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책읽기

이거슨 러브 스토리 <<너무 시끄러운 고독 - 보후밀 흐라발>>

소라언냐 2024. 7. 18. 14:48
반응형

 

너무 시끄러운 고독

by Bohumil Hrabal, 이창실 옮김

 
 

작가 보후밀 흐라발님을 소개합니다

보후밀 흐라발 (1914-1997). 체코의 브르노에서 태어나 프라하 카렐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젊은 시절 시를 쓰기도 했으나 독일군에 의해 대학이 폐쇄되자 학교를 떠나 철도원, 보험사 직원, 제철소 잡역부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마흔 아홉이 되던 해, 뒤늦게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고 1963년 첫 소설집 <<바닥의 작은 진주>>를 출간하며 작가로 데뷔, 이듬해 발펴한 첫 장편 소석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주요 작품으로 <<영국왕을 모셨지>> <<시간이 멈춘 작은 마을>> <<너무 시끄러운 고독>> 등이 있다.
 
 

얇은 책은... 원래 어려운 건가요? 

작가의 이름은 정말 낯설었지만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책 제목이었다. 작가의 작품 중 <<영국왕을 모셨지>>를 영화로 본 적이 있다. 그 영화도 다 본 다음 뭘 얘기하려 했던 건지 꿈뻑꿈뻑했던 기억이 난다.
 
책이 얇아 과소평가했나? 볼륨과 상관없이 너무나 많고 깊은 얘기들에 내 머릿속이 시끄럽다. 며칠 뒤 다시 읽으니 더 많은 목소리가 들린다. 허허 어쩌나. 아무튼 내가 정리한 키워드 - 노동과의 합일과 개인의 소외 어디쯤, 자발적 고독, 니체, 변증법, 사랑. 서평을 생각나는 대로 짚어봐야겠다. 내겐 어떤 맥락을 가지고 덤빌 책이 아니다.
 
 

주인공 한탸와 비장미

표면적인 줄거리대로만이라면, 주인공 한탸는 지금의 시점으로는 3D로 분류되는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35년째 하고 있는 육체 노동자이다. 별다른 자기 계발 없이 주어진 단순노동만 하던 노동자가 새로운 작업 환경과 업무 처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어 끝내 생을 마감했다고 짧게 서술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책을 읽는 중에도 다 읽고 난 이후에도 느낀 비장미는 무엇이 그를 성스럽게까지도 느끼게 했는지 여러 생각들이 꼬리 물게한다. 
 
폐지가 쏟아지는 천정으로 난 하늘 외에는 볼 수 없는 어둡고 지저분한 지하실에서 고독하게 일하는 한탸. 작업 소장을 포함해 일하는 환경에 대한 묘사는 그의 일이 술의 도움을 받아야 할만치 고달프기 그지 없어 보이지만 정작 한탸에게는 기본 인문학 전공에 신학을 공부한 사람에게 자격이 주어져야 마땅한 숭고한 작업이다. 술도 ‘사고의 흐름을 돕고 텍스트의 심부까지 더 잘 파고들기 위해서 마셨다’고 했다. 
 
스러져가는 인간의 정신과 문명을 구하는 작업. 한탸는 전쟁으로 인해 파기되는 책들 중 보석과 같은 책들을 구해 기증하고 보관한다. 전쟁의 화마를 피해 숨겨졌던 왕실의 서적들이 대거 발견되었을 때 보다 안전한 보관을 위해 보낸 책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본 이후에는 더욱 악착같이 집에 쌓아두는 집착을 보인다. 언젠가는 책들을 압축해 보낸 과보로 책더미에 깔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의자에서 책처럼 접혀 자고, 무의식적인 압력으로 키가 9센티나 줄어드는 육체적인 고통까지 감내하면서.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실제로도 물리적으로 시끄러웠을 그의 작업 환경과 함께 속시끄러웠을 그의 조국 체코의 어지러운 현실 한복판에서 소외된 노동을 하고 있는 그의 고독을 말하는 것인가. 얼핏 현실도피처럼 보이는 그의 일. 그러나 그는 그러한 고독을 자발적인 것이었다고, 초월의 순간을 살기 위해서였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한도 나 같은 사람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
날이면 날마다, 그렇게 하루에도 열 번씩 나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소외된 이방인이 되어 묵묵히 집으로 돌아온다.

