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책읽기

폭주하는 기차의 비상 브레이크를 함께 잡아당길 수 있기를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 강신주&지승호>>

소라언냐 2024. 2. 29.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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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제목은 Paul Valery의 <해변의 묘지>라는 시의 문장이라고 해요



이 책은 이렇게 만나게 됐죠

EBS에서 하는 방송을 찾아 본 탓인지 유튜브에 강신주 철학자의 클립들이 자꾸만 공유됐다. 하나둘씩 보다보니 작가가 궁금해졌고, 그의 최근작인 것 같은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우연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거의 동시에 채사장의 <<시민의 교양>>과 J.B. 매키넌의 <<디컨슈머>>를 읽게 됐는데, 세 권의 책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바를 가장 구체적으로 콕콕 짚어준 느낌이다. 

 

책은 지승호라는 분이 작가와 열 한번 만나 나눈 대화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답체의 글을 선호하는 편이 아닌데, 인터뷰어가 나의 눈 높이에서 쉽게 질문하고, 작가가 철학적인 설명을 자세히 해주는 형식이라 책에서 다루었던 여러 어두운 사회 사건들- 구미 3세 여아 살인 사건, 세월호 유가족, 채상병의 자살, 정인이 사건, 등등 -이  일어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더욱 깊이 있는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생각된다.  



핵진보시군요

꽤 두터운 두께의 책을 읽고 나면 작가는 진보 성향, 그것도 급진적인 성향의 작가이다. ‘이 정도면 진보가 아닐까'하는 나의 기준도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가차없다. 노자의 도가적인 사상마저 교묘하게 포장된 국가주의라는 내용으로 논문을 쓴 작가라니 수긍이 된다.

 

책의 내용 중 세월호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발생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시의 촛불 혁명에 대해 다시 짚는 내용이 인상깊다. 뭔가 우리 손으로, 대대적으로 바꿨다고 생각하지만 지배 계급의 얼굴만 바뀌었을 뿐 지배-피지배 계급 구조는 여전히 그대로 인정한 것이기 때문에 실상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다고. 세월호 사건 책임의 정점에 있는 ‘신자유주의'의 위세는 여전히 가열차므로. 혁명이라 부를 수 없다고.

 

왜 서구 선진국의 여러 미디어 매체들이 대한민국의 ‘평화적인’ 촛불 시위를 그렇게들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는지... 이면을 똑바로 보게 해준다. 

명령을 듣던 사람이 명령하는 자리에 들어올 때, 그래서 스스로 명령을 하고 스스로 명령을 듣는 정치적 ‘주체=객체'가 될 때, 민주주의는 가능하죠.



그리고 소위 ‘고전 100선’ 등으로 리스트되는 고전 목록의 프레임에 대해 알려준다. 맑스의 <<자본론>> 등 현재의 신자유체제에 대놓고 반하는 책들도 껴 있어 의아한 적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작가는 고전 100선 리스트가 이러한 뜨거운 책들을 교과서와 같이 차갑고 생명력 없는 책으로 프레임을 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반대하는 의견도 있지'라며 기득권의 여유를 보여주는 것은 덤이다.

 

또한 ‘강남좌파' ‘좋은 지주' ‘따뜻한 자본주의'라는 프레임을 신랄하게 지적한다. 핵 진보 철학자이다. 그리고, 작가는 철학자는 진보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방법을 가진 사랑과 방법을 만들어내는 사랑이 있어요. 진보는 후자여야 하고요. 새로운 방법을 창조해낼 만큼 사랑을 해야 돼요.

 

 

자본주의 억압의 구조

자본주의 체제에서 국가와 개인, 자본과 개인의 관계 즉 지배-피지배 계급 구조의 문제점을 다룬다.

 

자본 그리고 그와 결탁한 국가의 입장에서는 피지배계층이 점점 더 깨알같이 흩어지는 것이 호재라고 역설한다. 이미 남과 북으로 나뉘었는데, 좌우로 못 나눌 거 없고, 성별, 나이, 직업 등등으로 더 더 더 쪼개지 못할 바 없다.

