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책읽기

그래서, 지금 행복한가? <<사피엔스 - 유발 하라리>>

소라언냐 2024. 7. 4.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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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piens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by Yuval Noah Harari,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작가 유발 노아 하라리님을 소개합니다

독서모임에서 퐁당퐁당의 퐁 차례로 챌린지를 느낄만한 -우선 두께가 그러하다- 책으로 골라 읽게 됐던 <<사피엔스>>. 저자 유발 노아 하라리를 일약 스타 작가 반열에 오르게 해준 작품이다. 위키피디아에서 작가에 대해 검색해 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대인 가족 배경의 작가는 이스라엘 하이파 태생이며, 부모는 레바논계 유대인이다. 하라리는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에서 중세 역사 및 군 문화를 전공했으며, 이후 2002년 옥스포드 대학교 지저스 칼리지에서 박사학위를 수료, 2003-2005년까지는 야드 하나디브 연구원으로서 역사학관련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는 <<사피엔스: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이다. 원본은 ‘인류에 관한 간소한 역사’라는 제목과 함께 히브리어로 출간되었고 추후 약 30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다. 

하라리는 창의성과 독창성을 기리는 상인 Polonsky Prize를 2009년과 2012년 두 번이나 수상하였으며, 군 역사에 관해 작성한 뛰어난 논평을 인정받아 Moncado Award를 수상하였다. 

엄격한 채식주의자이며 그가 저서에 농업혁명에 관한 평을 언급한 이후 가축과 같은 동물들의 비참한 처지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있다. 동성애자로, 배우자이면서 매니저인 이치크 야하브와 함께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하루를 시작할 때 명상 1시간, 하루가 끝날 때 명상 1시간으로 총 2시간씩 명상을 한다고 하는데 <<사피엔스>> 후작인 <<호모 데우스>>에서는 명상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내면의 평화, 통찰력 등이 없었다면 책을 쓸 수 없었을 거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한국은 행복도에 대한 조사에서도 멕시코, 콜롬비아, 태국 등 경제적으로 더 어려운 나라보다 뒤쳐져있다. 이는 가장 널리 통용되는 역사 법칙의 어두운 한 단면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인간은 권력을 획득하는 데는 매우 능하지만 권력을 행복으로 전환하는 데는 그리 능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서문의 한국인 독자들에게 보내는 글부터 뼈 맞고 시작한다. <<COSMOS>>급의 big history. 하이라이트를 쳐두었던 내용만 다시 읽어도 시간이 꽤 걸린다. 거대한 역사 속에 동물로서의 인간, 계급, 정치, 경제, 사회, 종교, 정의, 성역할, 과학, 그리고 마침내 죽음을 넘어 신이 된 인간의 미래까지의 이야기들. 

 

이 거대한 책의 서평을 어떻게 남겨야 할까. 읽어서 알고 있는 책이라 생각했는데, 역시 나의 언어로 서평을 남기지 않은 책은 내게 남지 않는가 보다. 처음 읽었을 때 받았던 충격이 사실을 글로 적어놓은 것을 읽고 받은 것이었다면, 그간 나의 경험과 생각들이 이렇게 저렇게 자리를 잡은 후 다시 접해서였을까. 이 책을 다시 읽은 지금 유발 하라리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의 방점이 다른 부분에 찍힌 듯 읽혔다. 좋아하는 책의 서평을 남길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쁘다.

 

설득되지만 누구도 알 수 없는 현생 인류의 역사

대략적인 목차는 역사 연대표, 인지혁명, 농업혁명, 인류의 통합, 과학혁명으로 이루어져있다.

 

역사 연대표에서는 석기 시대로부터 인류 역사를 거시적이면서도 작가 특유의 독창적인 안목으로 기술한다. 내가 막연히 <<사피엔스>>를 하라리의 상상력이 많이 동원된 책이었다고 기억하는 부분들이 서두에 많이 나온다. 나름의 증거 자료들을 제시하며 주장하지만 그런만큼 빈번히 ‘그러나 우리는 모른다' 또는 ‘결코 알 수 없다' 라고 거듭 말하지 않는가. 

