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책읽기

누가 페미니즘을 공격하는가 << 자기만의 방 - 버지니아 울프 >>

소라언냐 2024. 10. 1.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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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A room one’s own)

 

by Virginia Woolf

 

 

작가 버지니아 울프님을 소개합니다

1882년 런던에서 당대 최고 수준의 지적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집안에서 자랐다는 작가. 어린 시절 의붓 오빠에게 당한 성추행의 트라우마와 모친을 여의고 난 후부터 시작된 정신 질환은 그녀의 평생을 괴롭혔다고 한다. 오빠 토비가 대학에 입학한 후 그의 쟁쟁한 친구들과 함께 블룸즈버리 클럽을 결성했는데, 그녀는 스스로 독학한 지식으로 당당히 조인해 활동하며, 이후 일원이었던 레너드 울프와 결혼한다.

 

<타임스> 문예 부록에 서평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델러웨이 부인>> <<등대로>> <<파도>> 등 20세기 수작으로 꼽히는 소설들과 <일반 독자>에 문학평론, 서평 등을 발표해 영국 모더니즘의 대표작가로 인정받는다. 1970년 이후 페미니즘 운동이 시작되면서 <<자기만의 방>>과 <<3기니>>가 새로이 주목받기 시작해 현재 페미니즘의 고전 중 하나로 꼽힌다.

 

평화주의자로서 반전운동을 펼쳐오던 울프는 1941년 독일의 영국 공습으로 블룸즈버그의 집이 폭격되고, 곧 나치가 장악할 조짐이 강해지자 반전운동가인 자신과 유태인 남편이 위태로와질 것을 예견했고, 고질적인 정신질환이 재발하게 되자 자살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실제 나치의 블랙 리스트에는 그녀의 이름이 있었다고.

 


 

의식의 흐름이라는 글쓰기 기법

<<자기만의 방>>이라는 책 제목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페미니즘의 고전인 줄은 몰랐고, 버지니아 울프라는 작가가 왜 그렇게 유명한지도 잘 몰랐었다. 그런데도 나는 왜 그렇게 이 책이 궁금했을까. 책을 시작하면서는 뭔가 중언부언하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것 같이 책이 잘 넘어가지 않았는데, 이는 울프가 글쓰기에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라는데, 모임의 다른 분들도 처음엔 읽기 쉽지 않다고 한다. 

 

'의식의 흐름'. TV 예능 프로의 자막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 아니었던가. 뭔가 짜임새나 계획없이 생각나는 대로 손에 집히는 대로 행동하는 캐릭터가 나왔을 때 자주 나오던. 그러나 책을 읽고 나면 그녀의 글쓰기 기법이 우리가 그간 친숙했던 남성적 글쓰기의 그것과 달라 당황했을 뿐 적응이 된 후에는 곁에서 말하는 듯 매우 흡입력 있게 읽혔다고 생각된다.

 

 

울프의 강의 내용을 책으로 엮었어요

책의 내용은 캠브리지 대학 내의 여자 대학에서 울프가 강연했던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의 강연 내용을 정리해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작가는 옥스브리지라는 남자 대학에서의 오찬과 펀엄이라는 여자 대학에서의 저녁 식사의 차이나는 음식들과 공간을 비교하며 왜 여자는 남자보다 가난한지 묻는다.

 

그러면서 여성이 글을 쓰는 데에는 년 500 파운드의 돈과 자물쇠를 잠글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결론부터 말하며 어떻게 자신이 그런 결론을 내렸는지 사유의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강의 주된 내용이다.

 

울프는 옥스브리지 대학의 오찬에 참석하기 위해 가서 남는 시간에 대학의 정원 잔디밭에 들어갔다가 교구 관리자의 제한을 받는 에피소드로 시작하는데, 여성이 혼자 대학 건물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교수의 소개장이나 대학 연구원의 동행이 필요한 상황이다. 휘발성이 있는 깊은 사색을 방해하는, 도처에 있는 여자에 대한 제한과 이에 따른 일상의 긴장.

 

작가는 이렇게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눈에 보이는 제한들에 더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제한들을 소환해 보여준다. 남자들에 의해 쓰여진 방대한 서적들에 나타나는 여성 혐오, 대상화 그리고 기득권인 그들의 이해할 수 없는 -상대 성이 열등하다고 믿어야 자신들이 살아갈 자신감을 획득하는, 모든 권력을 가진 자들의 불합리한- 분노.

