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책읽기

최소한의 시민의 교양 <<시민의 교양 - 채사장>>

소라언냐 2024. 2. 22.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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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교양

지금 여기, 보통 사람들을 위한 현실 인문학

 

 

 

이책은 이렇게 만나게 됐죠

내가 좋아하는 작가 그리고 나의 독서 여정에 너무나도 큰 등불이 되어줬던 채사장님의 책. 그의 책들을 모두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시민의 교양>>을 읽지 않았다는 걸 알고 망설임 없이 도서관에서 대출해 온 책. 워낙 믿고 읽는 채사장님이니까요.



<<지대넓얕>> 시리즈를 읽었다면 매우 익숙한 포맷

책의 구성은 그의 다른 책들 <<지적인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시리즈의 구성과 이야기의 톤앤매너가 비슷해 더욱 친근하게 읽힌다. 중간중간 정리와 직관적으로 딱 와닿는 그림으로 설명하는 메모를 보자면 공부 잘하는 친구의 노트를 훔쳐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어쩜 저렇게 정리를 잘해~

 

책의 프롤로그에서 <<티벳 사자의 서>>를 들어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설명한다. <<티벳 사자의 서>>가 죽은 사람이 죽은 다음에 개인이 겪게 될 일들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안내서라면, 이 책은 현실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우리가 ‘시민'으로서 합리적인 선택과 결정을 내리는데 도움을 줄 안내서라고.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채사장님

책은 <세금>으로 시작해 <국가> <자유> <직업> <교육> <정의> <미래>라는 챕터들로 이루어지는데, 이 모든 소제목들이 모두 하나의 세계관에서 출발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세계관'이라는 것이 개인의 모든 판단의 출발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일면 소름이 끼치는 경험이기도 했다. <<지대넓얕>> 시리즈 책들을 다 읽고 덮었을 때의 딱 그 느낌이다. 책의 내용을 정리해두겠다는 욕심은 내려놓고, 인상 깊었던 내용들을 잊지 않기 위해 남겨두려고 한다.

 

 

내가 대통령이라면

채사장의 유우~머 스타일에 익숙한 독자라면 난데없이 등장하는 대통령의 등장이 놀랍지 않을 것이다. 게다 집무실 책상에서 전 직장 상사 김부장에게 갈굼을 당하는 악몽을 꾸다 깨 꿈이었음을 안도하는 대통령이라니... 우리는 대번에 그나 나나 비슷한 수준임을 직감할 수 있다. 

 

그런 대통령에게 비서실장은 빨간 버튼을 하나 전달한다. 누르면 직접세를 올리고, 누르지 않으면 간접세를 올린다는 버튼. 다 아는 내용인 듯하지만 읽으면서 따라가면 세금의 구성이 어떻게 될 수 있고, 어떤 세금을 올리면 누구에게 부담을 주는 것인지로부터 이를 통해 복지국가를 지향할 것인지 야경국가를 지향할 것인지를 가르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출발점에서부터 개입의 정도에 따라 국가와 정치체제의 형태는 달라진다. 여기까지는 <<지대넓얕1>>을 통해 익히 알고 있던 내용이다. 비슷한 내용인가 약간 실망스러운 찰나 ‘시민'이 등장한다. 지배-피지배 계급에서의 다수는 백성, 국민, 인민, 민중, 대중 등의 여러가지 단어로 서술할 수 있으나, 시민은 ‘의무를 이행하고 권리를 갖는 주체'로서 위의 단어들에서 느껴지는 이념이나 수동적인 면이 느껴지지 않는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전국을 돌다 섬에 표류하게 된 비서실장과 이후 홀연히 나타난 시민씨와의 조우하게 되는데, 시민은 비서실장과 함께 학교앞 떡볶이 노점상을 하며 책의 나머지 챕터들의 내용들에 대해 비서실장에게 지식을 전수한다.  



모든 챕터들 중 <교육> 챕터에서 현타가...

