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책읽기

삶의 불확실성을 철학의 눈으로 보는 법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 에릭 와이너>>

소라언냐 2024. 6. 24.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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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rates Express 

by 에릭 와이너 Eric Weiner, 김하현 옮김

 

작가 에릭 와이너님을 소개합니다

교보문고의 작가 소개를 인용한다.

‘스마일 상징’이 등장한 1963년에 태어났으나 우울하고 심술 많은 기질은 버리지 못한 에릭 와이너. 《뉴욕 타임스》 기자로 근무했으며, 세계적 언론이자 미국을 대표하는 공영방송 NPR(National Public Radio)의 해외특파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스탠퍼드 대학에서 나이트 저널리즘 연구원으로 활동했으며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슬레이트》, 《뉴리퍼블릭》 등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

 

이제까지 인생의 대부분을 뉴델리, 예루살렘, 도쿄 등을 근거지 삼아 30개국이 넘는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연재해, 질병, 쿠데타 등에 대한 기사를 썼다. 와이너는 현재 NPR 워싱턴 지사에 근무하며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거실과 부엌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는 생활을 하고 있으며, 밤늦게 서재에서 아내 몰래 포르노 사이트가 아니라 가방 사이트를 뒤지는 취미 덕분에 64개의 가방을 소장하고 있다. 지금의 삶은 대체로 행복한 듯하다.

 

 

삶에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말들 하죠

개인적으로 독서모임에서 추천을 받았을 때 처음 든 생각은 '또 소크라테스야?' 였다. 읽어보지도 않고 판단한 점, 미안합니다.다 읽고 난 후 이 책은 내가 서평을 남길 때 종종 들춰보는 책들 중 한 권이 됐다.

 

흔히들 쉽게 ‘삶에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왜 그렇게 말들 하는 걸까. 그리고 그 철학을 '어떻게' 나의 삶에 적용해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책의 전반을 통해 작가는 삶의 견딜 수 없는 불확실성을 철학의 눈으로 보는 방법을 본인의 삶의 경험들에 비추어 이야기 해준다. 침대를 나오고, 노트를 잃어버리고, 기차표의 대기 순위 1에서 바뀌지 않는 등등의 바뀌지 않는 상황에서 나의 시각을 확 바꾸는 법. 철학은 이토록 우리가 사는 현실에 딱 붙어 있음을. ‘철학이 설마 이런 사소한 문제까지 해결해주겠어?’라고 의심하는 삶의 소소한 문제들을.  

 

목차부터 작가의 작심이 보인다.

1부 새벽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침대에서 나오는 법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
루소처럼 걷는 법
소로처럼 보는 법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

2부 정오
에피쿠로스처럼 즐기는 법
시몬 베유처럼 관심을 기울이는 법
간디처럼 싸우는 법
공자처럼 친절을 베푸는 법
세이 쇼나곤처럼 작은 것에 감사하는 법

3부 황혼
니체처럼 후회하지 않는 법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는 법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는 법
몽테뉴처럼 죽는 법

 

14명의 철학자들

작가는 전세계와 시대를 통틀어 걸출한 14명의 철학자들을 소개한다. 익숙한 이름도 있지만 잘 몰랐던 혹은 아주 오해하고 있던 철학자도 있었다. 소로우나 세이 쇼나곤은 수필집 같은 책으로 알게 있어서 ‘이런 사람들도 공식 철학자 리스트에 있는 걸까?’ 싶은 의문도 생겼다.

 

공식 철학자는 또 뭔데? ㅎㅎㅎ 이는 나의 무의식 중에는 철학이라는 것은 내 생활과는 동떨어진 형이상학적인 무엇이라는 편견이 아직도 있다는 반증이다.

 

책을 읽고 난 후 생각은 어쩌면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삶은 항상 불확실성의 연속이고,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점. 혹시 모르겠다. 그 오랜 시간을 윤회하면서 인류가 아주 조금씩 조금씩 각성되어가는 걸까?

 

인문학 책을 읽지 않아도 나이가 들어 경험이 쌓이면 글로 옮길 수는 없어도 깨닫게 되는 무엇. 그 지혜가 차곡차곡 인류의 집단지성이 되어 지금이나만치 밝아진걸까.

 

 

동서양의 철학들이 서로에게 빚지고 있었어요

의외였던 점은 소로우, 쇼펜하우어, 시몬 베유와 간디가 동양 인도의 지혜서 <<바가바드 기타>>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었다. 간디와 소로우는 쉽게 이해가 가지만 기독교 신앙이 깊었었다는 시몬 베유와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정말 의외였다.

 

아우렐리우스야 <<명상록>>을 읽으면서 동서양 고대의 지혜는 하나였음에 이미 놀라지 않았던가. 거기에 에피쿠로스까지 동양의 불교 철학과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을 읽으면서 나는 서양 철학을 너무 오해하고 있었구나 싶은 반성이 든다. 