 
 

예술의 경지의 삶

그가 35년간의 폐지 압축 작업에 몰입할 수 있었던 건 그 스스로 창조적인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책을 사랑했던 한탸 버전의 출판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버려질 책들 중 보석같은 원고를 엄선해 그에 맞는 꾸러미를 만들고 복판에 정수라 할 수 있는 페이지를 펼쳐 위치시키는 것은 한탸만의 편집 작업이었겠지.
 
그런 뒤 고흐와 고갱의 복제 그림들로 표지까지 꾸며 압축해 쌓아두면 그만의 서가를 보는 듯 충만함이 있었을 것이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그 자신의 인생에 개성을 부여하고 예술로 창조하는 초인의 삶을 산 것 아닌가. 마지막엔 그 자신도 책과 마찬가지로 꾸러미 한복판에 편집해 넣는 죽음을 선택할 정도로. <<사는게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에서 니체가 남긴 당부를 생생히 체화해 보여준 한탸.

그 어디에도 발목 잡히지 않은 주도적인 자유인으로서, 세상을 창조하는 예술의 경지의 삶을 누려라.

 
 

미래로의 전진(progressus ad futurum)과 근원으로의 후퇴(regressus ad originem)

압축기의 초록 버튼과 붉은 버튼. 기도로 현실을 바꾸려는 젊은 예수와 무위의 늙은 노자. 밀물과 썰물, 봄과 가을, 창조와 파괴. 이 모든 대극이 본시 하나임을 깨닫고, 그로 인해 창조와 동시에 파괴의 기쁨을 누리는 한탸.

나에게 독서는 기분 전환이나 소일거리가 아님은 물론, 쉽게 잠들기 위한 방편은 더더욱 아니다. 십오 대에 걸쳐 사람들이 글을 읽고 써온 나라에 사는 내가 술을 마시는 건, 독서로 인해 영원히 내 잠을 방해받고 독서로 인해 섬망증에 걸리기 위해서다. 고상한 정신의 소유자가 반드시 신사이거나 살인자일 필요는 없다는 헤겔의 생각에 나 역시 동의하기 때문이다. 나라면, 내가 글을 쓸 줄 안다면, 사람들의 지극한 불행과 지극한 행복에 대한 책을 쓰겠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책을 통해, 책에서 배워 안다. 사고하는 인간 역시 인간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것도.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고라는 행위 자체가 상식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내 손 밑에서, 내 압축기 안에서 희귀한 책들이 죽어가지만 그 흐름을 막을 길이 없다. 나는 상냥한 도살자에 불과하다. 책은 내게 파괴의 기쁨과 맛을 가르쳐주었다.

 
 

부브니에 들어온 신형 압축기

즐겨했던 고독과 일과 죽음을 합일한 한탸. 한탸의 외삼촌이 또 그러했다. 무우라면 사족을 못썼던 누이를 위해 유골을 무우밭에 뿌려 거둔 무우를 맛있게 나눠 먹었다는, 그리고 기차를 좋아해 은퇴후 정원에 철로를 꾸미고 끝내 그만의 조종실에서 홀로 숨을 거둔 외삼촌. 
 
그래도 그의 외삼촌은 한탸처럼 은퇴 후 하고 싶었던 계획을 살아봤으니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한탸도 5년만 더 일하면 그간 저금해둔 돈으로 일할 때 쓰던 수동 압축기를 사서 하루에 딱 한 꾸러미씩만 - 열 꾸러미만큼의 힘을 지닌 하나의 조각상, 한 점의 예술작품이 될 - 만들며 행복하게 지낼 은퇴 후 삶을 꿈꾸지만 부브니에 들어온 새로운 압축 기계는 그의 꿈을 산산히 부서뜨린다. 
 
