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책읽기

당신은 잡힌 고래인가 놓친 고래인가 <<모비 딕- 허먼 멜빌>>

소라언냐 2024. 6. 19.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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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Moby Dick)

 

by 허먼 멜빌 Herman Melville, 김석희 옮김

 

 

 

<<모비 딕>>에 대한 평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은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걸작 소설이다. ‘거실에 록웰 켄트의 판화 <에이해브 선장>을 액자에 넣어 걸어놓기도 했던’ 윌리엄 포크너는 “<<모비 딕>>이 다른 작가의 책 가운데 자기가 썼더라면, 하는 생각이 드는 단 하나의 작품”이라고 했고,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자신의 출판업자에게 “말년이 다가오자 넘어서고 싶은 작가들이 이제 몇 안 남았는데 그중 한 명이 허먼 멜빌”이라는 말을 남겼다. 버락 오바마, 스티브 잡스, 밥 딜런 등이 애독한 책으로도 유명하다.

 오늘날에는 ‘미국의 성서’라고도 불리는 고전 중의 고전이다. 그러나 멜빌이 일흔두 살의 나이로 죽기 전까지 <<모비 딕>>은 미국에서 고작 3715부가 팔렸다. “1851년 가을 <<모비 딕>>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거의 아무도, 아마도 이 소설을 헌정받은 작가 너새니얼 호손과 호손의 아내 소피아 정도를 빼고는 아무도 <<모비 딕>>에 주목하지 않았다.” <<모비 딕>>이 찬양의 대상이 된 것은 1차대전이 끝나고 난 뒤였다. 

 

 

읽어야 할 고전 리스트에 꼭 있던 책

<<모비 딕>>은 내 기억에 ‘읽어야 할 고전 100선' 등에 항상 5위 안에 랭크되던 책이라 제목만은 익숙한 책이었다. 하지만 왜 그리 두꺼운지... ㅎㅎ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재밌게 본 터라 주인공이 집착하던 고래에 관심이 있기도 했고, 이런 벽돌책은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어야 그 은근한(?) 압박감에 빨리 끝낼 수 있는 책이기도 해서 독서모임에 추천해 함께 읽었다.

 

이상하고 어려운 책이었지만 읽는 동안 챌린지가 있어 재밌었던 책. 고래와 고래잡이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발췌문들. 지금에야 구글만 해봐도 나올 잡학들이겠지만 당시 고래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살뜰히 정리해준 작가에게 엄청 고맙지 않았을까. 첫 부분을 읽을 때에는 <<월든>>의 문체처럼 풍경 묘사가 풍부한 책인가 했었다. 이들이 19세기에 좀 먹히던 문체인가보다. ㅎㅎ

 

 

또한 영미문학사에 손 꼽힌다는 이 책은 이 맥락으로 읽히는가 싶으면 갑자기 엉뚱한 장면이나 대사가 나타나 내가 그동안 따라가며 이해한 캐릭터들이 일순간 달리 읽히기도 했던 책이기도 했다.

 

세익스피어 작품의 영향을 받았다더니 극본처럼 방백도 많아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헷갈렸고, 비유와 상징들이 많아 몇 문장마다 주석 페이지를 읽어야 하는 바람에 아예 주석 부분에 책갈피를 껴놓고 읽어야 했다. 이상해... 어려워... 근데 또 재밌어... 근데 이상해...

 

특히 에이헤브 선장은 니체의 초인으로 읽혔다가 미친 에고의 상징으로도 읽히는 등 사실 서평을 남기는 아직도 갈피가 뚜렷히 잡히지 않는다는 고백을 먼저 하고 글을 써야겠다.

 

 

비유와 상징으로 꽉찬 책

왜 '미국의 성서'라는 칭호까지 받고 있는지 알 것도 같다. 온통 비유와 상징 투성이 책이어서 독자마다 달리 읽을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등장인물들의 이름들이 예사로 읽히지 않는다.

 

>> 향유 고래의 이름 Moby Dick = 대물

 

 

>> 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 = 백인 + 앵글로색슨계 + 개신교 + 남자

말벌을 뜻하는 wasp은 현재 자본주의 체제의 기득권 층을 일컽는 말로 위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백인 기득권 남자들끼리 말벌들처럼 그들만의 꿀단지를 공유하고, 그것이 공격 받을 때는 떼뭉쳐 맹렬히 공격한다는 언어유희적인 슬랭이다.

