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
이 책은 이렇게 만나게 됐죠
새삼 채사장의 <<지대넓얕 0>>를 읽고 받았던 충격이 떠오른다. 동서고금의 지혜들이 모두 한결같이 일원론의 세계관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충격과 감동. 하물며 노자와 예수의 가르침도 하나였다니...
약 2년 전 오강남 교수의 <<도덕경>>을 독서모임을 통해 읽게 됐다. 책을 읽는 동안 반복해 읽어도 이해가 잘 안되는 장도 있었지만, 그냥 좀 억지스런(?) 풀이라 생각하면서 넘겼던 장도 있었다.
‘무위'라는 키워드로만 알고 있던 노자. 그는 도의 상징 중 하나인 젖먹이 갓난아기처럼 피아/주객의 이분법적인 분별지를 버릴 것을, 판단중지를 거듭거듭 당부한다. 익숙한 분별의 세계를 초탈해 인식의 천이를 가지고 분별 그 너머에 살라는 것.
<<도덕경>>에는 분명하게 ‘성인’으로 칭하는 군주가 갖춰야 할 태도에 대해 여러번 언급이 돼있는데도 왜 나는 군주 입장에서 씌여진 통치 철학이라는 의심은 한 번도 하지 못하고, 개인의 삶에 대한 태도를 수양을 독려하는 책으로 이해했던 걸까.
여튼 당시에는 채사장의 책을 읽었을 때의 충격이 사실이구나라는 안도감으로 이어져 개인적으로는 더욱 기뻤던 듯 싶다.
신영복 선생님의 <<담론>>에도 한 챕터로 할애되어 소개됐던 노자. ‘상선약수’ 물의 덕을 본받았던 노자의 사상은 하방의 민중 연대와 반전 철학으로도 읽을 수 있다는 설명에 깊이 감동 받았다. 전국시대였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실명으로 하기에는 위태로웠기에 익명으로 쓴 글이었으리라고. 이래서 다들 도덕경~ 도덕경~ 하는거로군.
최진석 교수의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를 읽으면서 노자가 국가의 통치 철학이고, 장자는 반대로 자유로운 개인의 삶을 주장했던, 일견 차이가 있는 철학임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 이때만해도 나는 노자가 현묘한 도를 81장으로 이루어진 시로 적었고 (즉 글을 아는 지배계급을 상대로 글을 썼고), 장자는 그 가르침을 이어 받은 후학으로서 우화 형식의 이야기를 통해 대중들에게 더욱 익숙하게 같은 가르침을 전했다고 이해하고 있었기에 나름의 충격이라면 충격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다른 얘기를 했다고? 최진석 교수의 글은 <장자>로 좀 더 기울어 있었다. 우리는 노자에 너무 신비를 칠했던 건가... 크랙이 생겼다.
노자의 <<도덕경>>이 사실은 ‘남음이 있다'에서 출발한, 국가의 통치 철학을 다룬 책이었다는 점에 충격 받은 나를 캐치한 알고리즘의 소개로 비슷한, 아니 더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철학자 강신주를 만났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를 읽고 장자 철학으로 우리가 사회에서 겪고 있는 지난한 사건들이 설명되는 것이 명쾌하고도 슬펐다. 장자에 대해 띄엄띄엄 알지 말고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독서모임 덕분에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를 함께 읽게 됐다. 작가의 초기작 두 권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과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를 함께 묶어 새로이 출간했다고 했다. 책 두 권을 묶은 볼륨이다보니… 두껍다. 일반인들을 상대로 하는 책이 맞는지 몇번이나 확인했을 정도로 읽기 쉽지 않았지만 워낙에 급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라 챌린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도를 빼는 낙이 쏠쏠했다.
기존의 노장사상 연구를 확 뒤집는 내용이예요
지금까지 우리는 노자와 장자를 한데 묶어 ‘노장사상' 또는 ‘도가사상'이라 칭했다. 작가 강신주는 이러한 시각이 틀렸다고 주장하면서 두 철학자의, 한 사람의 철학을 따르면 나머지 한 철학자의 철학을 버릴 수 밖에 없는, 극명한 차이를 심도있게 파헤쳐 전달한다.
책의 앞부분에 실려있는 <노자>편을 읽다보면 노자가 매우 노련한 획책가처럼 느껴질 정도. 나치의 파시즘과 마찬가지로, 피통치자들이 자신들을 '작은 히틀러'라고 인식할만치 통치자와 피통치자가 혼연일치가 되어 수탈과 재분배의 메카니즘이 매우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수준. 재분배는 분명 통치자가 피통치자들의 반발을 예방하기 위해 주는 뇌물이건만 반드시 선물의 형태를 띄어야 한다고 일침한다. 그래야만 국가의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피통치자들이 자발적으로 은혜를 갚기 위해 애쓸 수 있도록. 이렇듯 피통치자들이 통치를 당하는 줄 인식도 못하게 교묘히 다스리는 국가 통치의 논리가 그가 말한 ‘현묘한 도’라고.