 

전문가나 특정 스펙으로 취업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진보적이라고 해도 자신이 처한 체제에 보수적일 수 밖에 없다. 모든 것을 걸었으므로. 마찬가지로 MZ세대도 스마트폰이 외장형 심장이 되었기에 자본주의에 보수적일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특히 요즘 심각하게 대두되는 세대간의 갈등에 대해서는 자본이 노동을 착취하는 전형적인 방법이라고 말한다. 

일정 정도의 실업률과 고용불안을 유지하면 임금 상승을 억제하는 동시에 노동자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정해진 파이를 두고 세대간에 경쟁을 시키는 것인데, 갈라치기를 해두면 더욱 효과적으로 착취할 수 있으므로.

 

결국 젊은 세대는 가성세대에 갖는 불만의 원인을 잘 살펴 자본주의 체제로 돌려야 한다. 기성세대는 꼰대라고 치울 일이 아니라 단지 나와 같은 ‘노동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늙은 노동자’라는 관점이 더 타당하지 않은가. 



자본주의 문화

위에서 언급했던 세 권의 책들이 공히 지적했던 자본주의 문화. 이는 사치품이 필수품이 돼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스마트폰만 하더라도 초기에는 워낙 고가의 제품이라 사업을 하는 사람 등 소수의 사람들만이 사용하는 사치품이었으나 이제는 누구나 상시 손에서 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 됐다.

 

이와 더불어 작가는 스마트폰이 이식된 체제의 칩으로 검열된 세상만 보여준다고 말한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스마트폰을 통한 통제인데, 통제를 위한 기구를 내돈을 내고 사서 매월 통신요금까지 내고 쓰는 아이러니. 

 

내가 남긴 소비의 흔적이 플랫폼의 자본인 셈이데, 이는 궁극적으로 국가 이상의 감시와 통제로 방향을 잡을 수 있게 된다고. 데이터로 쉽게 통제 가능하고 노골적이지 않으므로 개인들은 감시 받는다는 인식 자체를 못하고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자녀의 교육도 마찬가지. 내가 부지불식간에 개인의 정보를 주면서도 핸드폰을 구입해 사용하는 것처럼, 내가 사랑으로 키우고 교육시킨 자녀가 기업의 입맛에 맞는 인력 소비재로 조달되는 구조를 꼬집는다. 그럴 바에야 왜 교육이 부모의 몫이어야 하느냐고 반문하면서.



작가는 또한 벤야민이 주목한 ‘관계자외 출입금지’라는 푯말에 대해 상기시켜 준다. 해당 푯말로 출입을 제한함으로써 생산현장에서의 이뤄지는 자본의 억압을 감추고, 이로써 개인은 소비현장에서의 자유에만 노출됨으로써 자본주의는 자유롭다는 환상을 갖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또한 개인을 실재 세계를 등한시하는 구경꾼으로 전락시킨다는 점을 지적한다. 예로, 노동자에게 고마운 마음을 쉽게 잊고 엘리베이터 내의 배송기사를 백안시하는 풍경. 살인적인 배송 업무에 시달리는 배송기사를 보고도 내가 돈을 주니 저들이 월급 받는다고 하면 답없는 수치스러운 사회라고. 로켓배송이 되려면 누군가는 먹지도 자지도 않고 기계처럼 배송해야 하는데, 이를 이용하는 우리도 착취구조에 이바지하고 있으므로.



부르주아 사회의 특징

‘이론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론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부르주아 자본주의는 가능성만은 준다. 눈 떠보니 자본주의에서 태어나 자란 나는 이 문장을 타이핑하면서도 이를 인정하면 루저가 될 것 같은 불안감이 든다. 

 

가능성은 주는 유리천장. 이 체제를 받아들이면 부르주아적 인간이 되어 내탓을 하게 되고, 프레임을 더욱 좁혀 전문가가 된다. 이제 다른 분야에는 젬병이므로 더욱 사회나 체제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지는 답보 상태가 되는데, 이것이 전문가가 많아지는 곳에 노숙자가 생기는 역설을 설명한다. 

