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인생의 이야기
작가 테드 창님을 소개합니다
1967년에 태어난 대만계 미국인 과학소설 작가. 2020년대 현재 전 세계의 문학계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SF소설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쿼런틴>>을 쓴 호주 작가 그렉 이건과 함께 하드SF의 양대산맥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브라운 대학 컴퓨터과학과를 졸업하여 마이크로소프트에서도 일한 적이 있고, 프리랜서로 전향한 뒤로는 뛰어난 글솜씨를 살려서 학술지나 문예지에 에세이를 기고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29년 동안 겨우 중편이나 단편 소설 17개를 썼지만 각종 유명 SF상은 다 휩쓸고 있다.
SF 중에서도 과학적 정합성을 특히 중시하는 하드 SF 작가로 간주되며, 특히 철학이나 과학철학적 관점에 입각한 사고실험을 보편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소설로 형상화하는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2009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초청되어 내한한 테드 창이 'SF와 판타지의 차이'를 주제로 진행한 강연에서 했다는 아래의 내용은 SF 장르에 관심이 없던 내게 새로운 인사이트를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SF와 판타지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판타지는 근본적으로 우주의 일부는 영원히 우리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오랫동안 판타지가 이어져 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과거에 사람들은 우주를 신비한 존재로 여겼고 신 또는 마법으로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래를 배경으로 판타지를 쓴다면 언뜻 SF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이면을 파고들면 실제로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판타지와는 달리 SF는 우주는 논리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우주는 기계와 같은 것이고, (과학을 통해) 그것을 탐구하면 우리도 우주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주를 더 깊게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그 지식은 전파되고 인류 사회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인류 역사에서 과학적 사고방식은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것이라서, 그런 관점에서 쓰인 이야기들을 500년 전, 1000년 전 사람들이 읽는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SF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바로 그런 식의 새로운 이야기들이다.
그렉 이건의 <<쿼런틴>>을 통해서 앞뒤가 착착 맞아 떨어지는 하드 SF 장르을 읽는 묘미를 알게 됐는데, 이에서 이어진 독서모임의 추천으로 하드 SF의 양대 산맥이라는 테드 창의 책을 만나게 됐다.
그의 소설들은 그의 소개글처럼 ‘과학철학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특히나 <바빌론의 탑>, <이해>, <0으로 나누면>, <당신 인생의 이야기> 등의 소설들은 언어 너머의, 인간 지각 너머의 소통에 대해 상상하고, 이야기에 반영하려 애썼고, 전달에 성공했다는 생각이 든다. 문외한인 나마저 그 누구와도 소통할 길 없는 주인공들의 답답함과 외로움에 살짝 공감이 되었으니 말이다. ㅎㅎ
책에 실린 중단편들의 순서대로 간략하게 기억에 남는 내용을 정리해둔다.
[ 바벨론 탑 ]
어려서 배웠던 성경에서의 가르침은 인간의 오만함의 끝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결말 때문인지 무의식적으로 나는 높은 타워 건물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바벨론의 탑>을 읽기 시작하면서 눈감은 채 질주하는 기술 발전을 꼬집는 글일까 했었는데, 이야기는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듯 하다.
하늘에 닿은 천장을 파들어가기(?) 위해 꼭대기에 오르는 광부 힐라룸과 동료들. 그들이 낯선 바벨론 탑을 올라가며 겪는 장면을 풀어낸 장면들은 너무나도 생생해 마치 내가 높은 곳에 올라선 듯한 고소공포증을 느끼기도.
탑을 쌓아 올라가는 그 기나 긴 시간 동안 신이 사는 세상을 영접할 수 있다는 기대와 동시에 야훼의 진의를 알 수 없어 불안한 사람들. 세대를 이어 진행되는 불안한 탑 쌓기는 이윽고 현실이 되어 땅을 내려가기도 먼 사람들은 탑 중앙에서 집을 짓고 자녀를 기르며 살아간다. 불안함이 디폴트인 우리의 인생을 비유하는 걸까.