 

우리는 여태까지 우리의 선조인, 네발로 기어다녔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부터 직립보행을 한 호모 에렉투스 그리고 지능을 갖춘 사피엔스까지 익숙한 진화의 논리로 현 인류가 됐다고 배웠다. 작가는 이것이 우리의 마음의 평화를 위한 논리였다고, 실은 우리는 같은 호모속의 형제들을 다 죽이고 살아남은 종이었다고 충격적이나 반박하기 어려운 역사적인 사실 증거들을 제시한다.    

 

인지 혁명

별로 중요치 않은 동물이었던 사피엔스가 약 7만년 전 알 수 없는 돌연변이로 인해 지능을 갖추게 되었다는 인지 혁명. 공통의 상상물을 집단으로 믿을 수 있는, 이야기를 지어내 퍼뜨릴 수 있는 그 지적 돌연변이는 왜 하필 '관용은 없는' 사피엔스에게 일어났을까? 만약 다른 종에게 일어났더라면 우린 지금 존재하고 있을까? 어떤 현재가 되어 있을까? 이 조그만 돌연변이 사건이 일으키는 나비효과가 책의 내용이다. 

 

농업 혁명

약 12,000년 전 발생한 인류 최대의 사기극 농업 혁명. 수렵 채집의 생활을 마치고 정착하는 농경 사회로의 진입은 잉여 생산을 낳아 인류 계급 역사의 시발점이 된다. 농경 생활로 인해 정착했다는 것과 개인의 소유가 생겼다는 것. 바꿔말하면 노동의 결과물이 도 아니면 모일 경우가 많아 더 많은 불안과 경계를, 또 다시 그 불안은 부족간의 전쟁을 야기했다. 우리는 왜 수렵채집인과 닮은 생활을 하는 유목민들의 삶을 보여주는 다큐를 보며 고단하기만 했을거라고 깎아내렸을까. 

수렵채집인들은 그보다 더 활기차고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고 기아와 질병의 위험이 적었다. 농업혁명 덕분에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식량의 총량이 확대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분의 식량이 곧 더 나은 식사나 더 많은 여유 시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구폭발과 방자한 엘리트들을 낳았다. 평균적인 농부는 수렵채집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으며 그 대가로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
새로운 농업 노동은 너무나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사람들은 밀밭 옆에 영구히 정착해야만 했다. 이로써 이들의 삶은 영구히 바뀌었다. 우리가 밀을 길들이 것이 아니다. 밀이 우리를 길들였다. ‘길들이다, 가축화하다'라는 뜻의 단어 domesticate는 집이라는 뜻의 라틴어 domus가 어원이다. 집에서 사는 존재는 누구인가? 밀이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다.
농업혁명의 핵심은 이것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을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있게 만드는 능력. 하지만 이런 진화적 계산법에 왜 개인이 신경을 써야 하는가?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호모 사피엔스 DNA 복사본의 개수를 늘리기 위해 삶의 질을 포기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 거래에 동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농업혁명은 덫이었다…. 좀 더 쉬운 삶을 추구한 결과 더 어렵게 되어버린 셈이었고, 이것이 마지막도 아니었다.... 돌아갈 길은 없었다. 덫에 딱 걸리고 말았다. 
수렵채집인은 다음 주나 다음 달에 대해 생각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농부들은 미래의 몇해나 몇십 년이라는 세월 속으로 상상의 항해를 떠났다…. 그 결과 농업의 도래와 함께 비로소 인간의 마음속 극장에서 미래에 대한 걱정은 주연배우가 되었다. 

 

인류 통합의 역사

또한 사피엔스 종 특유의 공통의 상상물을 믿는 능력. 이로써 돈을 신용하게 되고 이를 통해 미래 자산을 당겨 쓰는, 그리하여 그 무서운 속도의 성장이 멈추는 순간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자본사회를 건설하고, 더 많은 소비시장 확보를 위한 제국주의로 나아가 부정적인 의미로 읽히는 인류 통합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된다. 