수탈한 부를 다시 피통치자들에게 재분배해 나눠주는 것은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뼈를 깎는 고통이겠지만, 지속적이고 원활하게 수탈하려면 재분배는 필수이다. 이것이 곧 군주의 수양이다.
헉! 소리 나도록 급진적인 주장임에도 찬찬히 따라 읽어가다보면 그만의 논리를 탄탄하게 받쳐주는, 보편적인 근거가 있는 주장임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의 논리를 바탕으로 <<도덕경>>을 다시 읽으니 일전에 오강남 교수의 풀이가 일면 억지스럽다고 느껴졌던 부분들도 매끄럽게 이해된다.
책 내용부터가 작가 자신의 선택을 분명히 보여준다. 학계의 기득권으로도 자리잡고 있었을 도가사상 철학자들에게 반기를 든 젊은 철학자가 모순을 깨닫고 자신을 활활 불태워 집필했던 책이었노라고. 학계의 지적을 논박하고자 쓴 책이었지만 되돌아보니 자신의 이후의 철학의 궤적이 싹트던 자궁이자 맹아가 이 두 권의 책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과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이었다고 술회한다.
그의 말따나 보편적인 근거가 있는 주장이고, 누구나 다양한 의견을 낼 수 있다. 하지만 쉬이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 않은 이유는 뭘까. 그의 논리가 다른 도가 사상 연구자들로부터 배척을 받는 것도 이해가 되는 것이 자신이 설명하는 노자와 장자만 맞고 기존의 노장 연구는 모두 틀렸다고 배척하는 작가의 태도가 팔할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신영복 선생님이나 오강남 교수의 도덕경 풀이를 읽으면서 무릎을 치며 감탄했던 그들의 논리와 근거들은 다 뭐였단 말인가.
본인도 노자의 글이 운문의 형태를 띄고 있고, 한자의 특성상 풀이가 다양해질 수 있어 오독하고 오해하기 쉽다고 했다. 원래 시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을 압축해 써놓은 글이라면, 각자의 논리와 근거로 풀어야 하는 것이고, 그 풀이는 다양할 수 밖에 없다 생각하는데, 나 말곤 다 틀렸다니...
목차는 다음과 같아요
책 내용을 들여다볼까요
작가에 따르면, 노자는 ‘성인’과 ‘무위'로 표현되는 군주에게 통용될 수 있는 국가 통치 철학을, 장자는 개인들을 위한 철학, 즉 타자와의 소통을 다룬 철학을 전하고 있으므로 노자와 장자의 철학은 완전히 다르며, 따라서 ‘도가사상’이라 함께 묶어 칭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미 각 권으로 출간돼있는 두 권의 책들을 한 권으로 묶어 재출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비교를 통해 이해를 훨씬 효율적으로 할 수 있으므로. 작가 역시 프롤로그에서 ‘장자를 이해하려면 노자가, 노자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장자에 대한 이해가 선결돼야 한다’고 말한다.
춘추전국 제자백가 시대의 혼란한 상황을 각각 다른 방법으로 조망한 두 철학자. 차이점을 정리해둔다.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 |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 |
비교 | 국가 통치자의 철학 >> 수탈과 재분배 >> 자본/기득권의 철학으로 이어짐 | 개인의 자유 |
실재론 = 보편자가 개체 앞에 존재 = 기본적으로 사유재산이 자연권 =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자손 앞에 존재 | 유명론 = 보편자가 개체 앞에 존재 불가능 = 기존의 사유재산 질서 파괴 가능한 혁명적 입장 | |
이미 따라야 할 단독자/유일자의 도가 있슴 | 도라는 것은 타자와 조우한 이후라야 남는 흔적과 같은 것 | |
고착된 자의식 | 임시적 자의식 (허심) | |
인칭적 자의식 | 비인칭적 자의식 | |
매개적 소통 | 무매개적 소통 | |
결정론적 사유 결과 | 발생론적 사유 결과 | |
위계가 있슴 | 위계가 없슴 | |
통치자와 피통치자가 있슴 | 통치자와 피통치자라는 위계는 꿈과 같이 허구적인 것 | |
타자가 존재할 수 없슴. 형이상학적 구조 속에서 이미 타자와의 관계가 그 깊이에 선취되었슴 | 나의 자기일관성을 깨는 존재인 타자가 있슴 | |
함이 없는 함, 미명, 무위로 통치 >> 확장된 파시즘 >> 제국으로 확장 | 타자와의 관계를 통한 주체의 변형이 도 (*신영복 <<담론>>의 노마디즘으로 이해) | |
피통치자의 열광을 유지하기 위한 부단한 재분배의 필요 >> 군주/성인의 수양 | 자의식을 탈피해(심재) 타자에 따른 임시적 자의식을 가질 것(비인칭적 소통과 인시) >> 개체적 개인의 수양. 이조차도 타자와의 소통의 필요조건일 뿐 | |
국가의 끊임없는 재분배는 자본의 끊임없는 재투자와 결이 같음 기독교의 이념과 비슷하게 읽힘 |
현상세계 일체를 허상으로 보는 불교 철학과 일면 비슷하나 싸늘히 관조하는 것과 달리 타자가 꿈 속에 있다한들 엄연히 물리적 현상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소통이 중요함을 강조 | |
영원성의 깊이. 수직적 철학 | 삶의 수평성. 수평적 철학 | |
정치적 함의: 국가와 자본이 개체에 선행 | 정치적 함의: 개체들이 국가와 자본에 선행 | |
물, 갓난 아기, 여인, 통나무 비유 | 거울 비유 | |
개의 초월의 도 | 고양이의 내재의 도 | |
한계 | 주어진 현실을 비판적으로 사유하지 못하고, 현실 유지안을 숙고했다는 아쉬움 | 타자가 갖춘 인칭성/비인칭성에 따라 변해야 하는 임시적 주체의 수동성 새로운 타자에 대한 경험과 새로운 주체 형식에 대한 전망에 침묵 |
<<담론>>에서 신영복 선생은 타자와의 교류를 통해 자기변화로까지 이어지는 노마디즘을 강조했었다. 장자 철학의 한계로 지적되었던 새로운 주체 형식의 미래 전망은 노마디즘으로 갈음된다고 여겨진다.