하늘을 뚫어 만난 대홍수를 거쳐 다시 눈뜬 광부 힐라룸이 만난 건 어이없게도 다시 대지. 지상에서 하늘의 끝에 이르면 또 다른 지상의 시작으로 되돌아올 수 밖에 없는, 처음과 끝이 연결된 원통형 인장의 어디쯤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는 인간지식의 한계를 말하고자 했을까. 인생의 부조리 함을 말하는 걸까.
[ 이해 ]
이 책을 읽으려면 ‘게슈탈트(Gestalt)’라는 어휘에 대해서 찾아봐야 했다. 심리학, 철학 등에서 부분이 모여서 된 전체가 아니라, 완전한 구조와 전체성을 지닌 통합된 전체로서의 형상과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즉, 게슈탈트는 세상을 지각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주인공 그레코는 사고로 인한 뇌손상으로 식물인간이 되었다가 호르몬 K 주입으로 강화된 지능 천재가 된다. CIA의 영입을 피해 호르몬 K 앰플을 가지고 탈출해 추가 주입함으로써 지능 그 자체의 강화를 통한 자기 버전의 깨달음의 상태까지 이르고자 노력하고, 그 과정들을 통해 도취감을 느낀다.
하지만 호르몬 K를 통해 강화된 또 다른 초인이 있었는데, 이를 수단으로 자신의 역량을 키워 인류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바꾸겠다는 레이놀즈와 지능을 그 자체를 개인적인 지능 강화 수단으로 여기는 그레코가 만나 정신적인 팽팽한 접전을 통해 그간 각자가 가졌던 통찰 사이의 차이점을 ‘계속적으로, 동시적으로, 상호의존적으로, 흡수하고, 결론 내고, 반응해' 단 하나의 뉘앙스로 빠뜨리지 않고 소통한다.
짧은 순간의 교류에서도 게슈탈트적인 소통을 마친 그들은 둘이 양립할 수 없음을 결론냈다. 그레코는 게슈탈트를 이해하는 능력을 키웠으므로 이 대결 아닌 대결에서 레이놀즈의 파괴 커맨드의 게슈탈트를 온몸으로, 기억에 심어놓은 것부터 모두 흡수하여 이해했기에 자신을 죽음을 지켜보며 죽어간다.
일전에 독서모임에서 얘기했던 약물을 통한 깨달음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됐다. 호르몬 K같이 초인으로 각성이 되어 일순간에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면, 이를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깨달음의 순간의 체험이 같은데도 불구하고, 약물을 통한 깨달음은 지난한 수행을 통해 다다른 깨달음과 다를까?
약물로 통해 얻은 체험은 이 소설의 내용과는 달리 도파민 과다 분비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중독을 야기할 뿐, 컨텐츠가 없기에 같을 수 없다고 마무리 했던 기억이 나는데... 이 책의 호르몬 K처럼 주입할 때마다 뉴런의 연결, 정신, 신체가 같이 강화가 된다면?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ㅎㅎ
[ 0으로 나누면 ]
태생적 문과인 내가 감히 수학 천재의 외로움을 살짝 알아볼 수 있었던 소설. ㅎㅎㅎ
세상에 대한 가장 명징하고 논리적 해석인 수학. 우주의 언어라는 수학 역시 스스로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유클리드 기하학에 모순이 있음을 발견할 때까지는 모순이 없는 걸로 동의하고 있다는 것.
천재 수학자 르네는 이처럼 자기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이론이 너무도 무의미하게 느껴져, 무력감과 혐오감에 빠지며 괴로와하지만, 그로부터 생과 사가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읽힌다.
소설은 같은 사건을 두고 르네 입장에서의 스토리들을 a로, 남편 칼의 입장에서 본 스토리들을 b로 치환한 공식같은 소제목들을 달고 있다. 마지막 챕터 9의 수식은 9a=9b였지만, 르네가 밝혀낸 대로 1=2라는 모순을 담고 있다.
칼은 르네의 말이 무슨 뜻이지 자기도 정확하게 알며, 그 자신도 그녀와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다. 이것은 두 사람을 이어주는 것이 아니라 떼어놓는 종류의 감정이입이었고, 그녀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르네는 수론의 모순을 발견했다’ 라는 사건에 그녀의 에고의 해석은 무한대로 확대된다. 자신의 지금까지의 모든 연구들이 부정되었고, 인생이 부정되었으며, 이 세상이 허상이 됐다는... 존재의 허무함을 극복하지 못해 자살까지 시도했음이 이해됐다.