여성은 지금까지 수 세기 동안 남성의 모습을 실제 크기의 두 배로 확대 반사하는 유쾌한 마력을 지닌 거울 역할을 해왔습니다. …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폴레옹과 무솔리니는 여성의 열등함을 아주 힘주어 강조합니다. 만일 여성이 열등하지 않다면 거울은 남성을 확대시키기를 그만둘 테니까요. 그것은 여성이 남성에게 무척 번번히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는데 일면 도움이 됩니다. 남성이 여성의 비판을 받고 안절부절 못하는 것도 설명해 주지요. … 만일 여성이 진실을 말하기 시작한다면, 거울 속의 형체는 오그라들 것이고 삶에 대한 적응력도 감소될 것입니다.

 

픽션과 현실 사이 여성상의 괴리

작가는 또 트리벨리언의 연구를 인용해 엘리자베스 시대의 여성상이 역사상 실제의 여성상과 연극 등 남성들이 쓴 픽션에서의 주인공으로서의 여성상의 괴리가 있었다고 언급한다. 픽션에서의 그녀는 왕과 정복자들의 삶을 지배하지만, 실제로는 그녀의 손가락에 강제로 반지를 끼워준 어느 부모의 아들에 딸린 노예와 마찬가지였다는 현실과의 괴리. 마치 실제와 픽션 사이 제 3의 분야가 있는 것처럼 사실은 역사에서 누락되어 18세기 이전의 여성들에 대해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여자가 글을 쓰는 것에 대해 막연한 적대감이 만연했던 시절에 에이프라 벤이라는 여성 작가가 글을 써서 돈을 벌게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댓가가 없을 때는 경박하다고 여겨졌던 일이 돈으로 위엄을 갖게 되자 중산층의 브론테 자매, 제인 오스틴, 조지 앨리엇 등의 여성 작가들과 같은 일반 여성들이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녀들의 공통점 

 

1) 왜 하필 소설이라는 장르를 썼는가

얼핏 그냥 넘어갈 사실을 울프는 집요하게 분석한다. 그녀들에게는 자기만의 방이 없었고, 경제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침실 겸 가족 공동 거실에서 글을 쓰다 두서없이 집안 일에 호출 당하는 상황과 여러 사람들이 생활하는 집중이 어려운 공간에서 고도의 사유를 집약해 완성할 수 있는 시와 같은 글을 쓰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작가의 추측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생각해 볼수록 매우 예리한 통찰이다.

 

2) 이들 여성 작가들에게는 모방할 어머니들이 부재했다

남성 작가들이 긴 세월 동안 쌓아놓은 그들 집단의 공동의 문체가 있어 자신의 사유를 보태 글을 쓰기가 보다 쉬웠다면 여성들은 그런 유산을 물려받지 못했다. 울프의 글쓰기 기법으로 알려진 '의식의 흐름' 기법이 익숙해지기 전에는 난해하게 여겨졌던 이유.

 

3) 이들 모두 미혼이거나 아이가 없었다

위의 저 네 작가 이전에 글을 남겼다던 귀족부인 둘 역시 아이가 없었다. 자기만의 방까지는 없었더라도 돌봄과 양육으로부터 확보된 시간이라도 있었으므로 글을 남길 수 있었지 않았을까. 어린 자녀들을 둔 여성들의 시간 빈곤을 역으로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끄적이는 걸 좋아하는 파란 스타킹’이라는 글쓰는 여성에 대한 조롱. 이러한 여성들의 불합리한 현실은 종종 그녀들의 글에 분노로 나타나 작가로서 글에 보여줘야 할 성실성-글의 내용이 진실하다는 것을 일관성 있게 전하는 것-을 방해한다. 마치 사상을 의심 받는 작가가 정부의 검열 전에 자기검열을 거쳐 글을 쓰는 상황과 마찬가지. 여성은 글을 쓰면서 이러한 부당함에 항거, 논박하기 위해 상시 긴장하고 있으니 생명력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그러므로 그 글들은 소극적일 공산이 크다.