 

 

>> 에이헤브 Ahab.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유대 민족(북이스라엘)의 7대 왕

에이헤브. 나는 WASP이 떠올랐다. 그리고 조지 오웰의 <<멋진 신세계>>에서 문명인들이 신으로 모셨던 헨리 포드. 우리는 현 임금 체계의 근간을 만들었던 그의 실험을 알고 있지 않은가. 

 

‘4인 가족 구성의 백인 기독교 가장들’을 대상으로 그들에게 줘야 할 적당한 월급이 얼마인지를 알아내기 위한 실험. 당시 그 실험에 참여할 수 있는 자체가 꿀같은 조건이었다니 그들이 중산 기득권 층임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멋진 신세계>>의 문명인들이 십자가 상징 대신 썼던 T. 이 책에서는 이교도들의 성호라고만 소개되었는데, 나도 십자가의 유래가 궁금해 찾아보았다. AD 313년 다신교 국가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와 모친 헬레나가 유일신 기독교를 로마의 다신교들 중 하나로 받아들이고,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일 때까지 당시의 주축 종교들이었던 다신교도들을 잡음없이 기독교로 흡수하기 위해서 그들의 T성호를 십자가로 퉁쳐 구원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이전의 박해를 기억하는 기독교인들이라면 꿈에라도 나타날까 두려워했던 끔찍한 형별, 십자가 형이 구원의 아이콘이 된 아이러니. 이 두 권의 책이 이렇게 연결이 되다니...

 

 

에이헤브가 암시하는 바는 기독교의 이원론적인 세계관이라고 읽힌다. 나와 너. 선과 악. 나와 나를 해친 고래 모비 딕. 내가 고래를 죽이지 않으면 고래가 나를 죽일 것이라는 이 미친 믿음은 그가 신뢰할 만하다고 여기던 일등항해사 스타벅이 모비 딕은 공격을 당해서 그럴 뿐 당신을 해칠 의도가 없었다고 충고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리를 믿는 에고의 상태를 보여준다. 즉, 모비 딕은 에이헤브의 분리된 에고의 투사이다.

 

분리의 확신에 차 있는 에이헤브는 말 못하는 짐승한테 복수가 웬 말이냐는 스타벅에게 세상은 판지로 되어 있는 가면이라며, 모비 딕 그 이면에 있는 세계를 보기 위해 그 고래를 죽인다고 말한다. 일면 그는 허상의 세계를 인식하는 니힐리즘을 말하는 건가 싶은 순간, 그러나 그 이면에 있는 존재조차도 악의에 찬 존재로 상정하며 공격과 증오를 말한다.

다시 한 번 말할 테니 잘 듣게. 자네는 좀 더 낮은 층을 볼 필요가 있어.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판지로 된 가면일 뿐이야. 하지만 어떤 경우든, 특히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정한 행위를 하는 경우에는, 그 엉터리 같은 가면 뒤에서 이성으로는 알지 못하는, 그러나 합리적인 무엇이 얼굴을 내미는 법이야. 공격하려면 우선 그 가면을 뚫어야 해! 죄수가 감방 벽을 뚫지 못하면 어떻게 바깥세상으로 나올 수 있겠나? 내게는 그 흰 고래가 바로 내 코 앞까지 닥쳐온 벽일세. 때로는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건가. 그 녀석은 나를 제멋대로 휘두르며 괴롭히고 있어. 나는 녀석한테서 잔인무도한 힘을 보고, 그 힘을 더욱 북돋우는 헤아릴 수 없는 악의를 본다네. 내가 증오하는 건 바로 그 헤아릴 수 없는 존재야. 흰 고래가 앞잡이든 주역이든, 나는 그 증오를 녀석에게 터뜨릴거야…

 

 

>>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 해두자. Call me Ishmael.

이스마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아내 사라의 몸종 하갈을 취해 낳은 아들. 즉, 서자이다. 이후 하나님의 말씀처럼 늙은 아내 사라를 통해 이삭을 얻게 되자 아브라함의 집에서 쫒겨난다.

 

작가 멜빌은 왜 주인공이자 관찰자이며 관조자의 이름을 하필 이스마엘이라고 했을까? 온통 성경적인 비유로 가득 차 있는 이 책의 내용으로 보자면 그냥 지은 이름은 아니다. 게다가 ‘내 이름은 이스마엘이오’가 아니라 ‘이스마엘이라고 해두자'라는 문장은 주인공의 이름이 이스마엘이 아닐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불러달라는 말이다. 왜 그랬을까?

