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책읽기

주도적인 삶과 통섭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 유시민>>

소라언냐 2024. 8. 21.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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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by 유시민 (돌베개 출판사)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가?

 

 

'운명적 문과' 이신가요?

작가 채사장님의 책들을 통해 인문학에 발을 담그고 이러 저러한 책들을 읽어가면서 어렴풋이 나만의 대답을 찾고 있는 중이라 생각하는 내게는 나름 익숙해진 질문들이다. 

 

책을 읽으면서 유작가님의 자기 소개 ‘운명적 문과'에 절로 고개가 끄덕끄덕해진다. 대입 수능에서 다른 과목들은 웬만큼 치뤘는데, 수리영역 즉 수학에서 발목 시게 잡혔던 나 역시 작가가 묘사한 전형적인 ‘운명적 문과'인 사람 되겠다. 

 

광주시립미술관 2024 여름 특별전 <우주의 언어 - 수> 읽으실 수 있는 부운~?

 

자신이 운명적 문과였음을 밝힌 작가는 과학과 인문학의 비대칭을 슬픈 마음으로, 그러나 기꺼이 받아들인다고 말한다. 과학자는 인간의 언어와 우주의 언어 둘 모두를 쓰기에 큰 어려움 없이 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인문학의 질문에 자기네 방식으로 응답하지만 인간의 언어만 아는 운명적 문과는 방정식으로 가득한 물리학 논문을 읽지 못한다며. 또르르~

 

 

과학 지식과 작가만의 인문학적 결론을 곁들인 책

책의 내용은 새로운 것은 없다. 이미 알려진 뇌과학, 생물학, 화학, 물리학, 수학 등 과학 전반에 걸친 내용에 대해 문해력 좋고, 전달력 좋은, 운명적 문과인 작가 자신이 이해한 바를 ‘인간의 언어'로 풀어 머리에 쏙쏙 들어오게 설명해주고, 이와 함께 그만의 인문학적인 결론을 함께 전달해주는 책.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설명하기 어려운 여러 사회 현상들도 과학적 사실과 연결해 풀어준다. 중간중간 인용한 과학책 추천도 좋다.

 

목차와 각각에서 다루는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1. 그럴법한 이야기와 확실한 진리 - 인문학과 과학
: 인문학과 과학이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법의 차이와 이를 통해 진리에 접근하는 방식의 차이를 짚는다.

2. 나는 무엇인가 - 뇌과학
: 뇌과학을 통해 보면 본시 생존을 위한 기계로 태어난 내가 자신이 ‘무엇인지'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인간의 의지에 대해 말한다.

3.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 생물학
: 다윈의 진화론이 어떻게 좌파와 우파 진영의 논리가 되었는지로부터 이기적 유전자를 가졌다는 인간의 이타행동의 이유까지 설명한다.

4. 단순한 것으로 복잡한 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 - 화학
: 화학의 주기율표, 전자, 탄소에 대해, 그리고 통섭을 통한 범학문적 접근을 주장한다.

5.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 물리학
: 거시 물리학, 상대성이론과 미시 물리학 양자역학을 소개한다. 개인적으론 양자역학과 불교, 유물변증법에 대해 쓴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6. 우주의 언어인가 천재들의 놀이인가 - 수학
: 우주의 언어라는 동시에 천재들의 지적 유희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이해 불가한 수학에 대해 소개한다. 마지막 서브 챕터 ‘나는 부럽지가 않아'가 극공감된다. ㅎㅎㅎ

 

 

과학은 마음의 상태

첫 챕터에서부터 파인만의 입을 빌어 ‘거만한 바보’를 언급하며 인문학이 반드시 과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반복해 강조한다. 인문학이 과학에 관심이 없다면 속빈 강정이라고까지 말하면서. 과학은 마음의 상태라고.

 

스무살때부터 30년간 인문학만을 공부해 온 작가는 느즈막에 관심이 생겨 읽은 과학책들을 통해 ‘인문학 이론은 진리인지 오류인지 객관적으로 판정할 수 없다’는 가치와 한계를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한다. 인문학을 공부할 때와 또 다른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며.