 

울프가 주목한 작가는 ‘미움 없이, 쓰라림 없이, 두려움 없이, 항의 없이, 설교 없이 글을 쓴’ 제인 오스틴과 여성으로서, 그러나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을 잊고 쓴 작가 메리(가명) 카마이클이다. 글을 쓰면서 자신의 성을 염두에 두고 쓴다면 치명적이라고.

 

 

마지막 장에서 그녀는 콜리지의 말을 빌어 위대한 마음은 양성적이라고 말한다. 인생이란 양성 모두에게 힘들고, 어렵고, 영원한 투쟁이기에. 남과 여의 융화가 일어날 때라야 마음은 온전히 풍부해지고 제 기능을 모두 사용하게 되는 ‘마음의 통일성’을 얻을 수 있다고.

 

솔직히 이 부분은 ‘엥? 지금까지 말한 거 다 뭐야' 싶은 마음이 들지만 강의 마지막까지 시종일관 팩폭만 할 것이 아니라 대안이란 걸 제시해야 하니 이렇게 맺어졌다 생각한다.

 

울프는 자신의 강연을 듣고 있는 청중인 여학생들을 독려하며 마친다. 누가 뭐라고 평하던지,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여러분이 쓰고 싶은 글을 쓰라고.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연간 500 파운드로 상징되는 경제력과 자기만의 방을 가지라고. 연간 500 파운드란 심사숙고할 수 있는 능력을 상징하며 문에 달린 자물쇠는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므로.


 

왜 페미니즘에 관한 대화는 불편할까요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꼽히는 <<자기만의 방>>. 1928년에 울프는 이 책을 시작하면서 ‘성이라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언제나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킨다’라고 말한다. 여성의 투표권과 재산권이 당연한 지금은 어떠한가. 미투 운동은 아직도 본인 인생의 사활을 걸어야 하는 이슈이고, ‘너 페미니스트야?’라는 질문은 사람 움찔하게 하는 강한 공격성을 띄고 있다.

 

나는 아직도 페미니즘이 주제로 나오는 대화에서는 어떤 포지션을 가져야 할 지 모르겠다. 잘못 이야기를 거들었다가는 자칫 험한 분위기가 될 수도 있는 이 주제는 나도 너도 모두 억울하기만 한, 그래서 그럼 다들 여자도 군대 가고 남자도 애 낳기라는 대환장 파티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울프의 말따나 ‘댓가 없는 굴욕적인' 집안일과 돌봄 노동을 강요당하는 여자들과 남자 알기를 ATM 쯤으로 취급한다는 남자들의 하소연들은 하늘의 별만큼이나 흔한 이야기들.

 

우리가 사는데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살림과 돌봄’이라는 노동이 돈으로 평가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남의 집안일을 해주고 돈을 버는 일은 할 지언정 내 집안 일을 내가 도맡고 싶지 않다는 말들. 돈이 나의 노동을 인정해주는 상징 아닌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가 잉여 인간이 아니라는 증거.

 

 

정말 쓴 웃음 났던 에피소드 하나. 홀로 계신 아흔의 노모가 식사를 너무 형편없이 드신다며 노모의 건강을 걱정하던 중년 형제의 해결책은... 두둥~ 마침 이혼해 혼자가 된 아우에게 형이 진지하게 어머니 댁에 들어가 같이 사는게 어떻겠냐고. 그러면 노모가 아들 끼니를 챙기느라 식사 준비를 하실 것이고, 그럼 어머니도 그 덕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게 될 거라는.

 

어떤가. 웃픈 이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전달해주시던 분도 그렇게라도 노인네가 식사를 챙기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좋게 전해주셨던 소식이다. 명백히 돌봄과 집안일은 여자의 일이라는 프레임. 그 여자가 아흔의 노인네라도 말이다. 딸 둘 사이였다면 저런 작당이 가당키나 한가.

 

 

보이지 않는 사회의 압력과 괴리

울프가 500 파운드의 경제력과 자기만의 방을 상징으로 꼬집어 상기시키고 싶었던 것은 이런 부분이다. 이젠 그 어디에도 집안일, 돌봄, 양육 = 여자의 일이라고 대놓고 명문화 된 바는 없다. 여성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진 만큼 우리의 어머니 시절과는 그 대우가 많이 달라진게 사실이다.