 

WASP의 상징처럼 읽히는 에이헤브 선장의 대응 격의 인물로 암시한 것일까. 이슈마엘의 사색이나 독백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그는 현상 이면의 실재를 말하고, 소설 전체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일을 보고 있는 관찰자와 전달자인 동시에, 다른 이들의 내면 상태까지 읽을 수 있는 전지적 시점의 관조자이다. 선상 생활을 통해 얻은 불교 철학적인 사색을 남기고, 식인종 퀴퀘그의 문화를 이해하고 그와 우정을 나눌 만치 포용력을 보여주는 캐릭터.

술에 취한 기독교인보다 취하지 않은 식인종이 나을지도 몰라. 이 사람도 똑같은 인간이야.
식인종이라고? 식인종이 아닌 사람이 누구인가? 다가올 기근에 대비하여 말라빠진 선교사를 소금에 절여 지하실에 넣어 둔 피지 섬 사람들이, 최후의 심판날에, 여러분처럼 개화되고 문명화한 식도락가들 - 거위를 땅바닥에 못박아놓고 그 간을 비대하게 부풀려 파테 드 푸아그라를 즐기는 사람들보다 관대한 처벌을 받을 것이다.
지구상에서 소위 그림자라고 불리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진정한 실체인지도 몰라.
하지만 고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폐로 호흡하는 온혈동물이다. 피가 얼면 죽고 만다. 그렇다면 사람처럼 체온이 반드시 필요한 이 거대한 괴물이 북극해에서 평생동안 입술까지 잠겨 있는데도 편안해 보이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곳은 이따금 배에서 떨어진 선원이 호박 속에 달라붙은 파리처럼 몇 달 뒤 빙원 속에 수직으로 얼어붙은 채 발견되는 곳이 아니던가! 하지만 더욱 놀라운 일은 북극 고래의 피가 여름철의 보르네오 섬에 살고 있는 흑인의 피보다 더 따뜻하다는 것이 실험으로 입증되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여기에 고래 특유의 강한 생명력, 두꺼운 벽과 널찍한 내부 공간의 보기 드문 효력이 나타나 있는 듯 하다. 오오, 인간들이여! 고래를 찬미하고, 그들을 본받아라! 그대들도 얼음 속에서 따뜻한 체온을 유지해라. 그대들도 이 세상의 일부가 되지 말고 이 세상 속에서 살아라. 적도에서는 시원하게 지내고, 극지에서도 피가 계속 흐르게 하라. 오오 인간들이여! 성베드로 대성당의 거대한 돔처럼, 그리고 고래처럼, 어떤 계절에도 그대 자신의 체온을 유지하라.

 

 

>> 피쿼드 호에 못 박혀 있는 스페인 금화 (Republica Del Ecuador: Quito)

피쿼드 호에서 에이헤브 선장의 복수를 함께 다짐했던 선원들 중 고래를 처음 발견한 사람에게 포상금으로 주기로 했던, 주돛대에 못 박혀 있던 스페인 금화. 같은 동전을 보면서 각자 다 다른 의미들을 유추한 독백을 남긴다.

 

- 에이헤브: 

"보아라! 세 봉우리가 악마처럼 뻐기고 있는 것을. 꿋꿋한 탑, 그것이 에이헤브이고, 불을 뿜는 화산, 그것이 바로 에이헤브이다. 모든 것이 에이헤브다. 이 둥근 금화는 이보다 더 둥근 지구의 모형이며, 마법사의 거울처럼 모든 사람의 신비로운 자아를 차례로 비추어준다."

 

- 스타벅: 

"하늘로 솟아오른 웅장한 세 봉우리 사이의 어두운 골짜기인가. 삼위일체를 이 지상에서 어렴풋이 상징하는 것 같군. 이 죽음의 골짜기에서 하느님이 우리를 둘러싸고 지켜주시며, 어둠 위에서는 언제나 정의의 태양이 횃불과 희망이 되어 비치고 있구나."

 

- 스터브: 이 외에도 이를 12궁의 별자리로 해석했던 스터브는 숨어서 이 외에도 퀴퀘그, 페달라 등의 행동을 유심히 살핀 후 말한다. 

“이제 또 다른 해석이 제시됐군. 하지만 원문은 하나 뿐이야. 하나의 세계에서도 사람은 만가지라니까.

 

- 핍: 바다에서의 사고 후 이상해진 핍은 같은 문장을 반복한다.

