진 이미지들로 훈련되고, 세뇌된 피지배 계층은 자본주의의 메카니즘 속에서 비판 없는 소비자로서의 역할을, 스스로 문화 시민이라는 자긍심까지 장착한 채, 원활하게 아니 자신을 스스로 착취하면서까지 수행하게 된다. 광고에 따르면, ‘세련됨이란 분쟁을 일으키지 않고 사는 것’이므로.
의심을 장착한 채 '다른 방식으로 보기'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통해 ‘내가 본다’고 믿는 방식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한다. 투사하지 않고는 결코 세계를 볼 수 없는 우리. 작가가 세번째 챕터에서 다룬 바처럼 여성이 자아의 분열된 시각으로 남성에게 보일 자신의 모습을 대상화해서 보듯, 우리는 예술 작품 또는 광고상의 이미지들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학습된’ 욕망을 투사해 얻게 된 가짜 자아상에 걸맞는, 남들의 욕망에 충실한 라이프 스타일을 원하고 살고 있다는 사실. 그것이 진정 누가 원하는 바인지는 덮어둔 채.
우연인지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70-80년대 한국의 TV 광고물과 동시대의 르포 사진들을 동시에 전시한 아카이브 사진전 <꿈의 기록>을 봤다.
광고의 화려한 빛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비현실적이다. 북한산에서 멋진 스웨터를 입은 여인이 사냥한 꿩을 굽고 그 옆에는 백화소주가 있다. 어떤 모델은 어울리지 않는 원피스를 입고 석유 호스를 들고 있다. 광고 속 사람들은 스키를 타고 골프를 치며 맥주를 마신다. 대상화된 여자 모델과 현실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사물이 오로지 제품을 중심으로 결합해 대다수 사람에겐 불가능했던 행위를 하는 것이 광고 속 꿈의 구조다. 광고가 그리는 세계는 비현실적이어서 꿈이 되었다.
<만들어진 꿈>
새해 새롭게 시작한 싸목싸목 독서모임을 열어준 <<다른 방식으로 보기>>. 작가 존 버거는 책의 서문에서 다큐멘터리로 방송되었던 내용을 책으로 남기는 이유를 분명히 밝혔다. ‘우리의 기본 목표는 질문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나는 ‘어떻게’ 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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