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책읽기

지금 읽어도 가슴 뜨거워지는 책 <<공산당 선언 - 칼 맑스>>

소라언냐 2024. 7. 1. 14:11
반응형

공산당 선언

by Karl Marx (1848), 이진우 옮김

 

오늘날 맑스 주의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맑스 주의는 여전히 문제적이다.  맑스주의만큼 자본주의의 은폐된 문제들을 총체적으로 조망하고 엄밀하게 비판한 사상도 드물기 때문이다. 맑스는 어떤 사상가보다도 예리한 현실 감각으로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자본의 논리로 야기되는 인간 소외의 문제를 철저히 분석했다.

이 책에는 이데올로기를 현실에 단순히 대립시키는 교조적 태도를 경계하고, 현실을 개척할 수 있는 원리를 현실 자체에서 산출하려는 맑스의 과학적 태도가 용해되어 있다. 나아가 맑스는 혁명에 대한 열정과 냉철한 현실 분석으로 인간 해방을 꿈꾼다. 오늘날 많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비추어 볼 때 계급 해방, 인간 해방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사유한 맑스를 다시 만나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 옮긴 이의 글 중

 

 

저자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줍시다

우선, 저자 이름의 한국 발음을 ‘맑스’냐 ‘마르크스’냐로 정리하고 서평을 써야겠다. 한국에는 칼 맑스의 책이 일제시대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받침 발음이 없어 맥도널드를 마크도나르도로 발음하는 일본 사람들의 발음을 그대로 차용해 쓰게 된 표기가 카를 마르크스라고. 이제 연유를 알았으니 ‘칼 맑스'라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자. 우리에게는 원어 발음을 제대로 표기할 수 있는 훌륭한 한글이 있다.

 

 

이 책은 이렇게 만나게 됐죠

채사장이 <지서재>에서 추천한 책 목록에 있어 궁금했고, <<태백산맥>>을 모임에서 함께 마치고 나니 빨치산이 그토록 집중했던 공산주의 이념에 대해 더욱 궁금해져 고른 책. 내용은 맑스와 엥겔스가 공동 저술한, 아래와 같은 내용의 30 페이지 정도 분량의 공산주의 소개 팸플릿 책자 정도 되겠다. 이후 엥겔스는 공동으로 작성했으나 이는 모두 맑스의 아이디어였슴을 확실히 한다.

 

챕터1. 맑스의 역사관과 계급의 탄생
챕터 2.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공산주의의 목적
챕터 3. 기존 사회주의 이념의 한계: 맑스는 아래와 같이 분류하여 각각을 모두 비판한다.
       ㄱ) 봉건적 사회주의, 소시민적 사회주의, 독일 사회주의(또는 ‘진정한’ 사회주의)
       ㄴ) 보수적 또는 부르주아-사회주의
       ㄷ) 비판적-유토피아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챕터 4. 여러 반대 정당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입장: 한마디로 ‘공산주의자들은 도처에서 기존의 사회적, 정치적 상태에 대항하는 모든 혁명 운동을 지지했다'고 정리한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위와 같이 시작한 선언문에서 맑스는 현실에 발 딛고 세상을 바꿀 철학을 하겠다는 철학자답게 기나 긴 인류의 역사를 아래와 같이 명료하게 정리했다. 

이제까지 사회의 모든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원시 공산주의를 거쳐 농업 혁명 이후 발생한 잉여 생산물로부터 자유민과 노예, 세습 귀족과 평민, 남작과 농노, 길드 등의 동업 조합원과 직인 등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부단히 대립했으며, 이 투쟁은 항상 전체 사회의 혁명적인 개조로 끝나거나 투쟁 계급들의 공동 몰락으로 귀결되었다고. 

 

도입 부분에서 현 자본주의의 폐단이 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어떻게 출현했고, 그 지위 관계가 공고해졌는지 말한다. 중세에는 봉건 영주, 봉신, 동업자 조합 시민, 직인, 농노 등의 계급이 있었는데, 봉건 사회가 몰락하면서 탄생한 현대 시민 사회는 이 계급들을 폐지하지는 않고 새로운 계급들로 대체해 왔다. 

그러나 우리 시대,
즉 부르주아지 시대는이 계급 대립을
직접 대립하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로 단순화했다.

 

부르지아지의 탄생

그럼 부르주아지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중세 질서가 붕괴되면서 농노들이 초기 도시의 성외시민(소시민)이 되었다. 점차 상인으로 성장하고 있던 이들 성외시민들에게 아메리카 발견, 아프리카 회항, 동인도와 중국 시장, 식민지와의 교역, 상업/해운/공업의 비약적인 발전 등은 새로운 영역을 열어주었고, 특히 대규모 공업은 아메리카의 발견으로 그 초석이 마련된 세계 시장을 창출하게 되었다. 

