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으로부터,
시선으로부터,
제목만 보고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자아성장에 대한 내용의 소설인가 짐작했는데, 심시선이라는 뿌리로부터라는 의미도 있는 중의적인 표현. 참신하다.
매 챕터는 심시선이라는, 고인이 된 여류 화가이자 작가의 인터뷰, 녹취록, 강연, 저서 등에서 발췌한 그녀의 목소리로 시작되어 시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일면을 보여주고, 이후 시선으로부터 뻗어나온, 그녀를 추억하는 자녀들과 손주들과의 에피소드들로 연결되어 그녀는 여전히 살아있는 듯한 생동감을 입게 된다.
시선의 두 번의 결혼. 첫 결혼에서 세남매와 4명의 손주를, 두번째 결혼에서 전처 소생의 딸과 두명의 손주를 얻는다. 3대에 걸친 가계도가 맨 앞에 나와 중간중간 확인하면서 읽어야 했는데, 독특하게도(?) 강한 모계 사회 문화를 가진 시선 가족의 에피소드들이 바탕이었으므로, 우리 사회에서 대개는 남성의 목소리였을 법한 상황들에서는 ‘기세 좋은'(정말 '기쎈' 보다 훨 나은 표현이다) 시선의 딸들의 목소리가, 여성의 목소리가 들릴 법한 상황에서는 조용조용하고 개성이 강하지 않은 시선의 아들, 손주, 사위들이 대변하게 됨으로써 상대 성의 입장을 자연스럽게 떠올려 보게 한, 영리한 작가라고 생각된다.
책은 제사를 반대하고 집안의 대소사는 아들보다는 장녀에게 맡긴다는 시선의 인터뷰로 시작되고, 내용은 시선의 10주기에 그녀가 살았던 하와이로 가서 딱 한 번 제사를 지내기로 하면서 전개된다. ‘각자 하와이를 여행하면서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한 후 시선으로부터 뻗어나온 가지들 각자의 일기장을 보는 듯한 문체로 군경의 민간 학살, 하와이 이민과 사진 신부, 이승만에 대한 한인 교포 사회의 엇갈렸던 평가, 여성의 교육, 제국의 식민 역사, 파독 간호사 광부 이전의 국제 결혼 등 우리의 근현대사가 시선의 가족사와 생애를 통해 증언되고, 을과 을의 대립, 가해자와 피해자의 뒤바뀜, 방관하는 사회, 소외되는 소수자, 환경 오염 등 우리 사회의 모순들이 그녀의 자녀들과 손주들의 삶을 통해 다시 조명된다.
큰 딸 명혜의 이야기
큰 딸 명혜의 첫 결혼의 이혼 사유이었기도 했던, 군경으로부터 몰살 당한 시선의 가족들. 혼자 살아남은 이후 누구의 짐도 되지 않기 위해 하와이 사진 신부로 떠난 시선. 군인이었던 명혜의 첫 남편은 군경이 자국민을 죽였을 리가 없다고 부정한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어이없는 몰살 당한 것이 사실인데 그런 일은 아예 일어날 수도 없다는, 가장 지지해줘야 마땅한 남편의 2차 가해. 그리고 개인의 힘으론 그 사실을 밝혀낼 수 없는 무력함으로 이혼한다.
시선의 이야기
가족의 학살 후 하와이로 이민해 세탁소에서 일하다가 화가 마티아스를 만나 교육 받을 기회를 붙잡고 따라간 독일. 시선의 일화로 ‘교육이라는 기회의 탈’을 쓴 여성 착취가 많았던 시대를 증언한다. 그리고 아무리 남은 자가 아니라고 부정해도, 전후의 상황이 어떻게 되었든 기득권을 쥐고 있는 남성의 목소리만이 전달되는 억울함.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탁월한 재능이 엿보인다고, 좋은 기회를 주겠다고, 나에게 관심있어 할 사람들을 소개해주겠다고 후하게 제시하는 사람을 그냥 믿어서는 안되었다. 나는 경험 부족에서 비롯한 잘못된 판단으로, 유명하고 힘있는 남자의 손에 떨어진 여러 여성 중 한 명이었다. 단지 내가 그 중 마지막이었다는 것이 그 모든 오해를 불러일으킨 게 아닐까 싶다. 그러니 이제 정말 마지막으로 말하고자 한다. 나는 그를 파멸시키지 않았다. 그는 나를 사랑해서 죽은 게 아니다.
마티아스의 제자, 연인 아닌 연인 또는 잡부로 지내며 그의 가학과 집착을 확인한 독일 생활. 일상이 긴장의 연속이었던 그녀는 이후의 인터뷰에서 ‘폭력성이나 뒤틀린 구석이 없는 상대와 좋은 섹스'를 성공적인 결혼의 필수 요소로 꼽았다. 이는 그녀의 성생활 역시 두려움의 연속이었다는 반증.
