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책읽기

생각을 바꾸는 불편하고 위험한 그림들 << 뜻밖의 미술관 - 김선지 >>

소라언냐 2026. 2. 18. 15:14
반응형

뜻밖의 미술관

by 김선지

 

 

작가를 소개합니다

‘작가라는 황홀한 명칭으로 불리기까지 참으로 먼 길을 돌아 글쟁이가 되었다'는 작가 김선지는 미술사에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모으며 글을 써오던 중 한국천문연구원 웹진에 게재한 짧은 글 <명화 속 별자리 이야기>가 계기가 되어 천문학자 남편 김현구 박사와 함께 <<그림 속 천문학>>을 출간했다. 별과 우주를 사랑한 화가들의 삶과 그림을 살펴보고 그 속에 담긴 천문학적 요소를 찾아 흥미롭게 엮어낸 책이다. 

 

‘미술사에서 사라진 여성 미술가들’로 제7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대상을 받았으며, 이 연재를 묶고 보완해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2020 우수출판콘텐츠 선정)를 출간했다. 2020년부터 한국일보에 우리가 미처 몰랐던 예술가들의 숨은 이야기를 소개하는 ‘김선지의 뜻밖의 미술사’를 연재하며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생각을 바꾸는 불편하고 위험한 그림들’이라는 소제목답게 책의 내용은 정말 뜻밖의 내용들이 많아 흥미로웠다. 기억을 돕기 위해 인상 깊었던 챕터들의 내용들을 짧게 짧게 남겨본다. 빌린 책이니까... ㅎㅎㅎ



Part 1. 명화 거꾸로 보기

명화 속 ‘하얀 예수'의 진짜 얼굴은?

BBC 다큐멘터리에서 신약성서의 기록, 1세기 이스라엘 갈릴리 지방의 셈족(유대인) 유골과, 고대 시리아의 프레스코화를 분석해 컴퓨터 이미지로 합성했다는 예수의 얼굴은 검고 짧은 머리의 전형적인 중동 지역 육체 노동자의 모습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의 모습보다는 실재와 더 닮았을 텐데,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전형적인 서양 백인의 모습은 어디서 온 걸까. 승자 독식. 패권을 가진 국가들이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그 모든 좋은 것들은 다 자기 것으로 조작해 온 역사의 결과물이다.



고대 조각, 백색 신화가 깨지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조각상들이 흰색이 아니었다는 점. 원래는 알록달록 채색된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르네상스 시대에 대거 발굴 당시 비바람에 벗겨진 고대 조각상들이 흰색이었기 때문에 그리스 로마 시대로의 회귀를 외쳤던 르네상스 조각가들은 이제 역으로 흰색 대리석으로 조각을 한 것. 이는 유럽의 백색 미학으로 깊게 굳혀졌고, 이후 고고학자들과 전시기획자들은 조각들이 채색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외면했다고 한다. 백색 조각의 신화는 눈앞의 것을 그대로 보기를 거부하고 보고 싶은 대로 보려는 욕망과 편견에서 비롯된 것.



피그말리온은 오래오래 행복했을까?

교육심리학에서 주로 인용되는 ‘피그말리온 효과'. 교사가 학생에게 거는 기대에 따라 학습자의 성적이 향상되는 효과를 말하는데, 명화를 통해 만난 피그말리온은... 깬다. 엄청난 여성혐오에 빠져있는 키프로스의 왕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상아로 조각한 아름다운 조각상, 갈라테이아와 사랑에 빠져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갈라테이아를 사람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마침내 소원이 이루어졌다. 

 

표면적으로는 꿈꾸던 여인을 얻은 것으로 보이나 실상은 철저하게 이기적인 나르시시즘을 충족하는 순간. 현재의 리얼돌과 무엇이 다를까.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외모를 마음대로 고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가 초래하는 그 어떤 갈등도 염려할 필요 없이 뜻대로 다룰 수 있다. 아름답지만 자아가 없는 존재를 다루는 일방적인 관계이다. 



고다이바는 정말 나체로 마을을 돌았을까?