 

도시의 대규모 공장을 돌리는 인력이 필요했던 신흥 부르주아지는 봉건 귀족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싶었던 농노들과 결탁해 봉건 귀족을 몰락시켰고, 자유 농노들은 도시로 가 프롤레타리아가 되었다. 조지 오웰의 <<1984>>의 내용이 겹친다. 맑스의 말대로 지금까지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의 반복이 사실이다.

감옥에서 오브라이언이 한 말 중 서늘했던 것은 상, 중, 하의 (그 이름이 무어라 불렸더라도) 계급과 계급투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거였다. 상층은 그들의 위치를 영원히 지속하고 싶어하고, 중층은 상층과 위치를 바꾸고 싶으며, 하층은 상층이 누가 되더라도 지배자의 이름만 바뀔 뿐 자신들의 고달픈 일상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권력투쟁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중층은 자리를 바꾸기 위해 하층에게도 매력적인 제안을 해 그들을 포섭해 자리를 바꾸지만 바꾼 이후에는 또 똑같은 계급투쟁이 이루어지며, 하층은 바뀐 상층을 위해 체제 유지를 위한 고달픈 생계를 또 이어나간다는 사실. 
- <<조지 오웰 1984>>

 

 

무산계급이 된 프롤레타리아트

도시로 간 프롤레타리아는 전형적인 무산 계급이 되었다. 그들에게는 부품과도 같은 가장 단순하고, 단조로우며, 가장 쉽게 배울 수 있는 손동작이 주어져 기계의 단순한 부품과 같은 일을 맡게 된다. 

 

노동 임금이 끊기는 순간 생계를 위협 받는 그들. 갈수록 노동의 양은 여러가지 이유들로 늘어나지만 노동 임금은 딱 그네들이 생계를 유지하고 다음 노동 세대를 생산, 양육할 수 있을 만큼만으로 정해진다. 생산에 가장 큰 기여를 하지만 분배에서는 소외되는, 노동의 소외.

이러한 노동자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 (즉 노동 임금)은 그들의 생계와 종족 번식을 위해 필요한 생활 수단으로만 거의 제한된다. 한 상품의 가격, 즉 노동의 가격도 그것의 생산 비용과 같다. 따라서 임금은 노동이 혐오스러워지는 정도만큼 줄어든다. 나아가 기계 장치와 분업이 증가하는 정도만큼, 노동 시간의 증가를 통해서든 주어진 시간에 요구되는 노동의 증가 때문이든 또는 빨라진 기계 운전 대문이든 노동의 양 또한 증가한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종교적, 정치적 환상들로 은폐된 착취를 공공연하고 파렴치하며 직접적이고 무미건조한 착취로 바꾸어 놓았다.

 

 

부르지아지 시대의 특징

부르주아지 시대의 특징(자유 경쟁 하에 끊임없는 생산 변혁, 모든 사회적 상태의 부단한 동요, 영구적인 불안정과 운동)에 더해 이제 거대 자본력을 갖춘 부르주아지는 배타적인 정치 지배권까지 쟁취해 정치적 중앙집권화를 이룬다. 왜 우리의 법과 정치는 기득권의 입장만을 옹호하는 것 같았는지 알 수 있다.

현대의 국가 권력은 전체 부르주아지의 공동 사업을 권장하는 위원회에 불과하다.

 

 

끊임없는 생산은 과잉생산으로 이어졌고, 이는 주기적이고 반복적인 공황으로 이어졌는데, 부르주아지는 이 위기를 한편으로는 대량의 생산력을 어쩔 수 없이 파괴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장을 정복하고 옛 시장을 더욱 철저하게 착취함으로써, 그리고 더욱 강력하고 전면적인 공황을 준비하고 이 공황을 예방하기 위한 수단을 감소시킴으로써 극복한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맑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도시화, 공장화를 통한 산업화의 진정한 산물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고 말한다. 노동을 팔기 위해 도시로 향했던 프롤레타리아들이 단순히 연계만 된다면 항상 동일한 성격을 가지는 수많은 지역 투쟁들은 하나의 국가적 투쟁, 하나의 계급 투쟁으로 중앙 집중화되므로. 다시 말해 부르주아지는 그들이 세습귀족들에게 대항했을때 사용했던 무기들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도 건네준 셈이라는 통찰력.

 

 

또한 우리가 흔히 하는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부르주아지의 비판을 ‘공산주의를 향한 모든 비난이 실제로는 자본주의에 해당한다고’ 야무지게 반박하며 공산주의의 사유재산 폐지가 어떤 것인지 설명한다.