 

반대로 원자는 생각하지 않지만 인간은 생각한다는 점만을 예로 들어도 과학만으로 인간을 다 설명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과학적으로 본다면 생존을 위한 기계로 밖에 설명되지 않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민을 하니…

 

주도적인 삶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인문학이 준 이 질문에 오랫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생물학을 들여다보고 나서야 뻔한 답이 있는데도 모르고 살았음을 알았다. ‘우리의 삶에 주어진 의미는 없다.’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찾지 못한다. 삶의 의미는 각자 만들어야 한다. ‘내 인생에 나는 어떤 의미를 부여할까?’ ‘어떤 의미로 내 삶을 채울까?’ 이것이 과학적으로 옳은 질문이다. 그러나 과학은 그런 것을 연구하지 않는다. 질문은 과학적으로 하되 답을 찾으려면 인문학을 소환해야 한다.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인문학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생물학, 유전자와 인생론)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고 한동안 허무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작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역설적으로 주도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긍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 스스로 주도적으로 의미들을 채우며 살 수 있다고. 내겐 참으로 큰 위안과 격려가 되는 생각이다. 인문학이 던진 질문을 과학적으로 바꾸니 답을 찾을 수 있었다고. <<물고기는 없다>>를 읽으면서 깊이 공감했던 룰루 아버지의 인생 철학이 동시에 떠오른다.

 

 

대범하게 삶을 살아보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룰루 밀러>>

Why Fish Don’t Exist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 룰루 밀러님을 소개합니다 ‘방송계의 퓰리처상’이라 불린다는 Peabody Award를 수상한 과학 전문 기자. 부친 역시 이온을 연구하는 생화학자.

thebrownbottle.tistory.com

 

통섭

이 한 권의 책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 작가가 주장하고 싶은 바는 인문학과 과학 모두 균형있게 공부해야 한다는 것일테다. 한 분야만 깊게 판 전문 바보, 아니 거만한 바보를 면하려면 말이다. 와카스 아메드의 <<폴리매스 Polymath>>의 주장과 동일하다.

 

다재다능함의 회복 <<폴리매스 - 와카스 아메드>>

한계를 거부하는 다재다능함의 힘 - 폴리매스 작가 와카스 아메드를 소개합니다 ‘떠오르는 청년 다빈치'라고 불리는 저자 Waqas Ahmed는 영국 태생으로 유럽, 아프리카, 중동, 남아시아의 여러 국

thebrownbottle.tistory.com

 

과학과 인문학을 연결하는 것은 지성의 가장 위대한 과업이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지식의 파편화와 철학의 혼란은 실제 세계의 반영이 아니라 학자들이 만든 것이다. 통섭은 통일(unification)의 열쇠다.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들과 사실에 기반을 둔 이론을 연결해 지식을 ‘통합'해야 한다. 학문의 갈래를 가로지르는 통섭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소수의 과학자와 철학자가 공유하는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에 지나지 않지만 과학이 지속적으로 성공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지지해 준다. 인문학에서도 힘을 발휘한다면 더 확실한 지지의 증거가 될 것이다. 통섭은 지적 모험의 전망을 열어주고 인간의 조건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이끈다.
- <<통섭: 지식의 대통합>> 에드워드 윌슨 지음, 최재천/장대익 옮김
분석은 과학적 방법으로 하지만, 통섭은 언어로 해야 하기에 과학과 인문학이 모두 필요하다. 진리를 따라 과감하고 자유롭게 학문의 국경을 넘나들어야 한다. 진리는 철새처럼 어느 정도 정해진 경로를 따라 움직인다. 생물학에서 나온 문제가 경제학과 정치학을 거쳐 심리학과 수학에 정착한다. 사회학의 문제가 행정학 · 법학 · 기상학 · 화학 · 음악의 영역까지 뻗어 간다. 지난날의 ‘학제적(interdisciplinary) 연구'는 여러 분야 연구자들이 저마다 자기 영역의 목소리를 보탠 ‘다문학적(multidisciplinary)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 통섭은 학문의 경계를 허물고 일관된 이론의 실로 전체를 꿰뚫는 ‘범학문적(transdisciplinary) 접근'을 요구한다.
- 옮긴이 서문 <<통섭: 지식의 대통합>> 에드워드 윌슨 지음, 최재천/장대익 옮김