역사가 승자의 기록 또는 합의된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그림 <고다이바 부인>. 영주인 남편이 농노들에게 걷을 세금을 올리려고 하자 세금을 낮춰 달라고 간청하는 부인에게 영주는 농담 반 당신이 전라로 동네를 돌면 세금을 낮추겠다고 했다. 부인은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이 도는 동안 창문을 모두 닫아줄 것을 요청한 후 마을을 돌았고, 영주는 세금을 내려줬다는…

 

벨기에 초콜렛 브랜드 고디바에도 살아 있는 고다이바 부인의 전설은 사람들은 진실과는 상관없이 신화를 믿고 싶어 하고 감동을 원한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황금비’는 거짓말이다!

‘1:1.618 황금비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흥미로웠다. 파르테논 신전이나 모나리자가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이 황금비를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데, 실측해 보면 황금비가 사용되지 않았다고. 그리스 수학자 유클리드가 그의 책 <<원론>>에서 ‘양끝과 부분의 비'라는 개념을 소개하면서 등장한 개념인데, 이는 다시 후학들에 의해 ‘신성한 비율'로 계승되었고, 미술가들이 예술 작품에 적용하고, 천문학자들이 천체 운동에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등 황금비 이론이 대중화되면서 이 비율에서 완벽한 아름다움이 나온다는 신화의 토대가 되었다는. 예전에도 성형외과에서 황금비를 언급하며 황신O 등 연예인들의 얼굴 비율을 재던 방송이 기억난다. 신화 되먹임 아닌가.   



‘암흑의 시대’라고? 중세는 억울하다

중세를 전면 부정했던 르네상스 인본주의와 18세기 계몽주의 역사관의 영향으로 암흑기, 야만, 비위생, 흑사병, 마녀사냥 등 우리에게는 온갖 부정적인 이미지만을 가지고 있는 중세.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등에서도 설명하듯 현대의 역사가들은 중세를 더 이상 암흑의 시대로 여기지 않는다. 

 

대 피터르 브리헐의 <혼인식에서의 춤> 등의 그림들은 언뜻 우리의 김홍도 화백을 연상하게 할 정도로 당시 민중들의 모습들을 그렸는데 활달하고, 자유로우며, 밝은 채색 그리고 김홍도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기지와 해학을 엿볼 수 있는 그림들이다. 

 

작가는 중세 사람들이 ‘중세적 광신'이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로 종교와 신앙이 강요된 음울한 시대였다고, 우리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가짜 뉴스에 선동되고, 정치, 종교적 확증편향의 광신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지금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더 낫다고 할 수 있느냐며. 중세는 억울하다고 한다. 동의한다.



‘못생김’은 악하고 열등한가?

캉탱 마시의 <추한 공작부인>과 레오나르도의 <그로테스크한 머리>. 인도주의 이전의 작품들에는 장애와 기형을 가진 사람들이나 독특한 골상은 그저 호기심의 대상이었고 희롱과 농담에 시달렸다. 당시에는 이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 배려라는 현대적인 윤리 가치가 없었으므로. 

 

사실 <추한 공작부인>은 현대 의학에 비춰보면 특정 질환의 증상이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글을 읽으면서 과한 미모 찬양을 서슴지 않는 우리의 현실이 찔렸다. 나이 들고 아름답지 않은 외모는 혐오와 비웃음의 대상인 현실. 못생김은 악하고 열등한가? 장애인이나 특이한 외모를 가진 사람들을 조롱거리 삼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법으로도 차별은 금지되어 있으나 여전히 사람들의 의식은 종종 과거로 회귀하는 듯하다는 작가의 주장에 수긍이 된다. ‘우월한 유전자', ‘착한 몸매' 등의 과도한 미모 찬양은 못생김에 대한 경멸을 기저에 깔고 하는 칭찬이니.



Part 2의 화가 다시 보기

폴 고갱 - 고갱의 그림을 아름답게만 볼 수 없는 이유

Part 2에서 언급된 많은 화가들 중 가장 다시 보게 된 화가를 꼽으라면 단연 폴 고갱이다.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스트릭랜드의 모티브였다는 고갱. ‘고갱의 그림을 아름답게만 볼 수 없는 이유' 챕터를 통해 어렴풋이 들었던 고갱 쓰레기 설이 나도는 이유를 정확히 알았다.

