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책읽기

이왕 꿀 꿈 사랑을 택하자 << 자기 앞의 생 - 에밀 아자르 (로맹 개리) >>

소라언냐 2024. 12. 24.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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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La Vie devant soi)

 

by Emile Ajar (Romain Gary), 용경식 옮김

 

 

작가 로맹 개리를 소개합니다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로맹 개리라는 작가가 쓴 책. 부록으로 작가의 유서를 읽게 될 줄은 몰랐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해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유태인 배경을 가지고 태어나 프랑스로 이주하여 프랑스인으로 키우려는 헌신적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연대기를 읽어보니 주미 프랑스 영사까지 지낸, 20년 경력의 걸출한 정치인이었고, 공쿠르 상을 2번이나 수상하는 내공 있는 작가이며, 헐리우드 영화 감독으로도 진출하는 등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헐리우드에서 만난 여배우 진 세버그와 재혼 해 아들을 두었다.

 

재능 많고 통찰력이 있었던 작가는 끊임없이 새로운 창조 작업을 원했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 자본주의는 그의 필체에 기성작가란 얼굴과 틀을 만들어 옥죄었던 것 같다. 부인 진 세버그의 자살 후 약 1년 뒤 부록에 해당하는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을 남겨 익명 뒤에 숨었던 자신의 경력을 밝히는 동시에 ‘파리풍’의 비평문화를 비판했고 권총으로 생을 마감한다.

 

 

책 내용을 볼까요

<<자기 앞의 생>>이라는 제목은 어쩔 수 없이 내 앞에 ‘닥쳐진 생' 비슷하게 약간 운명론적인 암시를 주는 한편 오직 나 자신만이 살아낼 수 있다는 주도적인 느낌도 주는 듯하다.

 

엉덩이로 벌어먹고 사는 사는 여자들, 그리고 그 여자들이 ‘일하다 위생적인 처리를 하지 못해 태어난’ 아이들 중 하나였던 모모, 아우슈비츠를 겪은 후 그 아이들을 불법적으로 키워 먹고 사는 엉덩이로 벌어먹고 살던 로자 아줌마, 여장 남자, 뚜쟁이, 포주, 이주 노동자, 난민 등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다. 

 

 

우편환

로자 아줌마와의 확신에 찬 관계를 단박에 부숴버린 우편환. 모모는 로자 아줌마와의 관계에서 처음으로 분리를 느끼며 불안해 한다. 로자 아줌마는 나를 사랑해서 키운 것이 아니라 300 프랑의 우편환 때문에 키웠다는 사실의 발견은 우편환이 제때 지급될 때까지만 나를 사랑할 것이라는 두려움이다. 

 

하밀 할아버지에게 사람이 사랑없이 살 수 있느냐고 묻고, 로자 아줌마의 관심과 또 어쩌면 우편환 없이도 자신에게 온전한 사랑을 줄 수 있는 엄마가 올 수도 있다는 희망으로 여기저기 똥을 싸대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관심을 받기 위한 몸부림. 어린 모모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사랑이었다. 

 

로자 아줌마가 창녀들은 자기가 바라보고 싶은 대로 바라보는 눈이 있다고 했는데, 하밀 할아버지는 그 얘기에 대해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오래 산 경험에서 나온 말이란다.” 라고 말한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사랑 아니면 두려움이라는 말로 읽힌다. 로자 아줌마는 이유를 묻는 모모에게 꼭 무슨 이유가 있어서 무서운 것이 아니라고 말했는데, 그저 두려운 그 상태는 어린 모모가 우편환의 존재를 확인했을 때 왜 그렇게 슬프고 두려웠는지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확실히 느꼈던 분리감이었고, 이 분리감은 어른들에게도 상시 느끼나 존재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었으리라.

 

우리가 서로 분리되어 있고, 내게 닥친 내 앞의 생은 오롯이 나 혼자 책임져야 한다는 끝을 모를 불안감. 어린 모모가 느낀 불안은 로자 아줌마도 고스란히 느끼지만 말로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고, 모모가 로자 아줌마에게 애착을 가지듯 로자 아줌마는 자신만의 지하실 유태인 동굴에서 태내의 아기와 같은 분리 없는 안정감을 얻는다. 

 

 

영화 더빙

로자 아줌마의 건강 상태가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지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져 자신이 빈민구제소로 보내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릴 때 우연히 나딘 아줌마를 만나게 된다. 그녀의 따듯함에 끌려 뒤를 따라 가서 보게 된 영화 더빙 작업. 시간을 거꾸로 돌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고, 피투성이 상처가 감쪽같이 없어지는 마술같은 장면. 

 

작가는 인생이 각자의 영화 같은 꿈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자 했던 걸까. 모두 각자의 앞에 펼쳐진 생이라는 영화 스토리에 매몰되어 웃고 울고 사랑하고 두려워하지만 그 영화는 오직 나만 볼 수 있는, 존재하지 않는 영화이며, 결국은 끝이 있는 꿈이라는 것. 로자 아줌마에게 초인종 소리는 경륜장으로 끌고 갔던 게슈타포를 불러오는 버튼이었고, 정신이 나간 이후에도 자신이 잘 나가던 시절의 부분만 계속 반복해서 보고 있는, 과거를 사는 사람이었다.  

 

수시로 로자 아줌마를 걱정하고 생각하는 모모는 영화를 되감아 보는 그 순간에도 로자 아줌마의 시간을 거꾸로 돌려 열 다섯살에 찍은 사진 속의 그녀처럼 다시 행복해지길 상상한다. 나딘 아줌마는 모모에게 막연히 친모를 연상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녀의 금발의 두 아이들을 보는 순간 현실을 자각하고 다시 자신과 같은 ‘똥같은 부류의’ 로자 아줌마에게 달려간다. 못생기고 늙고 냄새나는 죽어가는 아줌마지만 우린 서로 단 둘 뿐이고, 우린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니까. 사랑하니까. 

 

 

판단 중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다.' 라는 챨리 채플린의 말과 상반되는 스토리를 읽었다. 너무나 처연하고 슬픈 결말이었으나 그저 슬프기만 하진 않았던 것은 서로를 사랑했던 모모와 로자 아줌마, 모모를 아끼던 하밀 할아버지 그리고 그들을 물심양면 보살피는 롤라 아줌마와 7층까지 로자 아줌마와 카츠 의사 선생님을 엎고 날라주며 시간이 될 때마다 귀신을 쫒아주는 의식을 정성스레 치뤄주던 아프리칸 이주민들. 멀리서 보면 더 잃을 게 없을 군상이지만 그들이 서로에게 베풀고 돕는 따듯한 장면들은 모모의 암담한 현실을 잠깐잠깐 잊게 해줬다. 가까이 들여다 볼수록 사랑스러운 사람들. 판단을 중지해야 한다.

 

나딘 아줌마의 필름 작업처럼 인생은 각자 주연의 영화일테다. 로자 아줌마가 말한 것처럼 창녀들 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 속에서 보고 싶은 대로 바라보고 살고 있고, 하밀 할아버지 말대로 자신이 말한 대로 살게 되는 것이 인생이라면 단연코 사랑하기로 선택해야 한다. 흰색과 검은색이 모호하게 섞일 때마다 본질을 보고 순간순간 사랑을 택해야 한다. 이왕 꾸고 끝날 꿈이라면 악몽이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추천을 남긴다.

Merry Christmas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