 

 

역시 믿고 읽는 유작가님

책을 읽는 동안 작가는 ‘나는 … 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나는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문장을 자주 쓴다. 자신의 인문학적 소양이라는 큰 발판이 있었기에 여러 분야의 과학 지식들과 결과물들을 좀 더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해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어려울 수 있는 과학을 운명적 문과의 언어와 감성을 담아 전달하는 유시민 작가님. 역시 믿고 읽는 유작가다. 이런 인문학/과학 커뮤니케이터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나같은 운명적 문과들도 균형감을 잃지 않고 인문학과 과학을 발판 삼아 균형감 있게 세계와 관계를 읽을 수 있도록.  

중요한 건 ‘바보'를 면하겠다는 결심이다. 파인만의 ‘거만한 바보'는 자신이 바보인 줄 모른다. 죽을 때까지 ‘바보'여도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행복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렇게 살고 죽는 것도 하나의 인생이다. 그러나 자신이 ‘바보'였음을 알고 ‘바보'를 면하는 게 ‘바보'인 줄도 모르고 사는 것보다 낫다. 부끄러움은 잠시지만 행복은 오래간다. 누구나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랬다. - <후기: 바보를 겨우 면한 자의 무모한 도전>

 

과학을 전혀 몰랐을 때 나는 세계를 일부밖에 보지 못했다. 타인은 물론이고 나 자신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도 전체를 보지는 못하며 인간을 다 이해하는 것 역시 아니다. 하지만 예전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더 다양한 관점에서 살핀다. 과학의 사실을 받아들이고 과학의 이론을 확용하면 인간과 사회를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 본문에서

 

<<침팬지 폴리틱스>>의 사회생물학 이론으로, 알파 메일로서의 윤대통령의 행적을 설명하는 것도... 그 일환이었지 싶다. ㅎㅎㅎ

 

 

남기고 싶은 내용들

일제강점기 많은 사람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동기가 모두 같지는 않았다. 살아서 승리를 맛보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 역사의 강에 돌 하나를 놓는 마음으로 참여한 사람도 있었고, 금방 광복을 이룰 수 있으리라 믿고 보상을 기대하면서 뛰어든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전자라면 끝까지 싸우다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후자는 다르다. 긴 시간 일제와 싸우면서 경험을 쌓고 국제 정세에 대한 정보를 종합했다. 쉽게 이길 수 있으리라 믿고 참여했는데 자신의 생전에 승리를 거두기는 어렵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만약 그가 추구한 목표가 민족의 광복 자체가 아니라 세속의 권력과 물질의 보상이었다면 친일로 전향하는 것이 일관성 있는 행동이다.
- 나는 무엇인가 (뇌과학, 자유의지) 

 

나만 그런게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도 마찬가지다. 사랑하기엔 흉하고 절멸하기엔 아깝다. 그 운명이 어찌 될 지 나는 알지 못하고 책임질 수도 없다. 단지 나 자신의 삶 하나를 스스로 결정하려고 애쓸 따름이다. 악과 누추함을 되도록 멀리하고 선과 아름다움에 다가서려 노력하면서, 내게 남은 길지 않은 시간을 살아내자. 이것이 내가 뇌과학에서 얻은 인문학적 결론이다.
- 나는 무엇인가 (뇌과학, 자유의지) 

 

그렇지만 나는 나, 나무는 나무였다. 나무에 감정을 이입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유전자가 같은 언어로 씌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자 달라졌다. 나무가 살고 죽는 일에 관심이 생겼다. 나무가 어떻게 얼어죽지 않고 겨울을 나는 알고 감탄했다. 이런 이야기다.