읽으면서 가장 놀라웠던 챕터는 의외로 <교육>이었다. 누구나 다 답없다는 대한민국 교육 아닌가. 다 읽고 나면 뭔가 윤곽이 잡히는 것 같고, '어쩌면 바꿀 수 있을 지도...' 하는 뭔가가 느껴진다. 

 

교육은 크게 형식과 내용으로 구분된다. 교육에 대해 논할 때 일반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라는 내용에 좀 더 무게를 두지만, 작가는 육은 ‘형식'을 통해 ‘체화’된다고 한다. 무슨 말일까?



우리는 형식을 통해 배운다

내가 무엇인가를 배운다라고 할때, 나는 직접적으로 해당 내용을 숙지하면서 배우는 방법이 있다. 또 다른 방법은 누군가가 가르쳐준 것은 아니지만, 상황과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지식이나 태도를 체득하는 방법이 있다. 

 

작가는 공리주의 철학자 벤담이 설계한 감옥 판옵티콘의 설계도를 예시로 설명한다. 원형 구조의 감옥방들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어 죄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다. 원형 건물 한가운데 높이 위치한 감시탑에는 불이 켜지지 않아 죄수들은 감독관이 감시탑에 현재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어 24시간 감시 당하고 있다고 인지하게 된다.

 

이제 죄수들은 시간표대로 자는 척, 밥 먹는 척, 기도하는 척, 청소시간에는 청소하는 등 규율을 준수하는 척하지만, 이를 반복하게 만들고, 결국 그들이 규율에 적응하게 만든다. 3년 후, 이들은 사회에 나와도 시간에 맞춰 생활하고, 청소하고, 기도하는 ‘사회질서를 준수하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학교와 감옥의 건물 구조가 감시에 적합하게 동일한 구조로 지어졌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이제 판옵티콘에서 얻을 수 있는 힌트가 있다. 학교 교육을 통해 우리가 체화하게 되는 것.

우리가 학교라는 형식에서 실제로 교육 받는 것은 ‘진리에 대한 이념'‘경쟁의 정당성에 대한 믿음'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체화한 채로 학교를 졸업한 후 사회에 나온다.



형식으로부터 받는 교육 1 - 진리에 대한 이념

진리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이 있다. 진리는 내 외부에 실재한다는 관점과 내가 스스로 내면에서 구성하는 것이라는 관점. 읽기 전엔 믿기 어려웠지만, 먹고 사는데 하등 쓸모없어 보이는 이런 생각이 교육의 형태와 방향을 결정적으로 정하는 토대가 된다는 걸 알게 된다. 



- 객관주의 인식론

고정불변의 진리가 우리 외부 어딘가에 실재한다는 관념이다. 이 관점을 토대로 하면 교육은 교사가 학생에게 진리를 주입하는 방법을 취하게 된다. 외부에 실재하는 인류의 지혜와 진리를 교사는 주도적으로 주입하고 학생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이 되어 강의하는 스타일이 된다. 그리고 학생에 대한 평가는 지식을 정확히 습득했는지를 검증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교육방법은 효율적이다.

 

교실의 구조는 칠판과 책상들로 배친된 전통적 교실 배치가 이뤄진다. 진리의 전달 방법은 유능한 강사의 입으로부터 학생들의 머리로 흘러간다. 학생들의 평가 방법은 객관식 답안을 위한 OMR 카드가 사용된다. 



- 주관주의 인식론

반대로 진리가 개인 내부에서 구성된다는 입장이다. 이 관점을 취하면 교육은 가르치기 위한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 진리를 만들어내는 것은 학생 스스로다. 따라서 교사는 학생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의 역할에 한정되고, 학생은 주체적으로 학습해 나간다. 이제 중요한 것은 학생과 교사 그리고 학생간의 관계와 대화이므로 교육은 토론의 형식을 취한다. 학생에 대한 평가는 자신이 구성한 진리를 스스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러한 교육방법은 다양성을 길러낸다.