 

그러나 위의 노모 에피소드 처럼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공기처럼 만연해 있는 이 사회의 압력은 달라졌다고 할 수 있나? 눈에 띄는 여성의 사회 진출에 걸맞지 않는 사회의 이 여전한 압력. 그 괴리를 우리는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울프의 말처럼 ‘픽션에서의 그녀는 왕과 정복자들의 삶을 지배하지만, 실제로는 그녀의 손가락에 강제로 반지를 끼워준 어느 부모의 아들에 딸린 노예와 마찬가지였다’는 현실과의 괴리처럼 말이다.

 

 

누가 페미니즘을 공격하는가

당최 남과 여로 나뉘어 서로 적대시해서 뭐가 좋을 것인가. 누가 여성 혐오를 부추기는가. 어쩌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즐거운 자리에서는 눈치껏 꺼내지 말아야 할 금기가 되었을까.

 

책을 읽고 있던 즈음 우연히 ‘김빙삼옹'이라는 필자의 트윗을 읽게 되었다. <인구가 자꾸 줄어서 걱정인 이유>라는 트윗에서 왜 LGBT와 페미니즘이 공격 받는가에 대해 말한다. 기득권의 노예 역할을 해줄, 그들의 자산의 영속성을 보장해 줄 다음 세대를 생산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소름끼치는 통찰.

 

페미니즘에 적대적인 이들도 이 통찰을 공유하게 된다면, 스스로를 돕는 페미니즘을 지지할 것이라 확신한다. 울프의 말처럼 인생이란 양성 모두에게 힘들고, 어렵고, 영원한 투쟁이기에. 100년 전과는 달리 여성도 보호 받는 성이기를 거부하기에.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자기만의 방과 소득이 필요하기 때문에. 

 

남성들의 커리어는 결혼, 출산과 무관하게 연속성을 유지하는 것이 불문율이나 여성의 경우 임신과 출산 이후 일정 기간의 양육 기간을 담당하고 이 기간이 지나면 경력단절에도 불구하고 재취업하라는 무언의 압력. 여자들의 시간이란 그렇게 띄엄띄엄 사용될 수 있는 것이라는 통념. 몰입에 있어 연속된 60분을 집중하는 것과 10분씩 여섯 번의 단절된 시간의 질은 천지 차이란 점을 상기한다면, 자기만의 방은 반드시 필요하다.

 


김빙삼옹의 글 전문을 옮긴다.

<인구가 자꾸 줄어서 걱정인 이유> - 김빙삼옹 트위터
 
우리나라 출산율이 0.81을 기록했다고 한다. 인간 수명이 고정적이라는 가정 하에 출산율이 2 미만이면 인구는 줄어드는 것인데, 0.81이라니 인구 감소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인구가 줄어드니 고령화 사회는 급진전될 것이고, 차후 그 많은 노인네들을 어떻게 부양할 것이냐고 걱정들이 크다. 국민 연금이 고갈되네, 생산 가능 인구 1인당 부양 인구 증가율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높아져서 사회가 붕괴하네 마네 걱정들이 많다.
 
이런 걱정들을 보면 과거 출산율 감소를 위해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면한다'고 산아제한 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요즘 세대에게는 낯설지 몰라도 5, 60대 세대에게는 익숙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렇게 출산을 많이 했던 시기로 부터 3, 40년이 지나 생산 가능 인구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는 생산가능 인구의 노인 부양 부담이 줄어서 노인들이 편안하게 제 대접 받는 노후를 누렸던 시기가 있었느냐고 묻고 싶다.  
 
1970년대에 석유는 향후 30년이면 고갈된다고 교과서에서 가르쳤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 석유는 고갈되지도 않았을뿐더러 언제 고갈될지 알 수도 없다고 한다. 그 전에 대체 에너지가 석유를 대체해서 오히려 석유가 버려지게 될까봐 걱정이 더 큰듯하다.
 