 

반 고흐의 일생을 그린 그림 영화 <Loving Vincent>에도 동료 화가로 나왔던,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잘라주려고 했던 폴 고갱은 영화상에서도 뭔가 참 예술을 하겠다면서도 껄렁껄렁 돈을 찾아 다니는 이중적인 모습으로 그려졌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고흐가 머물던 아를에 와서 화풍의 뜻을 같이 하는 화가들 모임에 참여했던 것도 사실 고흐의 동생이 형이 있는 아를에서 함께 지내면 매주 돈을 부쳐 주겠다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 

 

그는 파리에서 주식 중개인이자 미술상으로 큰돈을 벌며 여유 있는 중산층으로 살았다. 주말에는 종종 그림도 그리면서. 그러나 1884년 금융 위기로 주식시장이 위축되자 하루아침에 직업을 잃고 전업 화가가 되기로 한다. 점점 가정경제 상황이 나빠지자 아내와의 관계도 틀어졌고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자국의 열대 식민지의 자유로운 삶에 대한 소문이 들린다. 파리 박람회 홍보관 중 특히 타히티 전시관에 매료된 그는 즉시 남태평양으로 가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한다(정착할 식민지도 박람회 홍보관에서 고르는 귀촌 클래스라니…). 고갱은 유럽 사회가 산업화, 현대화로 인해 타락했다고 생각해 진정한 삶의 기쁨을 찾아 타히티로 간다고 했으나 실상은 인생의 막다른 길로 내몰린 그가 선택한 최후의 수단이기도 하다. 

 

19일간의 항해 끝에 도착한 타히티는... 어렵쇼... 그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이미 19세기부터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탓에 섬 곳곳에 서구 문화와 기독교 신앙이 물들어 있었고 전통적 토착 사회는 급속히 사라진 상태. 타히티가 지상낙원이 아니란 점을 알게 된 그가 취한 행보는 자신이 직접 야생의 삶에 대한 판타지를 꾸며 섬 생활이 아주 선정적이고 에로틱한 모험인양 스토리를 만들었다. 

 

미술사학자 그리센다 폴록은 고갱의 그림들은 백인 남성 식민주의자의 판타지에 불과하다고 평했고 또 다른 미술사학자 스티븐 아이젠먼은 ‘식민주의, 인종주의, 여성 혐오에 대한 진정한 백과사전'이라고 비판했다고. 고갱은 원주민들을 야만인이라 부르며 현지인 아내인 테하아마나도 이름을 부르는 대신 그저 ‘원주민 여자’라고만 불렀다고 한다.  

  

고갱은 그림 속 여성들에게 이제 더 이상 그들이 입지 않았던 타히티섬의 민속 의상을 입히거나 아예 누드로 그리곤 했다. 이국적이고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여 원시사회를 선망하는 파리 최상류층 미술품 컬렉터들의 관심을 끌려고 했던 것.

 

파리로 돌아 온 그는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파리 예술계가 자신의 작품 가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되자 대신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자전적 소설 <<노아 노아>>를 쓴다. 각각의 자신의 그림에 대한 설명과 타히티 생활 이야기, 폴리네시아 신화가 뒤섞인 이 책은 삶에 대한 정직한 기록이 아니라 기획된 것으로 훗날 고객이 묘사한 것들 중 많은 것이 허구라는 것이 밝혀졌다. 만약 전시회가 성공했더라도 그는 타히티로 돌아갔을까.

 

겨우 13세였던 그의 뮤즈이자 현지처였던 원주민 소녀 테하아마나. 백인들의 현지처를 바한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대부분 미성년자였다. 고갱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어린 소녀를 이용해 자신의 엄청난 성적 욕구를 채웠다고 한다. 본국인 프랑스였다면 별거중이더라도 배우자가 있으므로 중혼에 대해서 그리고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 혐의로 기소되었을 테지만 식민지에서 유럽 남성들은 별다른 법적, 윤리적 제재 없이 이런 일을 저지르는게 다반사였다. 그 시대 유럽 남성들이 식민지 여성들을 상대로 누렸던 특권을 마음껏 향유했던 고갱.

 

프랑스 귀국 전시회에 실패한 고갱은 다시 타히티로 돌아와 테헤아마나와 재결합을 원했지만 심한 매독 증세 때문에 그녀에게 거절당한다. 이후 고갱은 폴리네시아의 한 곳에 이층집을 얻어 영구 정착하며 그곳을 ‘쾌락의 집’이라 명한다. 고갱은 자신이 심각한 매독에 걸렸음을 알면서도 10대 초반 소녀들과 문란한 관계를 맺고, 성병을 감염시켰다. 고갱은 결국 54세의 나이로 알콜, 약물 중독, 매독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폴 고갱의 그림은 반 고흐와 다른 결로 몽환적으로 보인다. 화려한 색채와 그만의 독특한 그림체는 그림을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응, 이건 고갱 그림'이라 짚어낼 수 있을 만치 독창적이고 그만치 유명하다. 하지만 그의 예술적 성취가 그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을까.