‘나무는 한 자리에 서서 계절을 여행한다. 모든 유기체가 그렇듯 나무도 물을 품고 있다. 물이 얼어 팽창하면 세포가 터진다. 죽지 않으려면 겨울 여행을 잘 해야 한다. 동물은 세포에서 당을 태워 열을 내지만 식물은 다른 방법으로 추위를 견딘다. 겨울이 다가오면 잎에 보내던 수분과 영양분을 끊는다, 그래서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진다. 우리에게 가을의 정취를 선사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다. 본격적인 추위가 닥치기 전에 나무는 둥치와 가지의 세포에서 물을 내보내고 당과 단백질 같은 영양분만 남겨 세포 내부를 시럽 상태로 만든다. 세포 사이 공간에는 물이 있지만 혼자 돌아다니는 원자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순수해서 섭씨 영하 40도까지 얼음 결정이 생기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서리와 진눈깨비와 눈보라와 혹한을 견디고 나서 봄의 징후를 포착하면 나무는 물을 세포 안으로 끌어들여 새잎을 틔우고 광합성을 재개한다.’
- 호프 자런 <<랩 걸>>

 

모든 종에게 유전자는 똑같은 명령을 내렸다. ‘성장하라. 짝을 찾아라. 자식을 낳아 길러라. 그리고 죽어라. 너의 사멸은 나의 영생이다. 너의 삶에는 다른 어떤 목적이나 의미가 없다.’ 그런데도 인간은 목적을 추구한다. 살아서는 유전자의 굴레를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 굴레에 묶여 사는 것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나는 호모 사피엔스를 ‘진화가 만든 기적'으로 본다. 내가 기적의 산물임을 뿌듯한 기분으로 받아들인다. 이기적 유전자 이론은 내 자존감을 높여 주었다. 나는 이렇게 마음 먹었다. ‘나는 유전자가 만든 몸에 깃들어 있지만 유전자의 노예는 아니다. 본능을 직시하고 통제하면서 내가 의미 있다고 여기는 행위로 삶의 시간을 채운다. 생각과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가치 있다고 여기는 목표를 추구 한다. 살아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삶의 방식을 선택할 권한을 내가 행사하겠다. 유전자 · 타인 · 사회 · 국가 · 종교 신, 그 누구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겠다. 창틀을 붙잡고 선 채 죽은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생물학, 유전자와 인생론)

 

다윈주의 관점에서 보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틀렸다. 다윈주의자들은 호모 사피엔스가 그런 꿈을 이룰 수 있는 종이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다윈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물론 철학과 잘 어울리기 때문에 겉으로는 진화론을 인정했지만, 인간 심리와 행동에 자연선택이 만든 생물학적 기초가 있다는 명제는 부정했다. 마르크스는 인간 본성을 호모 사피엔스의 보편적 생물학적 속성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 보았다. 사회적 관계를 바꾸면 본성도 달라진다고 믿었다. 공산주의자는 ‘올바른 사상'을 지녔기 때문에 권력을 잡아도 오직 인민만을 위해 봉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꿈에 홀려 사실을 외면한 것이다. 마르크스 추종자들은 어느 시대 어느 권력자들보다 무자비하고 집요하게 권력을 탐했다.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짓밟으면서 권력을 독점했다. 고대 황제보다 더 무분별하고 잔인하게 권력을 휘둘렀다. 그것이 변하기 어려운 인간의 본성이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마르크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반박할 여지가 없게 증명했다. 인류 역사에 이토록 비극적인 역설은 없다.
-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생물학, 생물학 패권주의)

 