“나는 본다. 너는 본다. 그는 본다. 우리는 본다. 니들은 본다. 그들은 본다.”

 

 

현대의 양자 물리학은 관찰자의 시점 그리고 의도에 따라 현상이 달라진다고 했다. 관찰자가 있어야 존재한다는 것은 ‘보는’ 나, 우리가 있기에 이 우주가 존재한다는 말이기에 핍의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이어서 제 57장 <그림, 이빨, 나무, 철판, 돌, 산, 별 등>에 나타난 고래들 챕터에서는 고래라는 존재에 집중하고 있는 이스마엘의 눈에는 산등성이 곡선부터 문 손잡이까지 모두 고래의 형상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이런 독백들과 묘사는 우리는 다들 각자만의 우주 속에 살고 있고, 그 금화나 흰 고래(이 세계, 현상) 자체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많은, 분리를 믿는 에고들 그리고 그로부터 만들어진 수만개의 우주들. 잠든 커다란 하나의 거인이 꾸는 수많은 분리의 꿈.

 

 

에필로그에서 번역을 한 김석희씨는 ‘멜빌은 바다와 별을 포한한 우주의 생성을 무언가 위대한 존재가 저지른 과오로 인식한다’고 했다. 멜빌의 생각에 깊이 깊이 동감이다. 분리를 상상했던 존재, 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고, 보는 자는 누구인가?

 

Call me Sora.

 

 

남기고 싶은 장면들과 묘사

기대하지 않았던 구석구석에서 작가의 포경선 상의 일상 생활을 관통하는 통찰력이 빛나는 글들을 만날 수 있어서 졸린 와중에도 읽는 기쁨이 있었다. 잊지 않기 위해 메모를 남겨둔다.

 

1) 제 42 장 ‘고래의 흰 색’이라는 장에서는 흰 색이 불러 일으키는 원초적인 공포감에 대해 서술했다. 한강 작가의 <<흰>>이라는, 읽는 중에도 후에도 불쾌(?)했던 에세이 집의 모티브가 아니었는가 싶은 생각이 났던 장이었다. 읽으며 느끼는 감정이 놀랄 정도로 굉장히 비슷하다.

 

 

2) 퀴퀘그가 상어떼에 둘러싸인 채로 잡힌 고래를 정리하는 동안 이슈마엘은 원숭이 밧줄'을 쥐고 그가 빠지지 않게 잡고 있지만 그 역시 퀴퀘그가 바다에 빠지는 순간 함께 빠지는 운명이다. 남을 돕는 것이 곧 나를 돕는다는, 우리가 하나라는 비유.

인간은 누구나 포경 밧줄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모든 인간은 목에 밧줄을 두른 채 태어났다. 하지만 인간들이 조용하고 포착하기 힘들지만 늘 존재하는 삶의 위험들을 깨닫는 것은 삶이 갑자기 죽음으로 급선회할 때뿐이다… 나는 물결이 굽이칠 때마다 밧줄을 당겼다 늦추었다 하면서 생각했다. 그래. 그래. 나의 친애하는 동료이자 나의 쌍둥이 형제여, 결국 그게 어쨌단 말인가? 자네야말로 이 고래잡이 세계에서 우리 모두의 귀중한 표상이 아닌가? 자네는 깊이를 잴 수 없는 바다 속에서 헐떡거리고 있지만, 그 바다야 말로 ‘인생'인 것이다. 그 상어들은 너의 적, 그 고래 삽은 너의 친구, 상어와 삽 사이에서 가엾은 자네는 슬픈 곤경과 위험에 빠져 있다.

 

마침 <<생활 속의 바가바드 기타>>를 함께 읽었다. 삶이란 끊임없이 반복되는 전쟁터로, 극한의 상황을 설정한 바가바드 기타. <<모비 딕>>의 이스마엘은 위험하고 고단한 고래잡이와 지난한 기름 정리가 끝나고 옷을 갈아입지만 또 누군가 돛대에서 ‘고래가 나타났다'라고 소리치는 순간 이 모든 과정이 또 반복(윤회) 된다고 하며 이는 인생과 같다고 말한다.

