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책읽기

색을 지우고 사람을 보라 <<아버지의 해방일지 - 정지아>>

소라언냐 2024. 2. 16.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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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책 표지 참 팬시하죠? : )



  밀란 쿤데라는 불멸을 꿈꾸는 것이
예술의 숙명이라고 했지만

내 아버지에게는 소멸을 담담하게 긍정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었고,

개인의 불멸이 아닌 역사의 진보가
소멸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무기였다.



 

작가 정지아님을 소개합니다

책 표지의 작가 사진은 쪼꼼 땐땐(?)해 보이는 중년의 여성. 작가 정지아는 전혀 모르고 있던 여성작가였다. 나무위키에는 아래와 같이 소개되어 있다.

 

1965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문예 창작과를 나와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0년 <<빨치산의 딸>>이라는 장편 소설로 데뷔했다. 2006년 <<풍경>>으로 제 7회 이효석문학상, 2008년 <<봄빛>>으로 제 14회 한무숙문학상, 2020년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로 제 14회 김유정문학상을 받는 등 다양한 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데뷔작 <<빨치산의 딸>>은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빨치산의 딸은 실제 자신이고, 아버지는 전남도당 조직부장 정운창, 어머니는 남부군 정치지도원 이옥남이다. 이적표현물로 지정되어 판매금지 10년을 받고 2005년 재출간됐다.



전직 빨치산이었던 아버지

전직 빨치산이라는 흔치 않은 이력을 가졌던 아버지.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부친의 삼일장 동안 조문과 도움을 주기 위해 드나들던 사람들과 고인이 된 아버지와의 일화들을 소개하며 아버지의 삶을 반추하는 내용이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몰랐던 아버지의 삶을 조우하는 딸.

 

신념에 청춘을 걸었던, 덕분에 자신과 사촌들의 발까지 묶어놓았던 빨치산 아버지가 아니라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 이어진 인간 관계들을 시종일관 제 3자의 관찰로 담담히 전해주는 에피소드들이 웃기고 슬프고 진지하고 사람냄새 났다. 

 

 

해방 후 이승만을 주축으로 남한 단선을 강행했을때 발생했던 여순사건과 제주4.3 사건. 당시는 이데올로기가 모든 이들의 삶을 통채로 휘감았던 시절이었다. 우리편 아니면 빨갱이. 철저한 타자화의 시대. 그런 때 일수록 개인의 색깔은 선명해져야만 한다. 회색은 없다. 자의든 타의든.  

 

<<태백산맥>>이 해방 전후 땅을 매개로 지주와 소작농과의 첨예했던 대립이 이데올로기의 옷을 입은 투쟁으로 연결되는 상황을 그렸다면,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이념 투쟁 그 이후 미국과 중국에 의해 남북한이 갈라진 후, 설 곳 없어진 남한 내의 잔류 빨치산들과 그 가족들의 현재까지의 삶을 보여준다.  

 

 

나는 왜 빨치산이 없어졌다고 생각했을까

책을 읽으면서 나 자신에게 좀 어이없다 싶었던 건, 어쩌면 나는 그리 순진하게 빨치산들이 이제는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가 하는 점이었다. 돌이켜보면 중고등학교 때에도 연좌제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 줄도 알고 있었고, 공기업이 아닌, 대기업 입사 준비를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종종 최종 신원조회에서 떨어졌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도 같다.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는 있으나 그런 처우를 받는 사람들이 실재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던 것.

 

그런 의미에서 ‘전직 빨치산’이었다는 아버지의 타이틀은 신선했다. 게다 전남도당의 중책이었던 아버지와 남부군의 일원이었던 어머니. 그들의 활동 무대였던 백아산과 지리산의 글자를 따 지은 딸의 이름 ‘아리’. 빨간색으로 칠한 후에는 절대 볼 수 없었던 그들, 특히 아버지의 삶의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출소후 전장이었던 구례로 돌아오다

일생 중 몇년간 자신의 신념을 따라 살았다는 죄로 20년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나온 아버지는 자신의 전장이기도 했던 고향 구례로 돌아와 <<새농민>>월간을 읽으며 농사를 글로 배우며 지으며 산다. 다들 손가락질하는 고향으로 왜 돌아왔느냐는 딸에게 말한다. 사람이 인심만 잃지 않았다면 어떤 경우에라도 살 수 있는 것이라며. 

 

아버지의 관계 맺기는 시종일관 일관성이 있다. 민중의 삶을 글로만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이해하는 것. 하루 밤 신세졌던 방물장수의 도둑질 에피소드로 시작되는 아버지의 인간 관계는 보증 선 것이 잘못되는 등 뒤통수를 맞는 일이 대부분이나 결론은 한결 같다. 아버지의 십팔번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면서 민중이 그러한 상황에 처하지 않게 하는 것이 사람이 할 도리라 믿었던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에 비하자면 현실주의자이지만, 젊은 시절 지리산에서 목숨 걸었던 것이 민중이었슴을 상기시켜주면 빠르게 환기되던 어머니.