 

작가는 고갱을 ‘19세기의 하비 와인스타인’이라 지목한다. 와인스타인처럼 자신의 권력으로 프랑스 식민지에서 많은 미성년자들을 성착취한, 괴물같은 성욕을 가진 predator의 그림들. 그저 인종주의와 식민주의가 당연했던 당시에는 이런 윤리 의식이 없었다고, 여성의 성착취가 처벌받는 현재를 살고 있기에 그의 그림을 보는 것이 불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여성들을 착취했던 한 개인으로서의 고갱과 미술사에 업적을 남긴 예술가로서의 고갱 사이에서 나는 어떻게 그의 위치를 자리매김해야 할까. 



Part 2에서는 세 명의 여성 화가들도 소개되는데,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마담 르브룅과 메리 베스 엔델슨이 그들이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를 그린 젠틸레스키는 그 작품의 그녀가 당했던 성폭력의 트라우마가 반영되어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을 자신을 강간했던 아고스티노 타시의 얼굴로 그렸다고. 17세 때 아버지의 동료이자 그림 선생이었던 타시에게 강간당하고 이를 고소해 당시 로마시를 떠들썩하게 했다. 

 

17세기 초 이탈리아. 절대적으로 불평등한 남성 중심적 사회 체제와 성 문화 속에서 재판이 이루어졌는데 젠틸레스키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고문을 받아야 했고, 심지어 처녀성을 잃었다는 것을 조산사 입회하에 부인과 검사를 받는 수치를 겪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아고스티노는 일 년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교황의 신임을 받는 명망 있는 화가였던 덕에 형을 살지도 않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만신창이가 된 젠틸레스키만 맘에도 없는 혼인 후 서둘러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이주한다. 이런 배경으로 작품이 그녀가 겪었던 성폭력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행히 피렌체에 입성한 그녀는 예술가로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메디치가의 후원도, 갈릴레이, 미켈란젤로 등 영향력 있는 작가들과 교유하며 피렌체 아카데미에 입학한 최초의 여성이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미술계의 성차별과 저임금에 맞서 싸워야 했다. 이전 성폭력 재판에서의 처신이나 이혼 소송 시 양육권을 갖기 위한 투쟁과 단호한 태도 등은 그녀가 강인하고 결단력 있는 여성임을 보여준다. 그녀는 단순히 그림을 통해 자신의 성폭력 트라우마와 복수를 표현한 성폭력 피해자 이상이라는 것. 

 

또한 그녀가 활동한 17세기 바로크 시대는 잔혹한 고문과 형벌이 일상이었던 시대였던 만큼 피가 튀는 잔인한 화풍은 다른 작가들에게도 빈번하게 나타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녀의 잔혹한 그림은 바로크 시대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고.

 

당대에는 드물게 루벤스급의 역량을 갖춘 여성 화가로 입지를 굳혔다는 젠틸레스키는 그녀의 사후 미술사에서 사라져 버린다. 우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고흐, 피카소에 필적하는 유명한 여성 거장들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 젠틸레스키의 그림들만 봐도 익숙한 그림들인데도 말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린다 노클린을 비롯한 페미니스트 미술사학자들이 이 점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사회체제와 교육제도 때문이었다. 예술가 지망생들은 화가나 조각가의 작업장에서 몇년을 기술을 연마하고 사사 받아야 했는데 여성의 정조가 무척 중요했던 시대에 남성들로 가득찬 작업장에서 몇년을 일하고 배운다는 것은 상상조차 어려운 일. 이 작업장들이 자연스럽게 아카데미로 발전했다는 사실은 여성은 아카데미에 접근조차 어려웠다는 점을 말한다. 이는 미술 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없었다는 것. 

 

더구나 화가로 활동하려면 길드에 가입해야 하는데, 당시 여성은 길드나 아카데미에 가입하는 것이 금지돼 있었다. 중세나 르네상스 시대에 여성 미술가들이 대부분 화가의 딸이거나 화가 집안 출신인 것은 이런 까닭이다. 집안 배경이라도 그러해야 작업실 구경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테니. 