현대 시민의 사적 소유는 계급 대립, 다른 계급들에 대한 한 계급의 착취에 기반을 둔 생산품의 제조와 획득의 최종적인 가장 완성된 표현이다. … 따라서 자본이 사회 모든 구성원에게 속하는 공동 재산으로 변한다고 해서 개인의 재산이 사회의 재산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재산의 사회적 성격이 변할 뿐이다. 그것은 계급적 성격을 상실하는 것이다. … 공산주의는 어떤 사람에게서도 사회적 생산물을 취득할 권력을 빼앗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이 취득을 통해 타인의 노동을 자신에게 예속시키려는 권력을 빼앗는 것이다. 

 

 

선언문의 마지막에서 맑스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그 유명한 문구로 주문한다.

잃을 것은 사슬 뿐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교양서가 아닌, 뜨거운 책

재독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게 해준 책이었다. 다시 읽을 때에는 책의 얼개와 작가의 의도를 대략 알고 보게 되니 책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유지되어 좀 더 넓게 보이는 건가.

 

<<공산당 선언>>이 한국에는 일제시대에 들어왔다지만 해방 이후부터 1980년까지는 금서였다고 한다. 그 금서를 읽고 활동한 혁명가들을 파르티잔(러시아어), 빨갱이라고 탄압했고 지금까지도 우려먹고 있는 것.

 

<<공산당 선언>> 책을 통해 느껴지는 칼 맑스는 철학 사상가라기보다 혁명가 같은 이미지로 연상이 된다. 책의 내용도 한 줄로 요약하자면 ‘혁명을 일으키자!’가 아닌가. 체제를 전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폭력적 혁명을. 

 

그리고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을 선악의 대비처럼 다루는 선동적으로 느껴지는 선언문. 그러나 현실적으로 노동자들 앞에서 낭독될 선언문이기에, 혁명을 일으켜 체제를 전복해야만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의 연대가 가능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를 만들어보자고 그들을 설득하자면 당연히 선동적인 문체가 될 수 밖에 없었으리란 생각이다. 

 

 

또 어찌 생각해보면 전형적인 니체의 르상티망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부르주아지는 악하고 가진 것이 없는 프롤레타리아는 선하다는 프레임. 혁명을 해서 이루고 싶은 대다수 노동자들의 속내는 부르주아지의 사유재산을 공공재로, 즉 그들의 것을 빼앗고 싶다는 욕망을 반영한 선언문으로도 읽히기도 하지 않는가.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맑스의 공산주의에 대해 큰 오해를 하고 있음을 알았다. 칼 맑스는 본인이 맑시즘 주의자가 아니라고 표명한다. oo주의처럼 교조적이고 이론적인 철학이 아니라 현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치/경제적으로 바꿔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으므로. 그가 철학자이기 보다는 혁명가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전체주의는 맑스의 공산주의가 아니예요

유럽에서 공산주의 혁명은 맑스의 예상처럼 산업혁명이 일어나 자본주의가 극에 달했던 영국이나 후발주자들이었던 프랑스, 독일 순서로 일어나지 않았고, 의외로 여전히 세습귀족과 농노들이 대부분이었던 러시아에서 발발했다. 

 

독일에 유학중이었던 레닌은 전쟁탓에 국경이 막혀 뜻하지 않게 정부 주도의 통제된 경제, 즉 계획 경제(공산당 선언에 ‘계획경제'라는 말은 등장하지도 않는다)를 하고 있던 독일 정부의 효율성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러시아에 적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레닌 주도하에 계획경제를 실현해 보지만 배경이 달랐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행정관료였던 스탈린이 치고 들어와 시작된 전체주의가 중국이나 북한에도 영향을 미쳐 통용되는 정치 경제 체제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날 현재의 공산주의 국가의 전체주의를 맑스의 공산주의 이념이라고 오해하게 된다.

 

전체주의가 자리 잡은 소련은 공산주의 이론 발전을 게을리했고, 미국을 포함한 자유경제 체제의 우파는 이를 비판하기 손 쉬우니 굳이 오해를 풀지 않고 ‘스탈린 통치 = 맑시즘’이라고 굳혀 버린 것. 따라서 구 소련체제가 붕괴했다고 맑스의 공산주의 이론이 실패한 이론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70년대 중반에 태어난 우리 세대가 이처럼 곡해된 공산주의를 접한 건 사실 태어나면서부터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부모님 세대가 6.25를 어린 나이에 겪고, 이후 분단국가에서 서로를 공격하는 이데올로기 하에 정치, 경제, 언론 통제를 통해 자신들의 생각이 굳어지는 시기를 보내셨으니 자녀들이었던 우리도 고스란히 그 영향을 받아 실패한 구 소련의 스탈린 체제하의 공산당이나 북한, 중국, 그리고 해방후의 빨치산 활동을 공산당이라고, 공산주의 이념이라고 오해해 왔던 것.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라는 군가에 맞춰 고무줄 놀이를 했던, 명절 단골 특선 만화 <똘이장군>에 묘사된 북한이 실재한다고 믿었던 내 어릴 적 경험.

