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책읽기

신념을 바꾼다는 것은 뇌를 바꾸는 것 <<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 - 빌 설리번>>

소라언냐 2025. 2. 20.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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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

by Bill Sullivan, 김성훈 옮김

 

 

이 책은 이렇게 만나게 됐죠

책에 대한 아무런 선행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독서모임 추천으로만 구입해 읽기 시작했다. 실험 결과들을 인용해 본인의 주장을 펴는 책인듯 보여 막연히 뭔가 도전적인 내용이리라는 짐작은 하고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내용이 넘나 급진적이어서 중간중간 멈춰 나의 세계관의 일부를 보수하는 과정이 필요해 읽는데 시간이 걸렸던 책.

 

우리는 DNA를 다음 세대로 확실히 남기고 전달하기 위해 전 생을 바쳐 살다 가는 생존기계라는 내용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장이 첫번째 뇌라던 스티브 건드리의 <<오래도록 젊음을 유지하고 건강하게 죽는 법>>과 유전자, 미생물균총, 성장 배경과 나와의 연기설(?) 비슷한 내용들과 감정이 그저 생화학적인 신호임을 알아차리라는 부분을 읽자면 불교 철학이, 죽은 후에도 남는 영혼은 없다고 잘라 말하는 부분에서는 공산주의 유물론이 어른거린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중독에 관한 부분이었다.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자를 보면 그 사람 자체가 사는게 힘들겠다는 생각은 잠깐이고, 그 사람 때문에 피해를 보고 있을 가족들에 대한 염려가 더 되었던게 사실이다. 마치 나는 ‘그런 사람'이 될 가능성보다는 ‘그런 사람' 때문에 피해를 보게 되는 쪽임이 더 확실하다고 믿는 오만함이 있었으니. 

 

담배, 마약, 알코올, 도박, 게임 같은 중독이 얼마나 무서운지 우리 모두 알면서도 그 거대 산업은 달랑 경고문만을 부착한 채 합법적으로, 끝을 모르고 발전하는 이 시스템을 욕해야지, 중독되게끔 만들어 놓고 중독된 사람을 탓하는 이 시스템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유혹은 어디에나 항상 넘쳐 나면서 유혹에 넘어가는 순간! 매장시켜버리는 무서운 시스템. 이렇게 명확히 깃발을 올려 준 작가에게 고맙다.

 

금주가 어려운 이유 

중독에 걸린 사람도 변화를 원하지만, 뇌가 손상을 입어 안 되는 것이다. 마치 더 이상 인슐린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췌장처럼, 중독에 빠진 뇌도 더 이상 자제력을 조절하는 화학물질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우리는 인슐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당뇨병 환자를 구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약물 중독에 걸린 사람을 구박하는 것은 공정한 일일까?

 

책의 앞부분에서는 상대적으로 가볍고 흥미있는 주제들을 다루었다. 우유를 소화하지 못하는 사람, Asian glow, 고수에서 비누향을 맡는 이유, 정크푸드를 좋아하는 이유부터 알코올, 마약 등의 중독에 대한 다소 심화된 주제들.

 

앞쪽의 말랑한 주제들에 대한 작가의 의견에 끄덕끄덕 수긍하며 읽어가다 보면 마침내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작가는 작심했던 의견들을 쏟아내는 듯하다. 기분, 감정, 신념, 종교, 행복, 깨어남 등의 소위 인간의 ‘영혼’에 관한 주제에 대해서 말이다. 빌 설리번은 앞부분의 문체에서 종종 읽히던 웃음기를 쏙 빼고 단호하게 말한다. 영혼이라는 것은 없다고. 그저 생화학적인 전기신호일 뿐이라고. 일전에 읽은 유발 하라리의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그의 영혼에 대한 의견과 궤를 같이 한다.

 

내가 환상에 불과한 이유  

뇌의 일차적인 기능은 저 바깥 세상을 머리뼈 속으로 갖고 들어와 뇌가 거기에 반응할 수 있도록 현실을 시뮬레이션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것도 이 복제 세상 속의 또 다른 등장인물에 불과하며, 뇌는 우리가 무언가를 하기 전에 무엇을 할지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자아와 자유의지라는 느낌은 환상이다. 

 

인간의 영혼과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막연한 기대를 확 걷어버리는 거침없는 의견을 주장을 읽다보면 허무하고 슬퍼진다. 이제는 한물 간 공산당의 유물론을 그대로 옮겨다 붙인듯한 주장인 것만 같은데, 이를 뒷받침하는 실험 결과들을 읽다보면 말이다.