 

또한 역사화를 그리려면 인체 해부학과 누드 드로잉을 배워야 했는데, 누드 실기 수업이 진행되는 아카데미에는 진입할 수 없으니 역사화를 그릴 수 없고, 자수나 소공예, 수채화 정도의 영역에서 작업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시대 배경에도 불구하고 루벤스급의 역사화를 남긴 젠틸레스키. 현재 그녀의 여러 작품들은 부친 오라치오의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다는데, 그의 작품들은 젠틸레스키의 그림으로 알려진 것보다 수십 배 높은 값으로 거래되고 있다고 한다. 미술사에서 여성 예술가들의 업적이나 성취를 남성 작가들이 가로채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는 하지만, 젠틸레스키와 부친의 암묵적인 동의로 이루어진 일일까? 미술 시장에서의 성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씁쓸한 사실.



마담 엘리자베트 비제 르브룅  

마리 앙투아네트의 공식 초상화 <장미를 들고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 등 앙투아네트의 전담 초상화가라고 알려진 마담 르브룅은 18세기에 가장 성공한 화가 중 한 사람이라고 한다. 24세부터 마리 앙트와네트의 초상화를 전담한 궁정화가로 일했는데, 외모의 장점을 부각하고 단점을 완화한 그림으로 왕비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 

 

특히 그녀는 의뢰인 특유의 개성을 살린 생기있는 초상화를 그려 당대 귀부인들의 초상화 작업을 독점하다시피 했다는데, 구강 위생이 좋지 않아 다들 썩은 이를 드러내고 웃는 것이 금기시 되었던 초상화 포즈에도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을 그려 개인의 캐릭터를 묘사해 당대에는 혁명적인 초상화를 완성했다고.

 

도장공이자 초상화가였던 아버지와 미용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마담 르브룅은 어릴 때 잠깐 아버지에게서 그림 수업을 받았는데, 부친은 그녀의 재능을 한 번에 알아보아 항상 칭찬하고 격려했다고 한다. 공식적인 미술 수업을 받지는 못했지만 아버지의 작업장에 드나들던 화가들에게서 기술적인 도움을 받았고, 루벤스의 그림을 보고 크게 감동 받은 후 그의 그림들을 모사하며 혼자 그림 기술을 연마했다. 

 

부친의 사망 후 가장이 된 그녀는 길드에 소속 되지 않고는 그림을 팔 수 없었으므로 19세에 루크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화가 활동을 시작하며 가족을 부양했고, 어머니의 권유로 화상이었던 남편과 결혼해 그림들을 판매할 수 있었으나 외도, 도박에 중독 되었던 남편과 헤어지게 된다. 

 

마담 르브룅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는 광풍을 피해 파리를 빠져나와 로마에서 망명 생활을 하는 중 앙트와네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는데, 이 무렵 마담 르브룅은 앙투와네트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을 제작했다고 한다. 18세기 여성이 들어가기 어려웠던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도록 힘써주고, 왕실 초상화를 의뢰한 든든한 후원자이자 다정한 동갑내기 친구였던,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의뢰인을 그리워하고 걱정하며 그린 작품이 아닐까.



메리 베스 엔델슨 

<최후의 만찬>을 콜라주한 <현존하는 미국 여성 예술가들>. 왜 예수의 12사도들은 모두 남자들이었을까. 하나님 아버지, 주 등의 명칭은 모두 남성에게 부여된 명칭이다. 가부장적인 사회 질서가 표현된 용어들인데, 종교의 원칙이 사랑과 평등, 평화라면 부성애보다는 모성애가 훨씬 와닿는데도 불구하고 대다수 종교는 남성 중심적인 가치를 표방하고 있다. <<도덕경>>에서 오강남 교수가 도의 상징이 어머니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하나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만왕의 왕, 만주의 주보다 훨씬 안온하고 포근하게 들린다며 페미니스트들에게 준 조언이 생각난다. 

 

여튼 에델슨의 이 <최후의 만찬> 콜라쥬는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한 기독교 단체의 격렬한 분노를 촉발했고, 동시에 페미니스트 예술 운동의 상징적인 이미지 중 하나가 된다. 남성이 독점하고 있는 사회에 대한 유머와 위트, 그리고 활기 넘치는 도전.