 

과학 혁명

마지막 챕터 과학혁명에서는 근대에 오자 ‘무지의 지'라는 새로운 앎을 깨달은 사피엔스들과 이러한 사회 문화를 바탕으로 제국의 자본과 손잡은 과학의 혁명적인 발전에 대해 말한다. 이전에는 전지전능한 절대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 정치 사회적 질서를 안정시키는 방법이었다면, 이제 현대 문화는 폭넓게 기꺼이 무지를 받아들일 수 있으므로 현대의 사회질서를 지탱해주는 요인들 중 하나는 기술과 과학적 연구방법에 대한 거의 종교적인 믿음이 절대진리에 대한 믿음을 어느 정도 대체했다. 

과학혁명은 지식혁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무지의 혁명이었다. 과학혁명을 출범시킨 위대한 발견은 인류는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모른다는 발견이었다.
과학과 산업과 군사기술은 자본주의 체제와 산업혁명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서로 얽히기 시작했고, 일단 그 관계가 정립되자 세상은 급속히 변했다.
한마디로, 과학연구는 모종의 종교나 이데올로기와 제휴했을 때만 번성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연구비를 정당화한다.

 

 

그래서 지금 인류는 행복한가

처음 읽었을 때에는 우리는 살인자 카인의 후예로구나 하는 자괴감과, 사피엔스에게 관용은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소름끼치는 역사, 인류 최대의 사기라고 표현하는 농업 혁명의 이면을 들여다 보게된 것이 가장 쇼킹했다면, 재독을 마친 지금 하라리가 전하고자 했던 메세지의 방점은 ‘그래서 지금 인류는 행복한가?’ 아니라면,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에 찍혀진 듯 읽혔다. 진화의 관점에서 개인의 행복은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으므로.

 

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끝없는 혁명> 챕터이기도 하다. 전에 읽었던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저자는 개인의 삶으로만 비춰 비교한다면 중세인들이 르네상스 시대나 현대인들보다 행복했으리라고 추측했다. 그 이유로 이미 태어나자마자 가족 구성원들의 끈끈한 보살핌과 나의 확실한 자리(계급)가 정해져 있어(선택권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직업 구성원들간의 연대와 길드의 보호하에 양질의 일자리에서 일하며,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자신의 신념과도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었기에.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토크빌이 민주주의의 결과로 소외된 개인이 될 수 밖에 없다고 경고했던 바를 하라리 역시 강조한다. 

그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진행되는 노예화 과정이라고 말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물처럼 촘촘한 규칙들 속에서 사람들이 창조력을 잃어가며 소시민화된다는 것이다. 
최고의 통치권력은 사회 구성원을 장악하고 마음대로 다루게 되면 그 다음으로 그 힘을 전체 사회로 확장하게 된다. 통치 권력은 사회를 모두 장악한 다음 획일적이고 복잡하고 촘촘한 규칙의 그물로 뒤덮어서 아무리 독창적이고 정력적인 사람이라도 군중을 초월하여 이 그물을 뚫고 나가지 못하게 한다. 인간의 의지가 분쇄당하지는 않지만 약화되고 굴절하며 종속적으로 된다. 인간이 정부에 의해 행동을 강요당하는 일은 별로없다. 그러나 끊임없이 행동의 제한을 받는다. 이런 권력은 생존을 파괴하지는 않지만 방해한다. 폭정화하지는 않지만 국민을 억압하고 생기를 잃게 하며 우둔하게 만든다.
 - 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

사피엔스는 자연의 변덕으로 인한 영향은 점점 더 적게 받게 되었지만 현대 산업과 정부의 명령에 점점 더 많이 복종하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보다 잘살지 못했던 선조들이 공동체, 종교, 자연과의 결합 속에서 커다란 만족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개인이 각자의 삶의 길을 결정하는데 전례 없이 큰 힘을 누리게 되면서, 우리는 남에게 헌신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와 가족이 해체되고 다들 점점 더 외로워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산업 혁명

산업혁명에 대해서도 작가의 평가는 가차없다. 

산업혁명은 제2차 농업혁명이었다…. 중세 유럽의 귀족들은 값비싼 사치품에 돈을 흥청망청 썼지만, 농부들은 한 푼 한 푼을 아끼며 검소하게 살았다. 오늘날은 상황이 역전되었다. 부자는 자산과 투자물을 극히 조심스럽게 관리하는데 반해, 그만큼 잘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빚을 내어서 정말로 필요하지도 않은 자동차와 TV를 산다. 자본주의 윤리와 소비지상주의 윤리는 동전의 양면이다. 이 동전에는 두 계율이 새겨져있다. 부자의 지상 계율은 ‘투자하라!’이고, 나머지 사람들 모두의 계율은 ‘구매하라!'다.
상상의 공동체가 부상한 사례 중 가장 중요한 두가지가 국민과 소비 공동체이다. 국민은 국가가 만든 상상의 공통체다. 소비 공동체는 시장이 만든 상상의 공동체다.”