9a=9b라는 수식은 1=2라는 모순을 담고 있다.
작가는 인간은 어차피 서로를 알 수 없는 자폐아 같은 상태로 삶을 산다는 것이 디폴트인데, 그럼에도 서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속인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걸까. 1=2라는 거짓을 담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렇지 않고는 존재의 외로움을 견딜 길이 없으니...
[ 당신 인생의 이야기 ]
이 책들의 중단편 소설들 중 가장 인상깊에 읽었던 책. <당신 인생의 이야기>라는 이 중편 소설은 일찌감치 헐리우드에 판권 계약되어 드니 벨뇌브 감독의 <Arrival (한국판 - 컨택트)>로 영화화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도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책만을 통해 작가가 그리는 장면들을 상상하기는 무척 어렵지 않았을까 여러번 생각했다. 그만큼 영화도 잘 만들어졌다.
소설은 루이즈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딸을 갖게 되던 아름다운 달밤을 묘사하면서 시작된다.
이어지는 장면은 외계인들이 지구에 왔고, 정부와 군에서는 그들이 왜 왔는지, 침공의 징후는 없는지 알아내기 위해 미국 각지의 언어, 물리 학자들을 섭외한다. 언어학자인 루이즈는 물리학자인 게리와 한 팀이 되어 체경을 통해 외계 생명체와 만나 그들과 소통한 결과를 보고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외계어도 비교를 통해 학습할 수 있다니! 사피엔스 학습의 한계는 어디인가 말이다. 그 학습과정을 또 설명해내는 작가도 대단하다.
빛이 수면에 닿는 순간 굴절해 각도를 틀어버리는 현상에 대한 ‘페르마의 정리’를 통해 게리와 루이즈는 외계어가 마치 이것과 같이 소통된다는 결론을 얻는다. 언어체계를 분석하면서 루이즈는 그들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처럼 시간을 따라, 원인을 따라 서술되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이미 끝을 다 이해한 것처럼 시작과 끝이 동시적으로 서술된다는 것을.
이는 각각 인과론과 목적론을 대표하며, 그 어떤 해석도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언어의 사용 배경에 있는 인식의 차이는 세계관의 차이이며, 시간의 이해 자체를 뒤틀어버릴 수 있는 엄청난 간극을 의미한다.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면서 햅타포드 문자언어 속에 내포된 세계관, 시간에 대한 인식차이로부터 끌어내는 자유의지의 여부 그리고 주어진 인생에 대한 삶의 태도까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이렇게 언어가 정보전달을 넘어서 이전에 가지고 있던 세계관까지 흔들 수 있다는 발상과 그 전개 과정은 읽는 내내 참으로 신선했다. 정말 언어학에 깊은 이해가 있는 이가 아니었다면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딸이 25세에 등반 중 추락 사고로 사망한 가슴 아픈 개인사를 가지고 있는 루이즈. 작가는 그녀가 외계어를 이해하는 과정 중간중간에 딸과의 대화를 병치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이는 이렇게 저렇게 시간의 순서를 따르지 않은 에피소드들이 뒤섞여 있어도 소설 후반부에는 그 모든 상황이 통째로 이해되는, 햅타포드의 언어 형식을 따랐다고 생각된다. 이미 루이즈는 모든 상황이 종료된 시점에서 서술하고 있고, 스토리의 최단 또는 최대 거리를 알고 있다.
루이즈는 ‘미래를 안다는 것과 자유의지(선택의 자유)는 양립할 수 없다’고 독백한다. 그리고 소설의 결말은 그 모든 아픔을 겪고도 딸을 갖던 그 밤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 앞으로 일어날 슬픈 결과를 앎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삶을 반복하겠다는 듯한 메시지를 주며 마친다.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 일흔 두 글자 ]
적확한 명명을 통해 인류의 출생과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발상의 이 소설은 너무 고도로 가공된 탓인지, 작가의 상상의 세계에 이입 능력이 부족했던 나는 끝내 들어가지 못했다 -.-
명명학자 로버트가 사람의 손가락 기능까지 구현하는 작명을 했다는 것을 알고 찾아온 카발리스트. 그리고 똑같은 개발 결과를 인류 종의 안정성을 위한 -그러나 사실은 정치적, 우생학적으로 쉬이 변질될- 프로젝트에 이용하려 그를 비밀리에 영입하는 필드허스트 경.