빨간 색을 지우면 자연스러웠던 인간관계

아버지를 삼촌처럼 대했다는 장례식장 황사장과 동네머슴 박동식씨. 평생 조선일보 구독자이면서 교련교사로 은퇴한 박선생. 그 외에도 베트남 참전자였던 노인, 순경이었다가 퇴직한 아들 같았던 김상욱과 윤학수, 그리고 베트남 어머니를 둔 자퇴 여고생, 아버지를 작은 아버지로 둔 덕분에 육사 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사촌 오빠 길수와 형이 빨갱이 짓을 해서 부친이 사망하고 자신도 망가졌다고 형 탓을 하는 작은 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부모의 전처와 전남편의 가족들의 족보 꼬인 문상. 그 외에도 아버지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던 주변 인물들이 소개된다.

 

책은 블랙코메디 같이 웃겼다 울렸다 하지만 굵직한 메시지는 ‘사람을 보라'라고 읽힌다. 덧칠된 색깔을 지우고 그 사람 본연을 들여다 보라. 기실 아버지는 빨갱이도, 투사도 아닌 그저 자신의 신념대로 살다 간 평범한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 고작 4년여 동안 자신의 신념대로 산 경험으로 한 사람을 재단해 평생 죗값을 치르게 한 나라. 한반도의 정세와 사회가 그에게 빨간 칠을 하고 평생 칠 값을 요구했던 것. 그것도 본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자식들과 사촌 조카들까지 같이 빨간 물에 담그고 나오지 못하게 했던 대한민국. 지금도 국민의 대리인이라는 정치인들의 입을 통해 버젓이 소환되는 빨갱이.

 

소설 중간 중간 주변 사람들의 아버지에 대한 평이 자주 나온다. 동네 사람들은 아버지 말이라면 콩으로 팥죽을 쑨다고 해도 그렇다고 믿었다고. 생전의 아버지가 천상 유물론자에 혁명전사의 모습이었다면 고인이 된 아버지는 그저 동네의 똑똑한 인플루언서였던 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로부터 도움을 받은 이들이 은혜 갚는 일은 가뭄의 콩나듯 했지만 어려운 일을 당하면 노냥 상의할 사람은 또 아버지였다. 하다못해 동네사람 딸의 겨드랑이 암내 수술까지도 함께 상의할 수 있었던... 그러면서도 하동댁 궁둥이를 두들기는 모습에 삐져 화내던 어린 딸 앞에서 서늘했다던, 그냥 아버지였다.

 

 

작가는 작정하고 재밌게 썼다 했어요

소설은 중반부까지는 매우 재미있게 읽혔다. 역시 도서관 대출이 어려운 책은 다르구만 하면서 신나게 읽었는데, 뒷부분으로 가면서는 예상 가능한 아버지의 미담에 좀 지겨워지는 감도 있었다. 너무 순한 맛 아냐? 그래도 전직 빨치산 얘긴데... 하지만 작가는 작심하고 웃기게 쓰려고 했다고 했다. 책 표지 또한 빨갱이의 빨도 생각 안나게 완전 팬시한 디자인으로 골랐노라고. 후일담으로 전하는 작가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의 동지들 중에는 좀 불쾌해하셨던 분들도 있었다고 한다. 빨치산들을 너무 희화한 것 아니냐며.

 

작가는 말한다. 자신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사람답게 살아온 자신의 부모가 빨치산에 가담했던 적이 있었다는 것 때문에 자신까지 그렇게 손가락질 해도 되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자신의 아버지는 자신의 신념대로 강직하게 한 생을 살다 마치고 간 사람이라고. 빨갱이의 진짜 삶이 어땠는지 보여주겠다고. 판을 깔아줄테니 그래도 씹으려면 씹어보라고.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는 와닿기 어렵다. 작가가 읽는 이들을 위해 이렇게 저렇게 치워 보여주지 않았다면, 그런 존재들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모를 수 있으니. 그런 역사가 있었음을 아예 모를 수 있으니. 지금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대로 살고 있기는 한가? 나의 개인으로서의 신념이라는 것 자체를 숙고해본 적이 있기는 할까? 

 

 

나의 해방일지를 쓸 차례

서울을 다녀오면서 들른 구례의 너른 들판과 다정하게 둘러싼 산들은 이제 가혹했던 겨울의 추운 날들을 지나고 조금씩 희뿌연 새 봄의 색이 들기 시작했다. 읽었던 책 속의 사람들이 어딘가를 거닐고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게 하는 몽환적인 풍경. 이 곳에서라면 나의 믿는 바대로 살 수 있지 않을까.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은 어느 근육이든 긴장한 상태인 모양이었다. 세상사의 고통이 근육의 긴장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죽음이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아버지는 보통 사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 해방의 기쁨 또한 그만큼 크지 않았을까, 다시는 눈 뜰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