 

교실의 구조는 대화와 토론에 적합한 원탁형으로 배치가 이뤄지며, 교사는 학생이 도움을 요청할 때에만 학생과 대화하고 토론함으로써 학생 스스로 해결방안에 도달하도록 안내한다. 학생들의 평가는 서술식 평가를 위한 원고지가 사용된다.



평가 방법이 뭐 그렇게 중요할까?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를 측정하기 위한 평가방법의 차이가 뭐 그렇게 중요할까 싶었는데, 글을 읽으면서 말그대로 현타가 왔다. 

실제로 평가의 내용이 아니라 평가의 방식 자체가 오랜 기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므로. 
특히 객관식이라는 평가의 방식에 익숙해진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진리가 실재한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객관식 평가는 몇가지 보기 중에서 정답을 찾아내는 형식이다. 이러한 형식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인가? 보기 중에 정답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을 심어준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맞다, 틀리다'의 채점 과정, 이에 따른 부모와 교사의 감정적인 반응은 학생으로 하여금 정답에 대한 환상을 강화하게 한다. 세상에는 맞는 것이 있고, 틀린 것이 있다. 결국 12년 동안 객관식 평가에 노출된 개인은, 진리는 실재하는 것이며 세상은 옳음과 그름으로 판단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세계관을 뿌리 깊게 내재화한다. 이러한 효과는 정답을 잘 맞혀서 성적이 좋은 학생이나, 반대로 정답을 맞히지 못해 성적이 나쁜 학생이나 구분하지 않고 작동한다.

 

반대로 서술형 시험을 생각해보면, 질문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하나의 글로 서술하는 형식이다. 단순히 정답을 맞혔는지가 아니라, 평가자를 설득하고 납득시키는 과정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러한 형식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인가? 진리로서의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심어준다. 세계에 고정되고 불변하는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에서 발생하는 대립과 갈등은 ‘맞거나, 틀리거나'의 문제도, 선과 악의 문제도 아니다. 사회 문제의 본질은 이익의 대립에서 발생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서로가 얻고자 하는 이익과 감수할 수 있는 손해를 조율하는 과정이다.



내가, 아니 한국사람들이 왜 그리 토론에 약했는지 알게 됐네요

호주에서 공부할 때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수업 중간중간 불시에 이루어졌던 그룹 토론과 강사의 질문에 대한 발표였다.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 학생들이 고충을 느꼈던 수업 방식이었는데, 영어가 서툴러서 그랬던가 짚고 넘기기에는 뭔가 억울하다. 다른 호주 학생들의 발표를 듣자면 영어로 말은 잘하는 것 같지만 주제와 동떨어진 엉뚱한 얘기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 했으므로. 그걸 진지하게 듣는 애들도 신기했고…

 

그 이유가 한국에서 대학까지 졸업하는 동안 우리가 받아 왔던 교육의 형식때문이었다니 퍼즐이 풀린 느낌이다. 

‘객관주의 인식론’에서 출발해 강의를 통해 수업 받고, 사지선다 시험으로 평가 받았으며, 전국모의고사를 통해 전국 학생들을 점수에 따라 줄세워 결과를 확인 받는 방식. 토론은 커녕 수업시간의 질문도 분위기 깨는 행동으로 여겨져 삼갔을 정도.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함부로 입을 열면 안돼. 틀리면 안되잖아. 누군가 나에 비해서 더 확실하고 사회적으로 승인된 진리를 알고 있는 존재가 있을 거야.’ 그리하여 우리는 개인적인 문제에 봉착하거나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전문가를 찾는다. 정답을 아는 사람이 있을테니까.



옳고 그름으로 분별하기 쉽죠

수업시간 토론시 나는 쉽게 흥분하는 학생이었던 것 같다. 다른 학생이 나의 의견에 대한 반론을 말하면 내 의견과 ‘다른' 의견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가 ‘틀렸다'고 지적한다고 받아 들였으니.