작명된 이름을 둘러싼 사건에 휘말리면서 카발리스트의 죽음으로부터 히브리어로 된 문서를 우연히 습득하게 된다. 이를 통해 세대의 영원한 지속 그리고 누구의 통제를 받지 않을 ‘재귀(제자리로 돌아오다)형 이름'을 발견하게 되고 이를 통해 세대를 지속하게 된다는 스토리.
[ 인류 과학의 진화 ]
매우 짧은 단편이었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이야기였다.
인류의 과학이 짧은 기간 눈부신 진화를 거듭해 메타인류와 기존의 인류와의 엄청난 간극이 생겼다.
메타인류들은 디지털 신경 전이로 소통을 하기에 그들의 작업 결과물들은 보통의 인류에게는 이해 불가의 영역이 되어 메타인류들의 연구 업적에 대한 해석학이라는 학문이 생길 정도.
이 시기에 부모가 된 이들이 직면한 어려운 선택이란 이것이다. 배아기에 스기모토 유전자 요법을 시행해 내 아이가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성장하는 것을 지켜봐야 하더라도 우량한 메타인류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발육기 동안 신경 전이에 엑세스하는 것을 제한해 나와 같은 인류로 만들 것인가.
적당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이민 생활에서 이 비슷한(?) 고민을 했던 지인들이 생각났다. 아이에게 부모 조부모와 소통이 가능하도록 한국어를 가르칠 것인가 어차피 아이들은 영어권 국가에 사니 집에서도 영어로 소통해 영어 습득에 더 집중하도록, 그리하여 주류 사회에 진입이 수월하도록 그냥 둘 것인가.
소설은 인류 부모들이 나름 풍요로운 경제 상황에서 자신의 아이들이 메타인류와 경합할 일은 그리 흔치 않으리라는 결론을 내린 후 (다행히?!) 신경 전이 엑세스를 제한하는 선택을 하는 쪽으로 기울었다고 진행된다.
작금의 미친 속도의 기술 발전은 반드시 소외되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고 있슴이 분명하니 나름 생길 법한 일이라고 따라가며 읽었던 소설의 끝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작가는 우리에게 격려를 남긴 걸까. 하지만 지금 읽고 있는 유발 하라리의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의 내용을 떠올리면... 글쎄다 ㅠ.ㅜ
그 결과 인류 문화는 미래에도 계속 남을 공산이 크고, 과학의 전통은 그 문화의 필수 불가결한 일부이다. 해석학은 과학적 탐구를 위한 적절한 방식 중 하나이며, 독창적인 연구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지식 체계를 증대시킨다. 게다가 인류 연구자들이 메타인류가 간과한 응용 방법을 찾아낼 가능성도 있다. 너무나 큰 우위를 점하고 있는 탓에 메타인류는 우리 인류의 관심사를 모르고 지나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종류의 지성강화 요법. 이를테면 인간이 자신의 정신을 메타인류에 필적하는 레벨까지 점진적으로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는 종류의 연구가 하나 있다고 치자. 이런 요법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우리 종의 역사에서 생겨난 가장 큰 규모의 문화적 간극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도 있겠지만, 이런 생각은 메타 인류에게는 아예 떠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가능성 하나만으로도 인류의 연구를 존속시켜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 지옥은 신의 부재 ]
작가의 종교관을 미뤄 짐작해볼 수 있었던 이야기였다.
천사의 강림으로 인한 사고로 사랑하는 아내 사라를 잃은 닐. 평소 무신론자 같았던 그는 자신은 죽으면 지옥에 가게 될 것이라는 것에 아무런 저항이 없었지만 불시에 사라를 잃은 지금 그는 천국에 가 있는 아내와의 재회를 위한 수단으로 신을 사랑하기 위해 발버둥친다. 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야만 아내가 있는 천국으로 갈 수 있기에.