 

정말 죽으면 그만인걸까? 영혼이란 그전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잊고, 먼저 간 사람을 쉽게 잊고 지내는 것에 대한 우리의 부채감을 줄이기 위해 고안된 아이디어였을까? 쓸데 없는데 정신 팔리지 말고 닥친 일에 집중하는, 생존기계 본연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작가는 나처럼 어리버리하며 흔들리고 있을 독자들을 위해 다시 한 번 확실히 주장한다. < 뇌가 문제점을 가진 이유 >에서 ‘뇌는 항상 새로 입력되는 감각적 데이터를 처리하는 대신 패턴을 찾아 무언가를 가정하려 한다. 그리고 이런 가정을 어찌나 굳게 믿는지, 반대되는 명확한 증거를 제시해도 자기가 세운 가정에 더 매달린다’ 고.

 

한동안 내 머릿속에서 딱 맞는 패턴을 찾지 못해 당황스럽다. 나도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믿어온 나만의 가설에 매달리고 있는 중인지도. 영혼은 모르겠고 나의 에고 환상 하나만큼은 자신있게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영혼이라는 개념은 범죄행위, 중독, 낙태, 죽을 권리 등을 다스리는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법을 고안할 수 있는 능력을 더럽히고 말았다. 인간 본성에 관한 한 영혼은 틀린 가설이었다. 영혼은 이제 역사 속으로 은퇴해야 할 개념 중 하나다. … 과학은 우리가 우주의 구조와 긴밀하게 하나로 얽혀있고, 세상 모든 것, 세상 모든 사람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우리의 생존 기계는 우리 몸속에 사는 수없이 많은 미생물 그리고 우리 뇌에 살고 있는 문화적 밈과의 긴밀한 관계에 영향을 받는다. 수정되는 순간 우리 유전자와 뇌는 셀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빚어질 수 있었지만 우리만의 독특한 환경과 경험이 지금의 우리를 빚어냈다. 이 말은 다시 한 번 반복할 가치가 있다.


Nature vs. Nurture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 센터에서 길게 일하지 않았지만 아이들의 성장을 기록하는 것이 업무였으니 집중적으로 2세 아이들 그룹을 관찰할 수 있었던 기간이 있었다. 토들러 아이들만 봐도 저마다 타고난 기질이, 그리고 그 가족들이 보인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작하면 앞뒤 안가리고 덥썩 손부터 대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멀찌감치 다른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것을 보고 자기도 충분히 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서야 그제서야 움직이는 아이들이 있으니 말이다.

 

유아기에 공을 들여 키우면 반은 했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그러나 무균실에 사는 존재가 아닌 이상 상처를 딛고 일어설 줄 아는 유전자를 물려주려 노력하는 것, 즉 후성유전학에 조금 더 공을 들여야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타고난 DNA는 어찌할 수 없지만 사회가 다음 세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니.  

후성유전학 연구는 유전자와 환경 사이에서 일어나는 긴밀한 상호작용을 강조하고 있으며, 유전자가 곧 운명이 아닌 이유를 보여준다. 우리가 가지고 태어나는 유전자를 결정할 수는 없지만, 환경을 바꿈으로써 그 유전자들의 발현 방식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다.

 

신념은 바뀌지 않는 이유

마지막으로 요즘 읽는 책들에서 계속 읽었던 주제. 왜 사는지와 신념 등 답이 없는 주제에 대해서는 얘기를 하지 말라는 충고 말이다. 작가는 뼈 때리는 한 문장으로 설명한다. 정녕 광화문과 여의도 광장의 태극기 부대들은 포기가 정답인가.

신념을 바꾸라는 것은 그저 생각을 바꾸라는 요구를 넘어, 뇌 자체를 바꾸라는 요구이다.

 

 

조상으로부터 받아 태어난 DNA + 내가 먹고 취해 생긴 나의 장내 미생물균총 = 나.

유전자는 나의 바꿀 수 없는, 타고난 디폴트 값이니 사는 환경만큼은 내가 바꿔야겠다. 수많은 임사체험의 기록들이 포유류의 죽음 전의 의식 고양 단계였다는 작가의 주장을 상기하면 죽은 이후의 세계는 그 누구도 모른다. 

 

이런 주장대로라면 나는 어차피 무로 사라질 존재인데, 그런 손님같은 존재라면 되도록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남을 사람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되돌이표를 만났다. 적게 먹고, 움직이고, 잘 자고, 적게 갖는... 그럼으로써 이 거대한 유혹의 시스템에 혹해서 존재 의미도 없는 에고만 키우지 않으려면 말이다.

 

다 읽고 나니 신념은 바뀌지 않는다는 작가의 주장. 정말 그런가보다. 나는 아직 내게 고유한 영혼이 없다는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