부브니의 새 작업장의 사회노동주의 청년 노동단의 젊은이들은 1리터들이 우유와 코카콜라를 마시며, 기계적으로 책을 압축해 해치운다. 아무런 인간적인 고뇌없이. 게다가 본인은 시시포스 컴플렉스에 빠져 책에서 일하기에 치여있는 동안 그리스의 철학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그들은 그리스 휴가 계획을 세우고 있는 아이러니.
 
충격을 받은 한탸는 그리스 여행에서 철학자들과의 조우를 기대하며 그들과 똑같이 우유를 마시고, 보수를 받고 일하는 사람으로써, 익명의 꾸러미들을 압축하고 또 압축해보지만… 결국 깨달은 것은 그는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첫사랑 만차

어릴 적의 사랑 만차를 찾아간다. 만차는 똥이라는 에피소드로 연거퍼 소개된 탓인지 매우 본능적, 직설적이고 능동적인 캐릭터로 보인다. 책이라면 질겁하고 한 권도 읽지 않았던 만차였지만 말년에 성스러움의 경지에 올라 노신사의 뮤즈로 조각상의 모델이 되어 있었다. 성과 혼인의 흔적이 없는, 하늘에서 내려온 남녀 양성의 존재와 같은 모습을 하고서.     
 
돈을 위해서 백지를 꾸리는 일은 할 수 없고, 책과는 무관했던 만차의 초월의 경지를 본 그는 그의 지하실에서, 그만의 의식으로 종말을 맞기로 한다.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복제화 한점을 꺼내놓고, 프로이센 여왕 조피 샤를로테가 시녀에게 말하는 부분을 묘사한 페이지를 펼쳐준 압축기에, 세네타가 입욕하듯 미끄러져 들어간다.

“울지 말거라. 네 궁금증을 풀어주려고, 이제 나는 라이프니츠조차 가르쳐줄 수 없었던 그걸 보러 갈 테니까. 존재와 무의 극한까지 갈 것이다.”
난 세네카요 소크라테스다. 내 승천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압축통 벽에 눌려 내 다리와 턱이 들러붙고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이 이어진다 해도 결단코 두 손 놓고 천국에서 추방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무엇도 나를 내 지하실에서 몰아낼 수 없을 것이다. 

 
압축기의 녹색 버튼이 눌려지고 죽는 순간 그는 그의 어린 집시 여자와 조우한다. 불을 뗄 장작과 빵만 있으면 족했던, 살아서는 알 수 없었던 그녀의 이름, ‘일론카’를 알게 된다. 해피엔딩이라 다행이다.
 
 

한탸의 러브 스토리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난 후 보이는 건 한탸의 러브스토리, 사랑. 에리히 프롬이 말한 사랑은 대인간의 사랑이라 착각하고 있던 내게, 또 책을 사랑하는 것과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별개라고 믿었던 내게 작가는 보석같은 깨달음을 주었다.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스토리이다.

 

그러고 보면 오랜 시간을 넘어 사랑 받아온 고전들은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고 난 이후 느꼈던, 그 참된 사랑을 세상 어디에서도 본 바가 없는 것 같다는, 그래서 뭔 말인지 알겠으나 그럼에도 알 수 없다는 그 막막함을 위로해주려고 씌여진 책들이 아닐까. 
 
마치 ‘너의 그 막막함을 내가 알고 있어. 나도 그랬으니까. 내가 알아낸 걸 너에게도 보여줄께. 넌 혼자가 아니야.’라고 속삭이는 것 같이. 한탸가 언급했던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가 기대된다. 거기에는 또 어떤 초인이 기다리고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