 

나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어른들 간에 이익이 충돌하면, 옳고 그름을 기준으로 논쟁하기 쉽다. 그리고 보통은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우선은 상대방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나의 세계를 선으로, 타자의 세계를 악으로 상정하는 세계관으로 발전하기 아주 용이하겠다. 

 

그리고 다양성에 대한 담론이 편치않다. 이익이 충돌할 때 시작도 하기 전부터 그 길고 지루한 조율과 설득의 과정을 인내할 생각에 벌써 피로해진다.



형식으로부터 받는 교육 2 - ‘경쟁이 정당하다'는 환상

위의 객관론적 인식론을 기반으로 교육을 받아온 학생들은 지속적인 평가를 통해 개개인간의 경쟁이라면 언제나 정당하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그것이 실제로는 사회의 부조리로 발생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경쟁이라는 형식은 이러한 문제의 책임을 사회에서 개인으로 전환한다.

 

작가는 왜 다들 ‘인서울 대학'을 고집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제시된 통계수치들를 확인하며 따라가다보면 결론은 민족성이 교육열이 높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한국 성인 남녀의 소득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실제로 매우 낮기 때문에 교육에서 이런 인식이 확립된 것이라는 것.

 

책이 출판된 2015년 당시 상위 10%의 소득 평균이 월 330만원이었고, 50%의 평균 소득은 90만원이었다. 왜 교육현장의 암묵적 인식이 중간인 5등급의 학생으로 초점이 맞춰진게 아니라 상위 8%의 인서울 대학 입학이 가능한 학생들로 맞춰졌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대략 국민의 10% 정도에 해당하는 사람들만이 그나마 안정된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니 말이다. 생각보다 집단의 지성은 엄밀하다. 피부로 느껴지는, 상위 10% 안에 들어야 먹고 살만하다는 경제적 현실이 교육에서의 평가에 어느 정도 투영됐다고 봐야 한다는 작가의 말은 타당하게 들린다.    

 

문제는 위에서 보았던 형식의 교육을 받은 탓에 평균에 해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오늘날의 인식을 우리가 부당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는데 있다. 

성적이 5등급인 학생은 자신이 공부를 못한다고 부끄러워하고, 월 90만원의 중위소득을 얻는 성인은 자신의 무능을 부끄러워한다. 평균적인 성적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고, 평균적인 소득으로도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사회가 정상임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은 사회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는다. 

왜냐하면 경쟁이라는 형식을 거쳤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정한 경쟁이라면 그 결과는 정당하다고 믿는다. 경쟁 자체는 정당한데, 자신이 무능해서 경쟁에서 실패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사회적 위선이다. … 어떠한 평가가 되었건 그에 따른 결과가 중간에 위치한 사람이 중간으로서 대우를 받을 수 없는 평가라면, 그 경쟁은 정의롭지 않다.

 

 

개인적으로 호주와 비교해도

호주에서 생활하면서 곁에서 지켜본 학생들의 생활은 한국의 학생들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공부 안하는 애들에게 농담삼아 ‘우리 00이 공부를 안한다니 가족 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눈물 쏙 나게 한 번 한국 학교 다니게 해줘야지’하면 질겁을 할 정도로 K-학업의 강도는 소문이 났다. 교민사회라고 해서 형편이 다른 눈치는 아니다. 사립학교는 학비 부담이 크니 공립학교 아니면 셀렉티브 스쿨의 옵션이 있는데, 대학 진학율은 셀렉티브가 담보하고 있으니 아이가 공부 좀 한다면 이왕이면 셀렉티브 스쿨에 보내려고 애쓴다. 

 

하지만, 공부에 관심이 없는 애를 한국처럼 들볶지는 않는 것 같다. 고등학교 10학년(한국 고1)까지만 다니면 12학년(고3)까지 다니지 않아도 졸업하고 TAFE라는 국립학교에서 기술을 배울 수 있다. 경력을 쌓고 나면 한국인들은 성실하고 꼼꼼하게 일을 잘한다는 평을 받는 편이므로 자신의 비지니스를 해서 잘 살 수 있다. 이런 분위기이다 보니 전기, 용접, 요리, 제빵 등 기술 직종에 종사하면 몸은 힘들지만 에지간한 사무직보다 급여나 수입이 훨~씬 나은 경우가 많고, 이는 사회적 대우로도 이어진다. 