수학 · 게임이론 · 동물행동학 · 유전학 등 여러 학문의 도구와 문제의식을 결합한 ESS 모델은 사회제도의 구조와 결함을 진단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문학을 사회생물학의 하위 분야로 편입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되는 건 아니다. 인간의 의식과 행동에 자연선택이 만든 생물학적 기초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 인간과 사회를 다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윌슨의 견해를 온건한 형태로 받아들인다. ‘인문학과 생물학 사이에 차원을 나누는 경계는 없다. 인문학은 인간 의식과 행동에 대한 생물학적 연구 결과를 적극 받아들여 활용하는게 바람직하다.' 이 정도만 해도 윌슨 선생은 만족할 것이다.
-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생물학, 사회생물학과 사회주의)

 

원자는 도데체 왜 최외곽 전자껍질의 빈자리를 없애려고 발버둥치는 것일까? 나는 모른다. 그렇다는 사실만 안다. 원자는 최외곽 전자껍질을 채우려는 욕망 때문에 다양한 분자와 이온화합물을 만든다. 그 분자와 화합물들이 결합해 자기를 복제하는 유기분자를 형성했다. 단순했던 최초의 생명체는 자연선택이라는 필연과 유전이라는 우연을 통해 다양한 종으로 진화했다. 그 진화의 어느 단계에서 우리 종이 탄생했고, 80억 호모 사피엔스의 한 개체인 내가 있다. 이보다 더 신기하고 극적이고 장엄한 창조 신화나 탄생 설화를 나는 들은 적이 없다. 화학이 말했다. ‘너는 내가 만든 기적이야.’
- 단순한 것으로 복잡한 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 (화학, 주기율표)

 

세상의 많은 종교와 윤리 도덕 강령 중에서 과학적 진리와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 불교의 연기법이다. 연기법은 붓다가 깨달은 보편적 진리로 그 자체가 과학이다. 시공간의 모양과 물질의 분포는 어느 쪽이 먼저 결정되고 그에 따라 다른 쪽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서로를 결정한다. 둘은 상호의존 관계다. 이것을 불교적으로 해석한 것이 바로 연기법이다. 어떤 사물도 다른 것과의 관계를 떠나 독립해서 존재할 수는 없으며 모든 것은 다음 것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의미를 가진다. (...) 하지만 과학적이라고 해서 불교가 더 매력 있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양자역학과 불교를 연관 짓는 책에서 나는 불교의 매력이 아니라 과학의 위력을 본다.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 위대하다고 느낀다. 과학은 어떤 경우에도 종교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는 필요에 따라 과학을 배척하기도 하고 의지하기도 한다. 무엇도 배척하지 않고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아야 훌륭한 것이 아니겠는가.
-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물리학, 양자역학/ 불교/ 유물변증법)

 

‘자등명 법등명’, 그(석가모니)가 죽기 전에 남겼다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이다. 법(진리)를 증불로 삼는 것은 관습과 미신이 아니라 이성의 힘으로 산다는 뜻이다. 세상에 끌려다니지 말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옮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라 했으니 석가모니는 분명 깨달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무신론자이고 유물론자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물리학, 양자역학/ 불교/ 유물변증법)

 

3장에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이론이 자존감을 높여주었다고 말했다. 엔트로피 법칙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우리들 각자는 ‘질서정연하고 특별한 원자 배열’이다. 어떤 사람과 배열이 똑같은 원자 집합은 우주 어디에도 없다. 우리 모두는 현재의 무질서도를 유지한 채 원자 배열을 변경하기가 몹시 어려운, 엔트로피가 극도로 낮은 원자 그룹이다. 영구기관을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이러한 저엔트로피 상태를 영원히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화와 죽음이 필연이라는 말이다. 나는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며 내가 한 모든 말과 행위가 완전히 잊힐 것임을 받아들이다. 그 이름이 무엇이든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에게 의존하지 않고 마지막 시간까지 내 인생을 내 생각대로 밀어갈 작정이다. 존재의 의미와 삶의 목적을 찾는 일을,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하고 도덕과 규범을 세우는 작업을 누구에게도 ‘아웃소싱'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확인한다.
-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물리학, 엔트로피 묵시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