순종적인 아시아 여자라는 역할에 순응한 것처럼 보이려고 양말만 신고 소리 없이 걸었다. 마티아스의 눈에 띄지 않는게 중요했다. 처음에는 친절하고 내게 일생일대의 기회를 중 것같이 말하던 마티아스는, 나를 만났을 때에는 이미 성적으로 불능에 가까웠는데 굴절된 욕망을 폭력성으로 분출했던 건지 예측하기 어렵게 사나워질 때가 많았다. 그리던 그림을 찢고 작업실을 부술 때 절대 근처에 있으면 안되었고... 그러나 너무 멀리 가서 더 화를 돋우는 것도 안되었다.
큰 손녀 화수의 이야기
시선의 큰 손녀이자 명혜의 큰 딸인 화수는 대기업의 직원이었으나 하청업체 사장의 염산 테러로 얼굴이 상하고, 이로 인한 유산과 우울증으로 휴직중이다. 대기업과 하청 업체의 견적 조율이 되지 않아 하청을 빼앗겨 파산한 하청업체 사장은 염산을 들고 와 테러를 하는데, 대상이 여직원들이 있는 자리에 던졌다는게 의미심장하다. 뺨은 힘있는 간부들에게 맞고 분풀이는 아무 힘없는 여직원들이라는 현실.
그러나 을과 을의 갈등이랄까. 언론을 통해 알려진 이후 외려 염산을 투척한 가해자가 피해자가 돼버리고, 화수가 유산하자 회사측은 이를 이용한 언론 플레이로 다시 여직원이었던 화수가 피해자로 조명된다. 결국 가해자는 자살로 상황에서 도망쳐버렸고, 피해자인 화수만 PTSD를 겪으면서 할머니 시선의 책을 읽다 문득 깨닫는다. 시선 역시 T면에서 가족들이 학살 당한 이후 PTSD를 겪었을 것이고, 그런 이유로 조각나 마티아스에게 조종당하기 쉬운 상태였으리라고.
손주 규림의 이야기
시선의 두번째 결혼을 통해 얻은 손주 규림은 고등학생이다. 규림의 에피소드는 매우 예리해 기억에 남는다. 그는 도영과 여자 사람 친구 한빛과 친했는데, 도영이 한빛의 사진을 합성해 단톡에서 돌린 사건 이후 자신은 그 상황에 없었다고, 억울하다고 생각했지만 피해자였던 한빛의 지적은 따가웠다. 항상 도영과 한빛이 부딪힐 때 규림의 표정은 무마시키는 웃음이었다고. 단톡에 초대 받았을 때 거기서 나오지 않았다고. 한빛의 지적으로 합성 사진 사건 이후 자신이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척 했음을, 화수 누나가 당했던 염산 테러를 통해 그것이 얼마나 역겨운 것인지 잘 알았던 그는 입을 다물기로 한다.
굵직굵직한 에피소드들 사이 소소하게 걸렸던 문장들로도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예를 더 들자면,
- 화수가 좋아한 푸른 추상화의 작가는 그렇게 대단한 작품을 그려도 남성 화가의 부인이라는 설명이 먼저 나왔고,
- 시선의 장례식장에 남편 없이 혼자였던 명은이 힘들지 않았냐고 묻는 장면이라든가
- '아이가 아팠고, 돈이 급하다는 흔한 이유로 저 특별한 여자를 주저앉힌게 세상인지 자신인지 헷갈렸다'는 명준의 혼잣말
- 해림이 중국인 엄마를 둔 아이에게 반 친구가 짱깨라고 놀려서 싸운 얘기, non-binary, 성전환을 고려하는 체이스 등의 성소수자들
- 독일에서 만났던 한국인 민애방의 예측 가능한 가족 배경 그리고 시선의 두번째 남편 홍낙환의 첫부인 조말희와의 연대
- ‘크게 될 놈’이라는 거듭 된 아들을 향한 덕담에 딸들은 ‘작게 될 년들’이냐며 시선이 대꾸하던 장면
책의 마지막은 하와이에서 시선의 10주기 제사를 각자의 사연을 보태 마무리하고 귀국하는 비행기 안의 장면으로 마무리 된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나의 두 분의 할머니
책을 읽으면서 나의 두 할머니들이 자주 떠올랐다. 엄마나 언니 동생과 맞춰보는 기억의 퍼즐들을 언제나 조금씩 다르다. 또 어떤 때는 내 기억에는 전혀 아닌 것도 엄마의 레퍼토리가 씌워지면 그랬던 것처럼 각색되는 신비라니.
친할머니와 외할머니의 추도 예배에 참석한 지 정말 오래되었다. 정말 달랐지만 또, 같았던 두 분 할머니를 생각하면서 나는 물려 받은 것이 참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책을 읽는 동안 문득문득 마음이 따듯해졌다.
소설의 위로는 내게도 유효하다. 나 역시 지금처럼 잘 살아갈 것이다. 굳세게. 그 험난한 세월을 살아냈지만 유쾌했던 두 분 할머니의 조각들이 내 안에 있으니.
문득 기억해주는 이가 없으면 죽은 영혼마저 사라진다던 내용의 만화 영화 <코코>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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