원치 않는 전쟁터에 나가 친인척들을 베어야 하는 아르주나의 기막힌 상황에서 삶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행동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행위에 따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러한 삶에서 초탈해야 하는 것이 옳은가? 라는 아르주나의 질문에 크리슈나는 이렇게 답한다. ‘삶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옳지 않다. 의무로써 삶에 참여하라. 고통과 대면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생활 속의 바가바드 기타>> 

 

 

3) “”고래처럼 거대한 생물이 그렇게 작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토끼보다 작은 귀로 우렛소리를 듣다니, 신기하지 않은가? 하지만 고래의 눈이 허셜의 망원경 렌즈만큼 크고 귀가 성당 입구만큼 크다면 고래는 더 멀리까지 볼 수 있고 고래의 청각은 더 예민해질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을 넓히려고 애쓰는가? 그보다는 마음을 예민하고 섬세하게 하는 데 노력하라.

 

 

4) 신성한 직관이 분출하는 때

여러분도 알다시피 맑은 하늘에는 무지개가 찾아오지 않는다. 무지개는 증기만 빛나게 할 뿐이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 숨어 있는 희미한 의심의 짙은 안개를 뚫고 신성한 직관이 이따금 분출하며, 내 마음 속의 그 짙은 안개를 천상의 찬란한 빛으로 태워버릴 때가 있다. 나는 이것을 신에게 감사드린다. 모든 사람이 의심을 품고 많은 사람이 부정하지만,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사람들 가운데 직관을 가진 사람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지상의 온갖 것에 대한 의심, 천상의 무언가에 대한 직관, 이 두 가지를 겸비한 사람은 신자도 불신자도 되지 않고, 양쪽을 공평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된다.

 

우리 싸목싸목 모임에서 함께 읽었던 <<우아한 가난의 시대>>에서  백상현 박사가 언급했던 ‘유령이 찾아 온 시간'이 기억났다.

<<고독의 매뉴얼>>을 쓴 철학자 백상현은 이러한 순간들을 ‘유령이 찾아 온 시간'으로 명명하며, 잠시 열렸다가 금세 닫히는 자각의 시간을 놓치지 말고 탐험하라고 말한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잠시 균열되는 순간을 일생일대의 사건으로 받아들일 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고 말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고독은 이러한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한 일종의 기초체력 훈련과정이다. 세상사람 모두가 진리라고 말하는 것에서부터 떨어져나와 자발적 고독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만이 유령을 알아볼 수 있다고 말이다.  <<우아한 가난의 시대>>

 

 

5) 잡힌 고래와 놓친 고래 

일반 사람은 유식한 판사의 이 판결에 반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의 근원에 들어가면, 앞에서 인용한 한 쌍의 포경법에 규정된 양대 원칙 - 방금 언급한 간통 사건에서 엘렌버러 경이 적용하고 예증한 ‘잡힌 고래’와 ‘놓친 고래'에 관한 두 가지 원칙이야말로 곰곰 생각해보면 인간 세상에 있는 모든 법체계의 근본일 것이다. 법의 전당은 복잡한 그물무늬로 장식되어 있지만, 펠리시테인의 전당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단 두 개의 기둥 뿐이기 때문이다.

 

 

독서 모임 후 덧붙임 

<잡힌 고래, 놓친 고래> 챕터를 읽고 처음에는 우리의 법 체계가 본시 개인의 소유를 어떻게 나눌 것이냐에 기본한 것이라는 통찰을 적은 것이라 생각했고, 고래로 비유된 바람난 부인 얘기를 읽을 땐 고래나 부인이나 참 폭폭하겠다 싶었다. 법은 주체의 소유권만 중요하고 객체에 대한 존중은 아예 없구나. 어차피 잡힌 고래와 놓친 고래의 골자는 누가 최종 소유자이냐에 방점이 있으니.

 

독자들 당신 또한 놓친 고래이자 잡힌 고래가 아닌가'라는 마지막 문장이 반전이었다. 그 문장을 파고 드니 나는 과연 잡힌 고래이자 놓친 고래가 맞다. 꽉 잡혀있고 싶지 않아 자유로운 고래가 되고 싶지만 아직도 나는 '잡혀있던' 기억이, 상처가 있는 놓친 고래쯤 되겠다.

 

이를 다시 영적인 면으로 비추어 보자면 나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에 꽉 잡혀 있던 잡힌 고래였고, 지금은 갈라지고 있는 크랙을 넓히고 반쯤 빠져나간, '잡혔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놓친 고래'인 듯 싶다. 완전히 허상임을 깨달으면 크랙이 아니라 벽이 아예 사라져 자유로운 고래가 될텐데…

 

지상의 온갖 것에 대한 의심,
천상의 무언가에 대한 직관

이 두 가지를 겸비한 사람은
신자도 불신자도 되지 않고,
양쪽을 공평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