 

 

작가는 행복의 ‘즐거운 생화학 시스템', 이기적 유전자론의 자연선택, 불교 철학에 나타난 부처의 입장 등 많은 설명에 지면을 할애하며 이 모든 역사적 혁명 사건들을 통해 이루어낸 현생 사피엔스로서의 삶이 행복한가에 대해 묻고 또 묻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제 죽음을 극복하고 스스로 신의 반열에 오르고자 하는 존재로서 무엇을 원하는가? 책의 말미에서 우리는 머지않아 스스로의 욕망 자체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라며, 그러므로 아마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어떠한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 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 질문이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라며.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 

 

한국이 가르쳐주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기술은 이야기의 절반에 불과하고, 마침내 사람들이 기술로 무엇을 할지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서문의 <한국의 독자들에게>
만일 긴장과 분쟁과 해결 불가능한 딜레마가 모든 문화의 향신료라면, 어떤 문화에 속한 인간이든 누구나 상반되는 신념을 지닐 것이며 서로 상충하는 가치에 의해 찢길 것이다. 이것은 모든 문화에 공통되는 핵심적 측면이기 때문에, 별도의 이름까지 있다. ‘인지 부조화'다. 인지 부조화는 흔히 인간 정신의 실패로 여겨진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핵심자산이다.

 

 

긴 이야기였어요

읽으면서 독서모임에서 같이 읽었던 많은 책들이 떠올랐다. <<그리스인 조르바>> <<싯다르타>> <<동물농장>> <<미국의 민주주의>> 그리고 니체의 글들과 <<자유로부터의 도피>>. 작가가 유태인 배경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자니 기득권의 자기비판 같은 놀라운 부분도 있었다. 이를테면 유일신 종교관에 대한 글이나 역사는 잉여 생산물을 갈취한 방자한 엘리트들의 이야기라든지 하는. 유태인들이 자본주의 개념에 이해가 빨랐던 이유로 이뤄낸 이익 덕분에 작가 유발 하라리도 본인이 나열했던 키케로와 세네가,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사색과 집필을 할 여유를 누릴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도 든다. 

 

우주에 다녀온 비행사들을 인터뷰한 결과에 따르면 지구를 밖에서 온전히 바라본 그 찰나의 순간에 온전한 깨달음이 있었다고 한다. 지구보다 큰 존재가 된 순간 그 아름답고 작은 별을 보면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생각이 진심으로 들었다면서. 돌아온 이후에도 좀 더 이타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고. 작가 덕분에 기나 긴 인류의 역사 이야기를 한권의 책으로 읽고 나니 작가가 한 말이 와닿는다.   

왜 역사를 연구하는가? 물리학이나 경제학과 달리, 역사는 정확한 예측을 하는 수단이 아니다. 역사를 연구라는 것은 미래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다. 우리의 현재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우리 앞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가령 유럽인이 어떻게 아프리카인을 지배하게 되었을까를 연구라면, 인종의 계층은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며 세계는 달리 배열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인생이 허무하다고 두려워했습니다. 나는 그것을 이겨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렵사리 생각을 하지만 나는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나는 선에 대해 기뻐하지도, 악에 대해 실망하지도 않아요. 그리스가 콘스탄디노플을 점령했다는 소리를 들어도 내게는 터키가 아테네를 점령했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내 조국으로부터 해방되고, 신부들로부터 해방되고, 돈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나는 짐을 덜기 시작했습니다. 있는 족족 덜어 버린 겁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내 짐을 덜었습니다. 자, 이런 걸 뭐라고 하던가요? 나는 구원의 길을 찾는 겁니다. 나는 인간이 되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죠?”
“자유라는 거지!”

 

이 두꺼운 <<사피엔스>>를 읽지 않고도 깨달은 조르바가 또 다시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