톨레랑스는 은폐된 패권 논리입니다. 관용과 톨레랑스는 결국 타자를 바깥에 세워두는 것입니다. 타자가 언젠가 동화되어 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강자의 여유이기는 하지만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탈주와 노마디즘은 아닙니다.
차이는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출발이어야 합니다. 차이는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의 대상이어야 하고, 학습의 교본이어야 하고, 변화의 시작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목주의입니다. 들뢰즈, 가타리의 노마디즘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 발 걸음의 완성이 아니라 한 발 걸음이라는 자각과 자기비판, 그리고 꾸준한 노력입니다.
- 신영복 <<톨레랑스에서 노마디즘으로, 담론>>
책을 마치며
독서모임을 준비하면서 순간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노자가 <<도덕경>>을 남기게 된 것은 성문 밖으로 떠나려는 노자의 모습이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황급히 그를 붙잡고 가르침을 부탁해 그 자리에서 5천여 자의 글을 남겨준 것이 <<도덕경>>이라 알고 있다.
노자는 ‘떠나려했다’는 것에 방점이 찍혔다. 일순간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노자 철학의 궁극의 이상향은 <<도덕경>>의 국가 통치 철학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외려 장자 철학과 그 결이 같았으리라 짐작해본다. 수탈과 재분배라는 국가 통치 메카니즘을 그렇게나 명확히 알고 나서도 체제 안에 살 수 있었을까? 이 모든 논리를 꿰뚫어 보고 난 노자는 체제 밖으로 떠나려 했다고 생각된다.
성문을 나서는 길에 가르침을 호소하는 이, 즉 체제 안에서 살아야만 하는 이가 안타까워 ‘차선의' 가르침을 <<도덕경>>으로 남겨 주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통치자와 피통치자 중 통치자가 수양해 성인으로서 통치하는 것이 두루 선한 일이 될테니.
이렇게 써놓고 보니 나의 인지부조화를 참지 못해 이런저런 소릴 남기는가 싶다. ㅎㅎ
개인의 자유와 타자와의 소통을 강조한 장자. 피통치자인 나의 입장에서는 장자로 기울어지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발 붙이고 사는 현실에서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구조를 없앨 수 없다면, 일면 엘리트 통치를 추구했던 것처럼 읽히는 노자의 담론 역시 현실 감각이 느껴진다. 나는 노자와 장자의 이상향은 한 곳을 보고 있었다고 믿고 싶다.
책을 한 권만 읽은 사람이 제일 무섭다고 했다. 하지만 여러 의견들이 술해된 책을 몇권 읽고 나니 이건 완전... 암전이다. 하지만 이렇게 같은 주제에 대해 다양한 논리를 펴고 있는 작가들의 책들을 둘러보자니 어쩌면 무언가로 이어질 것만 같은 기대가 있다. 이것이 어두움에서 찾아낼 수 있는 밝음인가. ㅎㅎㅎ
더듬더듬 읽어가는 여정. 송길영 작가의 글에 힘을 얻는다.
누군가에게는 원하는 대답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당장 미국 주식을 살지 말지 누가 찍어주면 좋겠다는 사람에게 몇 년 동안 책을 읽으라 하면 좋아할까요? 그러니 급한대로 ‘1000권 읽고 깨달은 것들' 같은 다이제스트 책을 읽습니다.
그러나 성취란 다이제스트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1000권을 읽는 와중에 그 노력을 통해 각성하는 거지, 1000권에 담긴 정보가 저절로 각성을 주지는 않습니다. 성취란 목표가 아니라 과정에서 얻어지는 훈장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 송길영 <<그냥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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