마침내 타락천사들의 강림이 잦은 성지에 찾아가 천상의 빛을 보고 천국에 가기를 계획하는 닐. 천사 강림시의 번개에 맞아 차량 사고가 나고 천천히 죽어가면서 또 다시 천상의 빛에 의해 눈이 멀게 된다. 이 사고를 통해 지복의 행복을 느낌과 동시에 만지고 보이는 모든 것들에서 신의 사랑을 체험한 후 진심으로 참회하고 죽게 되는데, 이렇게 죽은 그의 영혼은 천상으로 들리는가 싶더니 지옥으로 떨어진다.
소설 속의 지옥은 신이 없이도 영원히 살 수 있으며, 살아있을 때처럼 웃고 울고 사는 곳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 손으로 만져지는 것, 이 모든 것에 신의 부재가 느껴지는 곳. 닐은 살아있는 동안 신의 사랑을 갈구한 적은 없지만 죽기 직전의 체험으로 인해 신으로부터 영원히 격리된 지옥 즉, 신의 부재 속에서 신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을 실천하게 된다.
소설을 읽으면서 무슨 신이 이렇게 일관성이 없어? 하고 일면 답답해 하는 내가 보였다. 또 다시 소설 속의 인물들처럼 삶의 이유를 묻고, 신이 있고, 의롭고 자비롭다고 오해하는 나. 삶이란 답없는 질문을 살아내는 것이라 이해했으면서도 나는 또 이러고 있다.
니체 철학을 듬뿍 담은 SF 소설
이 책을 통해 작가가 말하려고 했던 건 에고 세상의 무상함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빌론의 탑도, 명징하다는 수론도, 그렇게나 알고 싶은 신의 뜻도... 모두 덧없다.
수학 이론을 발표하며 수학 천재라 추앙받던 르네도 자신의 수론의 모순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수론 연구를 통해 신에게 닿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종잡을 수 없는 신의 출현과 지옥의 시현을 보면서, 또한 바벨탑을 쌓아올라가는 중에도 사람들은 매사 신의 뜻을 알고 싶고 진심으로 사랑하고 싶어한다. 인간의 이해로 신의 뜻을 설명할 수 없을 때, 에고가 지배하는 인간은 지옥을 살게 되므로. 신의 부재가 확실한 지옥이나 신의 뜻을 도무지 알 수 없어 불안하게 살고 있는 현세나 다를 바 없으므로.
탑을 쌓으면서, 수론의 논리를 세워가며, 신의 시현의 의미를 정의하는 동안 사람들은 신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고, 신이 되어간다고 느껴 행복하다. 한편 동시에 불안함도 함께 커진다. 우리가 신의 뜻이리라 기대한 바를 한 것일 뿐 정작 야훼의 뜻은 알 수가 없으니. 불안함. 분리를 믿는 에고에 눈 뜬 채 휘둘리는 인생을 비유했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책을 소개하는 글들에서는 동양철학의 그것과 닿아있는 과학 철학 책이라는 내용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실린 중단편 소설들 전반에서 니체 철학의 향기가 느껴졌다. 모든 것이 무상하고 허무한 세상이라도, 나는 진리에 절대 닿을 수 없는 고독한 존재라도, 나는 이 삶을 다시 살겠다라고.
연이어 읽은 최진석 교수의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란 책에서 허무한 생을 살아야 하는 의미를 전한다. 허무가 본질인 존재가 그 찰나의 순간을 사는 동안 영원을 깨닫는 순간을 갖기 위해서라고. 허무가 근본인 우주의 도를 깨닫기 위해서라고. 그러므로 인생은 득도가, 깨달음이 목표라고 말한다. 분리라는 꿈에서 깨 본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이니.
허무한 줄 알면서 왜 사는가 <<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 최진석 >>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우리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내가 별이 되는 것이다. 이 순간의 삶 속에서 내가 영원을 경험하는 것이다. 나에게 별은 무엇일까? 목적을 잃지 않게 해주는 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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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주인공 루이즈는 그토록 기쁨을 주던 사랑하는 딸이 25세에 자신보다 앞서 죽을 것을 이미 아는 상황에서 다시 딸을 갖던, 달빛이 가득했던 그 밤의 정원으로 돌아가 아이를 갖기로 결심하는 장면으로 마친다.
이것이 인생인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다 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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