 

그녀는 1976년 뉴욕에서 페미니스트 예술가들에 의해 설립된 ‘이단자들(Heresies Collective)’의 창립 멤버였고, <이단>이라는 잡지를 만들어 페미니즘, 인종차별 등의 담론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미국 여성 예술가들을 위한 최초의 비영리 공간인 A.I.R. 갤러리의 활동에도 참여했다. 

 

1984년 6월 수백 명의 여성 예술가들과 함께 ‘천재가 되기 위해 페니스를 가질 필요는 없다’고 외치며 뉴욕 현대 미술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는데, 이는 여성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유명 미술관에서 배제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항의였고, 여성 작가들의 작품 전시 비율을 높이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멜번 여행 시 세상 힙했던 바버샵 + 커피숍 입구의 입간판 내용이 생각난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구렛나루를 기를 필요는 없다'. 재밌다고 생각했던 입간판의 내용이 에델슨의 투쟁 문구에서 왔다니. ㅎㅎㅎ

 

에델슨은 고대 신화에 주로 등장했던 여신 숭배가 언제부터 끝났는지 왜 때문인지 의문을 품었고 작품 활동 내내 여신이라는 주제에 몰두했는데, 태초에는 ‘위대한 여신(The great Goddess)’이 우주 최고신으로 하늘, 땅 우주, 생명과 죽음 모두를 관장해 현재 남신들이 누리는 지위는 원래 이 위대한 여신의 것이었다. 곡물의 발아와 생장을 관장하여 인류를 먹여 살리는 ‘대지 모신(Mother Earth)’이기도 했고. 옛 사람들은 땅을 어머니처럼 신성하게 여기지 않았던가. 

 

고대 소아시아의 대지모신이었던 헤라는 그 지역이 가부장 문화를 가진 그리스인들에게 정복당한 후, 제우스의 아내가 되어 부권 사회에 순종하고 결혼과 가정을 수호하는 하위 신이 되었다고 한다. 가톨릭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미약하게나마 여신의 명맥을 잇고 있으나 개신교와 이슬람은 얄짤 없다. 에델슨은 여신이 중심이 되는 종교 문화에서 남성이 중심이 되는 가부장적인 유일신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사회로 그 지배권이 넘어갔다고 주장한다. 

 

<최후의 만찬>은 비판임에도 불구하고 유머러스하다. 에델슨은 과거 강력했던 ‘위대한 여신'의 힘과 풍요로움 속에서 잃어버린 여성의 정체성을 찾으려 노력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구, 인간, 동물, 식물 간의 생태학적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모든 것들의 공존과 상생이라는 이상을 추구한 작품들과 퍼포먼스를 남긴다. 고대 여신에 대한 에델슨의 믿음은 영성과 태초의 순수함에 대한 추구였고, 세상의 모든 억압적인 가치와 제도에 대한 저항이라고도 읽힌다. 

 

2021년, 88세의 나이로 세상의 떠난 메리 베스 에델슨은 1970년대 페미니스트 미술 운동의 중추적인 예술가이자 사회운동가였고, 평생 여성 미술가들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한 최전선 페미니스트였고, 소외된 사람들의 인권을 위해 행동에 나섰던 휴머니스트였다. 페미니즘이 곧 휴머니즘임을 몸소 보여줬던 실천가. 

 

 

명화 이면의 숨겨진 권력의 이야기들

책 한 권을 통해 여러 미술 작품들의 숨겨진 이야기와 이면을 보았고, 미술 작가들을 다시 보게 되는 귀한 기회를 가질 수 있어 작가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여러 책들을 통해 다양한 분야에서 일어나는 대상화와 이에 따른 분열과 갈등을 보게 된다.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나와 네가 따로 분리되어 있다는 잘못된 세계관을 갖게 됨으로써 생겨났던 폐해들. 

 

기존의 우리들이 투쟁 모드였다면 이제는 함께 회복해야 할 때가 됐다. 이제는 그 누구도 기득권이랄 수 없이 모두 공동 피해자들이 된 상황이니 말이다. 이렇게 두서없이 남기는 내 글의 생각도 누군가들과는 이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명화의 이면을 보고 얻는
생각의 확장, 사고의 전환, 그리고 삶의 변화
이것이 바로 예술의 존재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