 

자본주의는 전문가 즉, 인간적 불구가 되면 더욱 부유해진다고 유혹하지만 자신을 부품화한 후에는 더욱 보수적일수 밖에 없다. 오히려 사정은 정반대이므로.

 

우리가 사람이 자동차보다 느리거나 포클레인보다 삽질을 못한다고 열등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알파고와의 바둑 대국에서 진 건 바둑 뿐이었는데도 이를 지켜보며 경악했던 이유를 말할 수 있다. 이제 AI가 나보다 전문가가 되어 나를 곧 대체하겠구나 하는 서늘함.

 

하지만 작가는 알파고에게 진 것이 이슈가 된 이유는 역으로 모두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짚는다. 

 

 

 

이제 SORA가 등장했어요

2024년 2월 15일. ChatGPT를 출시했던 Open AI에서 한 문장을 입력하면 고퀄의 동영상을 뚝딱 구현해주는 인공지능 SORA를 발표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괴물의 털 한가닥 한가닥이 실사처럼 묘사된 해당 영상은 픽사에서 몇달에 걸쳐 작업해야 나올 수 있다는 결과물인데, 이를 1-2분 이내에 구현해냈다고 한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개인적으론 글 잘 쓰는 ChatGPT를 접했을 때보다는 충격이 덜 했는데, IT 개발자인 남편은 SORA라는 기술에 훨씬 경악하는 듯 했다. 이렇게 되리라는 예상들을 많이 들었지만 빨라도 너무 빠르다며... 마이크로소프트의 생태계까지 합쳐질테니 그때는 이렇게 저렇게 된다는 얘기는 한국말로 들었어도 하나 기억에 남지 않는 남의 나라 얘기 같았다.

 

ChatGPT의 경우에는 곧바로 일반인들에게도 무료로 상용화했지만, SORA는 아직 딥페이크 등으로 오용이 될 수 있어 OpenAI는 이를 ‘위험기술’로 분류해 오용가능성을 연구하고 있으며, 소수의 학자들과 외부 연구자 그룹에만 기술을 공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추후에 상용화 할 때에도 인공지능이 제작한 결과물이라는 워터마크를 넣을 것이라고 얘기하는 동시에 이 워터마크는 인위적 시도로 지워질 수도 있다고 했다. 이보세요, 해독제 없는 독극물을 유통할 것이란 얘기신가요?



벌써 30년 전 들었던 전산학개론이란 수업에서 What You See Is What You Get (WYSIWIG)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컴퓨터 화면에 보이는, 인간의 직관 그대로 출력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는.

 

내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다는 인간의 직관과 이를 기반으로하는 소통체계 자체가 무너지는 느낌이다. 눈앞에 뻔히 보이는 현실을 보면서도 이것이 과연 진짜일까 의심해야 하는 미래. 지금도 이렇게 쪼개진 개인들은 이제 얼마나 더 흩어질 것인가.

 

이제 누구나 내가 자유로이 쓰는 인간의 고유어로 컴퓨터 프로그래밍부터 영화 제작, 유포까지 못할 게 없어진 세상이다. 그야말로 뭐든 가능한 세상. 하지만 동시에 그 어느 것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 온다.



갈 길은 외려 더욱 선명해지는군요

나름 두터운 책을 덮고 나니 이런 저런 생각들이 많아지지만 뭔가 길이 선명해지는 느낌이 든다. 같이 읽었던 다른 두 권의 책들도 한 목소리를 내주었기 때문일까. 작가들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인문학의 주제인 사랑과 자유. 그리고 ‘등불의 패밀리'라고 칭했던, 그러했던 이들의 연대를 강조했던 작가. 

책 뒷표지의 글이 이 책을 관통하는 메시지라 생각된다.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살아내기를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며 소통하고 연대할 수 있기를

인간에 대한 사랑과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기를

 

그리하여 폭주하는 기차의 비상 브레이크를 

함께 잡아당길 수 있기를... 