 

14명 중 가장 인상깊었던 철학자를 꼽으라면, 이번에는 쇼펜하우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막연히 니체 비슷한, 뭔가 읽으면 나를 불행하게 만들 것 같은 관념주의자, 염세주의 철학자로 상상하고 있었는데 읽을수록 친숙한 냄새가 난다. ‘세계는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다’ = ‘일체유심조'. 이 사람 불교에 적을 뒀던 거 아닐까? 그가 말한 의지가 나는 분리된 에고로 읽혔다(그가 유일하게 친절하게 대했던 푸들의 이름도 아트만이랬다). 세상에 태어나 분리감을 느끼는 것이 고통의 근원이므로 합일의 경지를 체험할 수 있는 예술이 구원의 한 방법이라고. 그나마도 찰나의 순간에 그치겠지만. 칸트와 더불어 관념주의 철학도 무척 궁금해진다.

 

에피쿠로스 역시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던 철학자였다. 먹고 마시고 즐기고가 최고의 선이라고 주장하는, 뭔가 좀 수준 낮은 철학같이 느껴졌었는데… 그마저도 고통의 부재가 쾌락, 즉 아타락시아라고 주장한다. 그의 감사와 수용의 철학이 이토록 오해받고 있었다니. 또 미안합니다.

 

시몬 베유는 잘 알지 못했던 철학자였는데 관심을 기울일 것을, 사랑할 것을 주장한다. 그녀가 말한 ‘가장 희소하고 순수한 형태의 너그러움'은 무주상보시, 보상을 바라지 않고 베풀라는 부처의 가르침과 또 연결되지 않는가.

가장 강렬하고 너그러운 형태의 관심에는 다른 이름이 있다. 바로 사랑이다. 관심은 사랑이다. 사랑은 관심이다. 이 두 가지는 같은 것이다. “불행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에게 관심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베유는 말한다. 

보답에 대한 기대 없이 타인에게 온전한 관심을 쏟을 때에만 우리는 이 “가장 희소하고 순수한 형태의 너그러움"을 베풀게 된다. 그렇게 때문에 부모나 연인에게서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이 그렇게나 괴로운 것이다. 우리는 관심을 거두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안다. 관심을 거두는 것은 곳 사랑을 거두는 것이다. (...)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관심을 보일 수 있는 능력은 매우 희귀하고 갖기 어려운 능력이다. 그건 거의 기적에 가깝다. 아니, 그것이 바로 기적이다.

 

간디 역시 에고의 은밀한 공격, 상대도 해치고 나도 해치는 ‘베일을 쓴 폭력'을 거두고 깨끗하게 싸우라고 격려한다. 새로운, 창의적인 싸움법과 ‘사랑’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들고 제국을 상대로 실험한 그의 용기. 우리는 분리되어 있지않다는 하나라는 믿음, 그만의 철학없이 그렇게 해낼 수 있었을까? (하지만 여전히 나는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방식이 당시 상황에서 옳았는가에는 할 말 많다. 아직도 이원론의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강력한 반증이다 ㅜ.ㅠ)

 

 

일독을 권합니다~

책을 읽고 있던 2022년 7월 17일자 뉴스에 동국대학교 철학과가 존폐 기로에 서있다는 내용이 올라왔다. 내년까지 철학과 전임교수를 미충원함으로써 폐지 수순을 밟는다고. 유서 깊은 불교 대학의, 나름 철학과로는 쳐주는 동대 철학과의 폐지. 동시에 ‘반도체 15만 양병’이라는 대통령의 계획안이 나왔다. 교수진만 구성하면 대학교 코스 승인을 쉽게 내주겠다는 골자로. 

 

철학의 부재.

우리의 눈 앞의 현실이 실재라고 철석같이 믿는 어리석음. 너와 내가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는 집단 무의식. 이를 통해 겪을 수 밖에 없는 매순간의 불확실성. 내가 먼저 치고 나가지 않으면 내가 먼저 죽게 될 것이라는 만인대 만인의 투쟁.

 

이 분리와 불확실성의 고통을 직시하고 깊이 사유했던 현인들의 지혜로운 글들은 보이는 저 너머에 단일한 것이 있으니 사랑하라고, 약한 존재를 보살피는 것이 곧 나를 돕는 거라고. 판단을 중지하고, 예민하게 감사하며, 다시! 사랑하라고 한 목소리로 격려한다.

 

철학은 철학자들의 깊은 사유의 결과물일 뿐 나의 삶과는 별 상관이 없다 느껴진다면, 명랑한 친구 같은 작가의 문체가 더없는 동질감을 일으켜주니 걱정말고 일독을 권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