 

유럽 전체를 떠돌며 부르주아지들을 떨게 했던 유령의 정체는 착취당하던 다수의 공장 노동자들이었던 프롤레타리아들의 분노에 찬 혁명의 희망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우리가 뭉치면 너넨 끝장이야. 우린 잃을 게 없거든. 

 

그리고 맑스의 공산당 선언문은 그 잡히지 않는 유령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똑똑히 설명해 줌으로써 유럽 공산화의 기폭제가 되었고. 

 

 

나는 노동자입니다

소련의 거대한 체제 실험이 실패로 돌아갔다. 책 표지의 말대로 더이상 공산주의를 자본주의의 대체 이념으로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을테지만, 우리에게 곡해되어 심어졌던 칼 맑스의 공산주의 이념이 사실은 무엇을 외치고자 했는지 들여다 본 것은 내게는 큰 의미가 있었다. 

 

자본주의가 발전해 갈수록 심화될 인간 소외와 노동의 소외를 냉정히 지적하고, 당장 바꿀 수 있는 실행안까지 덧붙여 작성한 공산당 선언문. 역사의 결말을 모두 알고 있는 지금의 내가 읽어도 가슴이 뛰는데 당시의 희망없는 노동자들은 어땠을까. 누구도 착취 당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사회라니.

 

제 아무리 세탁을 해도 계급 투쟁의 역사는 지울 수가 없다는 엄중함을 배웠다. 왜 빨치산들은 폭력적 혁명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는지, 6.25 당시 월북했던 지식인들은 어떤 마음이었는지... 왜 해방후 나의 조국은 이념하에 그렇게 서로를 죽일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상잔의 배후가 무엇이었는지를.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소련 공산주의가 실패한 이후 브레이크 없이 전세계를 잠식해버린 자본주의 이념의 독재성이 새삼 서늘하게 느껴진다. 노동자층을 점점 더 모래알처럼 흩어 놓을 자본의 힘에 대항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단합을 SNS를 통한 네트워킹의 파급력에 의지할 수 있을까? 플랫폼 제공자가 누구인데 그런 꼴(?)을 두고 보겠는가에 생각이 미치니… 자본가들에 비교할 수도 없는 노동자들의 숫자가 무색하다. 

 

 

거리에서 시위 중인 노조 집회를 왕왕 마주치게 된다. 시끄럽게 길을 막고, 교통마비를 일으키는 이들의 집회를 백안시 하기 쉽고, 이들의 시위에 대해 정부와 미디어는 이들을 귀족 노조라며 본인들의 이익만을 위해 행패 부리는 집단인양 묘사하지만 이면을 봐야 한다. 이 또한 시위 중인 노동자들과 이를 지나치는 또 다른 노동자인 나를 갈라치기 하려는 프레임임을. 

그런 맥락으로 살펴 본다면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진정한 결과는 직접적인 성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투쟁시마다 승패와 상관 없이 자신들의 응집된 힘을 눈으로 확인함으로써 노동자들의 단결이 점점 더 확산되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남기고 싶은 문장들

그것은 자본이 없으면 곧 임금 노동 또한 더 이상 없으리라는 것이다.
교육이란 엄청난 수의 사람들에게는 기계로 양성되는 것을 뜻한다.
현재의 가족, 시민 가족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자본에, 사적 영리에, 완벽하게 발전된 형태의 가족은 오로지 부르주아지에게만 존재한다. 그러나 이를 보충해주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강요된 가족 부재와 공공 매춘이다.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
현 시대의 지배적인 이념은 항상 지배 계급의 이념일 뿐이었다.
다시 말해 노동의 비용은 마찬가지로 노동의 생산 비용과 동일하다. 그러나 노동의 생산비용은 노동자들이 노동력을 유지하고 노동자 계급이 모두 죽어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생활 수단에 근거한다. 다시 말해 노동자는 자기 노동의 대가로 이 목적에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벌지 못한다. 노동의 비용 또는 임금은 생계에 필요한 최저치 즉 미니멈인 것이다.
농노는 수입의 일부를 내지만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수입의 일부가 주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