‘사랑과 자유의 철학자' 강신주님을 소개합니다

강신주 철학자는 그 특유의 꽂히는 목소리와 매서운 말투로만 보자면 일면 무섭게도 보이지만 ‘사랑과 자유의 철학자'라 불린다. 책을 읽고 나면, 또는 영상을 다 보고 나면 왜 그런 애칭으로 불리는지 알게 된다. 

 

철학과 삶을 연결하며 대중과 가슴으로 소통해온 ‘사랑과 자유의 철학자'. 동서양 철학을 종횡으로 아우르며 냉철하면서도 따듯한 인문학적 통찰로 우리 삶과 시대를 관통하는 주제들에 다가가고 있다. 

 

 

1967년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했고, 석사부터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했으며 철학 박사 과정은 다시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마쳤다. 석사논문은 '나가르주나', 박사논문은 '장자'를 주제로 썼다.

그의 박사 과정 논문 및 추가 연구, 저서 등을 통해 흔히 도가 철학으로 함께 엮이는 노자와 장자의 사상이 상당히 다름을 지적하며, 특히 노자 사상의 통치규범적 면모를 지적하고, 장자 사상의 아나키즘적 측면을 재평가한 바 있다. 노자를 자연주의적, 신비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관점들에 반대하며, 노자 식의 ‘도가’적인 부드러운 통치술이야말로 교묘하게 포장된 국가주의적 논리라는 점을 강조한다.

 

 

지은 책으로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강신주의 역사철학.정치철학3: 구경꾼vs주체>><<강신주의 역사철학.정치철학1: 철학vs실천>><<철학vs철학: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강신주의 감정수업>><<강신주의 다상담><<김수영을 위하여>><<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철학이 필요한 시간>><<상처받지 않을 권리>> 등 외 다수의 책들이 있다.



남기고 싶은 문장

사랑과 자유는 왜 같은 것인지 사랑을 해보면 알아요. 사랑을 해본 사람만이 자기가 자유로운지 아닌지를 아는 거죠.
말이나 텍스트에 사로잡히면 안돼요. 우리가 철학과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텍스트와 콘텍스트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능력을 기르는 거예요. 문자로 쓰인 것만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책은 배우지 못한 어머니 아버지라는 책이고, 우리는 그것을 잘 읽어내야 해요.
유사 이래 어떤 세대는 전염병을 겪었고, 어떤 세대는 전쟁을 겪었어요. 지금 40-50대가 전쟁을 겪지 않은 거의 유일한 세대이고,이제 전염병을 한 번 겪은 거예요.
시장이 스마트폰을 통해 지역적 한계를 돌파해 편재하게 되었어요. 스마트폰을 켜는 순간, 전 세계의 모든 시장이 기다렸다는 듯 내 손 안에 펼쳐지니까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은 과거 노예제사회나 지금 자본주의사회나 마찬가지예요. 타율적 노예인가 자발적 노예인가의 차이일 뿐이죠.
‘가족'은 자본주의가 파괴했던 공동체의 가장 마지막 형태라고 할 수 있어요. 아니, 정확히 말해서 자본주의가 파괴하지 않고 남겨둔 마지막 공동체라고 할 수 있죠.
사랑이 놀라운 점은, 사랑을 준 사람한테 다 갚을 수 없다는 거예요. 갚으려고 시도는 할 수 있는데, 갚아지지가 않아요.
노동자들은 어떤 자본가에게 자기 노동력을 팔 것인지 결정할 자유밖에 없어요. 그건 자유가 아니죠.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굶어죽는 사회에서 그게 어떻게 자유예요.
세상이 좋아지리라는 막연한 희망도 버려야 해요. 또 세상은 변하지 않으리라는 비관도 버려야 하고요.
노동자를 정확하게 ‘출퇴근 노예'라고 부르잖아요. 그러면 노예는 이렇게 정의 내리면 되죠. ‘출퇴근이 불가능한 노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