생산 인구는 줄고 노령인구는 늘어서 국민 연금도 얼마 못가 고갈될 것이라고 한다. 언제부터 국민 연금을 납부도 안했던 노령층에게 맨입에 지급한 적이 있었던가. 국민 연금은 기본적으로 납부했던 돈을 되돌려받는 구조가 아니었던가. 인구가 줄어서 연금 납부액이 줄어들면, 그 세대가 은퇴 후 받는 연금 액수도 줄어들 것이 아닌가. 
 
진짜 문제는 지금의 생산 가능인구가 국민연금으로 납부하는 돈의 몇배나 되는 돈을 '내집 마련'에 발목 잡혀 원금으로 이자로 납부하고 있는 것이다. 소득의 상당부분을 부동산에 때려넣고 생활비에 헉헉대면서도 버티는 이유는, 내집 밑에 들어가는 돈이 저축보다 안전하게 온전히 지켜질 뿐 아니라 잘하면 수익률도 꽤 높을 것이라고 상상하며 행복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70년간 집값은 그래왔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지난 70년간 인구도 꾸준히 증가해왔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출산율 세계 최저인 0.81을 찍는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인구는 꾸준히 증가해왔다.  그 정점이 이제 눈앞에 왔고 이제야 내리막으로 들어서는 중이다.   
 
인구가 줄면 생산 가능 인구가 줄어들지만 그렇다고 나라가 망할 일은 없다. 인구가 줄면 경제 규모가 줄어들 뿐, 1인당 경제활동 자체가 크게 위축될 일은 없다.  진짜 문제는, 경제 규모가 줄어들기 시작하면 자산의 가치가 하락한다는데 있다. 더구나 급속하게 하락한다는게 문제다. 원유의 소비가 10% 감소하면 원유의 가격은 30%, 50% 어떤 때는 70%가 하락하기도 한다. 반대로 원유 소비가 10% 증가하면 원유의 가격은 50%, 100% 상승하기도 한다.  지난 10여년간 우리나라 부동산 가격이 크게 상승한 데에도 비슷한 원리가 작용했다. 인구와 관계없이 가구 증가에 따른 주택 수요가 부동산 가격 상승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에 따라 부동산 가격이 크게 올랐다. 당분간 1인 가구 증가와 같은 소형 가구 수요는 계속 있겠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인구 감소에 따라 부동산에 대한 전체 수요도 줄어들 수 밖에 없고, 주택 가격 하락은 상상 이상으로 큰 폭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1-2년이 아닌 10 - 20년 정도의 기간을 상정할 때.
 
이런 일이 진짜로 벌어진다면 그까짓 국민연금 고갈이 문제가 아니다. 국민연금 보다 몇배, 많게는 몇십배나 많은 돈을, 그것도 거의 전재산이다시피하게 묻었던 부동산 가격이 하락해 버리면 기대했던 노후가 그야말로 박살이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천장지구(天長地久), '하늘과 땅은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옛 사람들의 생각일뿐, 지금은 하늘도 땅도 그다지 오래 버티지 못한다. 불과 수십년 만에 하늘은 대기 오염으로 온난화가 진행되고, 땅은 언제 어디서 무너질 지 모르는 세상이다. 하물며 아파트는 그다지 믿을만한 안전한 자산이 아닌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겨우(?) 아파트 한채를 가진 사람이 이런 걱정을 할 때 진짜 큰 고민을 하는 이들은 이들 보다 몇십배, 몇백배 많은 자산을 가진 이들이다. 인구가 줄면 아파트 가격만 하락하는 것이 아니다. 인구가 줄고 경제 규모가 줄어들면 수백억, 수천억 하는 상업용 부동산의 가격은 더 빠른 속도로 하락할 것이다. 당연히 수천억, 수조원을 호가하는 기업들의 가치도 하락할 수 밖에 없다. 또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하는 나라의 건설사나 생명보험 회사의 미래는 너무나 자명해 보인다. 
 
그래서 "애를 낳아라"고 꼬시고 주문하는 것이다. 나라가 망할 것이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가진자들의 자본 수익률이 하락하고 자산 가치가 하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인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기득권 자본가들의 재산을 지켜줄 노예가 필요한 것이다. 정히 노예를 생산하지 않겠다면 그 자리를 수입 노예(외국인 노동자)로 라도 채우겠다는 것이 기득권층의 발상이다. 
 
적어도 나라 망할까봐 애를 낳아야겠다는 멍청한 걱정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