 

반면 노동자의 해고는 한국보다 훨씬 유연해 출근길에 해고 전화로 통보 받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일자리의 수가 안정돼있는 편이라 재취업이 용이한 편이며, 구직기간 동안 센터링크를 통한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두 나라에서 생활해 본 경험을 비춰본다면 작가의 지적은 타당해보인다. 어느 부모라고 아이를 공부로만 닥달해 갈등을 빚고 싶을까. 힘들게 번 돈을 사교육비로 다 지출하고 싶을까. 하지만 경쟁이 정당하다는 형식의 교육을 거친 부모나 자녀들은 우리 교육이 사회적인 부조리로부터 생긴 구조적 문제라고 짚기 보다는 자신들의 무능을 탓하는 것 같아 맘 아프다. 



최소한의 시민의 교양을 말하는 책

결론적으로 이 책은 ‘시민'이 갖춰야 할 교양에 대한 책이다. <교육> 챕터에 꽂혀 글이 길어졌지만, 책을 마치고 나면 시민이 어떻게 탄생했으며, 역사의 필연적 귀결임을, 그리고 시민이 자유 그 자체임을 이해하게 된다. 

시민에게는 의무가 있다. 나의 이익을 추구하는 동시에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고 사회의 이익을 고려해야 할 책임 말이다. 물론 모든 구체적인 사회적 쟁점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세계에 대한 거시적인 관점을 토대로 개별사안을 단순하게 분류할 수 있어야 한다. … 시민들 스스로가 개별 쟁점에 대한 방향성을 이해하고 분류할 수 있을 때, 사회적 담론들은 합리적이고 건강하게 논의되어갈 것이다. 세계에 대한 단순한 구분. 이것이 시민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교양이다.



남기고 싶은 문장들 

가난한 이들은 내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보수적으로 변한다. - 베블런 <<유한계급론>>
노동의 신성함에 대한 강조는 사회구성원들이 평등한 관계를 유지할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 그렇지 못한 노동자가 있고, 이로 인해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며. 그래서 노동의 대가로 최소한의 삶만을 겨우 유지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면, 그 사회에서 노동의 신성함을 이야기하는 것만큼 비열한 행위는 없습니다.
수익률과 레버리지에 대해서 이해해야한다. 이를 활용해 내가 실제로 투자를 진행하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다. 더 중요하게는 자본주의 이념의 한계를 직시하기 위해서다. 어떤 과정에서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는지, 어떤 원리로 자본이 스스로를 증식하는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개인의 부가 노력을 통해 축적되는 것이라는 자본주의 이념이 왜 허구적인지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최근의 노동의 유연화가 문제가 된다. 임금노동자가 그나마 다른 직업군에 비해서 만족스러울 수 있는 것은 오직 리스크의 회피 때문이다. 성취와 보람 그리고 수익으로부터 배제되는 대신 안정을 선택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박탈당하게 된 것이 노동시장의 유연화라고 할 수 있다. 
비정규직 확대의 본질은 투자가와 사업가가 져야 할 리스크를 다수의 노동자에게 전가한다는 것이다. 물론 세계적인 불황과 저성장이 기업의 불확실성을 증가시켰고, 이에 따라 자본가는 기업의 유지를 위해 증가한 리스크를 분산시켜야만 하는 상황을 맞았다. 하지만 이러한 환경적 요인에서 어쩔 수 없이 노동자에게 리스크를 분산시켜야 한다면, 리스크가 증가되는 만큼 노동자의 임금도 증가해야 한다. 그런 까닭에 비정규직 확대에 대한 논의는 문제가 있다. 노동자의 임금을 낮추는 동시에 리스크까지 높이는 제도는 불공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