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책읽기

기억의 힘 <<종이 동물원 - 켄 리우>>

소라언냐 2024. 3. 19.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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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동물원

 

by Ken Liu, 장성주 옮김

 

 

독서모임의 추천을 통해 만나게 됐죠

SF나 판타지 장르의 소설이나 영화 모두 즐겨보지 않는 나에게 독서모임의 추천이 없었다면 영원히 몰랐을 작가의 단편 소설들이다. 이래서 독서 모임이 중요하다 : )

 

<종이 동물원>을 포함해 총 14편의 단편들로 묶여져 볼륨이 꽤 되는 책이지만 소설들이 짤막짤막하게 수록돼있어 흡입력 있게 잘 읽혔던 책.

 

 

<종이 동물원 - The paper menagerie and other stories> 

<종이 동물원>은 다 읽고 나면 성경의 ‘돌아온 탕자' 이야기가 떠오를 만치 뻔한 스토리라 할 수도 있겠지만... 다 읽고 나면 눈물이 난다. 이걸 SF(Science Fiction)나 판타지 소설로 분류해도 될까?

 

엄마가 접어 만들고 숨결을 불어 넣어주면 생명력을 가지고 돌아다니던 종이 동물들에 대한 기억을, 그 아들은 어른이 된 이후 반추해보면서 어쩌면 종이접기 동물들이 살아 움직여 자신의 친구들이 돼주었다고 믿었던 건 아이의 상상력이 아니었을까라고 짚어보기도 한다.

 

그렇게 치자면 이는 SF도, 판타지도 아닌, 정말 보편적인 스토리이다. 엄마와 아들 서로가 하나였던 유년기를 지나 아들이 사춘기를 지나면서, 어쩌면 그도 역시 유색인종으로서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해, 엄마로부터의 분리를 위해 그토록 발버둥쳤을 지도.

 

그렇지만 돌고 돌아 미국의 관광지의 길거리에서, 낯선 중국 여자의 도움으로 듣게 된, 그토록 외면하고 싶었던 엄마 인생의 이야기. 자신이 엄마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얼마나 엄마의 큰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이었는지... 아들은 방황을 멈추고 태고의 본향으로 돌아갔을까.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 - A brief history of the Transpacific tunnel>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는 대권 항로를 따라 해저 바로 아래로 아시아와 북아메리카를 연결하는 터널로 지상 터미널은 상하이, 도쿄, 시애틀에 있다. 너무나 그럴듯한 묘사 탓에 실제로 태평양을 횡단하는 터널을 건설한 역사가 있었는데 내가 전혀 모르고 있었는지 스스로를 의심해봤을 정도.

 

주인공 ‘나'는 1913년 타이완의 신치쿠라는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빈농의 아들이다. 열일곱이 되던 해 아들이 있는 집들을 방문해 큰돈을 벌게해주겠다는 사람들을 따라 태평양 횡단 터널 공사의 광부가 되어 일한다.

 

폐를 찌르는 뜨겁고 습한 흙먼지를 들이마시며 오랜 세원 고된 노동을 함께 했던 동료들은 대부분 내장과 관절에 병을 얻어 떠나고 마흔 여덟의 그는 이제 퇴물 광부가 되었다. 터널 내의 미드포인트라는 지역의 라멘 집에서 일하는 미국인 베티와 사귀면서 터널 작업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한다.

 

베티의 전남편은 변호사였는데 남아프리에서 일하다 그가 변호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자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미국에 있는 아들은 현재 흑인을 포함한 친구들과 함께 버스로 남부지역을 여행하고 있다고 소식을 전한다.

 

법에는 니그로와 백인이 같은 버스를 탈 수 있다고 하지만 태반이 지키지 않는 법이라는게 누구나 다 아는 비밀이라고. 아들과 친구들은 그걸 바꾸고자 함께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성명을 발표한다고 했다. 사람들이 그 ‘비밀'에 관심을 갖도록. 사람들이 화가 나서 몰려들면 폭력 사태가 벌어져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이 무슨 바보 같은 소리인가. 아무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성명을 발표하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더 나은 상황에서 소리 높여 말하다니. 버스를 탄 애들 몇 명이 뭘 바꿀 수 있다고?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거나 마음을 고쳐먹는 사람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상관 없어. 나한테는 내 아들이 입을 다물지 않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 비밀은 그 애 덕분에 조금이나마 지키기 힘들어졌으니까. 그건 의미있는 일이야.”

<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 >

 

대공황의 경제난을 타개할 아이디어. 패전으로 역시 경제가 엉망이었던 일본이 미국에게 태평양 횡단 터널 공사를 제안한다. 이 프로젝트는 정치적 셈을 마친 영국도 동조해 시작된다. 하지만 여기에 동원된 노동력은 주인공 ‘나'와 같은 가난한 자들의 아들들이었는데, 그나마도 부족해지자 전쟁 포로들을 끌고 와 부역시킨다. 그야말로 죽어야 끝날 수 있는 노역. 언론을 통해 외부로 강제노역이 전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총을 든 군인들이 현장에 상주해 지킨다.

 

터널 내 누수 사고를 통해 사슬에 묶여 노역하던 포로들이 실은 만주에서 생포된 중국인 공비가 아니라 자신과 똑같은 모어를 쓰는, 타이완 포모사에서 끌려온 잡범이었을 뿐이었다는 점에 충격에 빠지지만, ‘나’는 분대장의 포로들의 봉기 사고라고 작성된 허위 사고 보고서에 작업반장으로서 서명을 한다. 하지만 그 얼굴은 잊혀지지 않고 트라우마로 남게 된다. 

 

‘나'는 베티와 함께 미드포인트 광장에 있는 동판의 내 이름 한자를 정으로 깎아낸 후 추모하는 마음으로 희생자들의 고통과 죽음을 상징하는 조각을 남긴다.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 The man who ended history>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은 작가가 밝혔듯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에서 영감을 얻어 다큐멘터리 형식의 이야기를 쓰기로 마음 먹고 쓴 작품이라고. 언급된 테드 창의 단편의 포맷이 읽었기 때문인지 켄 리우의 이 단편이 익숙하게 읽혔고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줬던 것 같다.

 

에번과 기리노 박사 부부는 뵘기리노 입자쌍을 통한 양자 얽힘 상태를 이용해 아무리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거리에 있어도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착안, 파동함수의 진동을 관찰하면 몇 광년이나 떨어진, 즉 먼 과거에 있는 입자도 이곳, 현재에서 관찰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표한다. 하지만 관찰 후에는 영원히 그 장면은 복원이 불가능하다.

 

‘아시아의 아우슈비츠'라고도 불리는 하얼빈시 핑팡 지구. 이곳은 일본 육군 731부대에서 수많은 중국인과 연합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했던 생화학 생체 실험 장소. 종전이 가까워지자 일본군은 철수 준비를 하면서 남아 있던 포로들을 모두 살해하고 시설들을 불태워 증거를 지워버린다.

 

끌려간 가족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전후에도 알 길이 없던 유가족들이 과거로 돌아가 생체 실험 현장을 목격한 바를 증언한다. 사회적 파장이 일고 일부 지도층들은 과거는 잊고 앞으로 전진하자는 메시지를, 어떤 이들은 기억을 파헤쳐봐야 달라지는 것도 없다고, 기독교인으로서 용서를 주장하는 사람, 또 어떤 이들은 그냥 관종들이니 관심을 끄자는, 없었던 과거인 양 발언한다. 

 

가상임을 뻔히 알면서도 가장 화가 났던 부분은 일본은 이미 사과를 했다는 일본 대사의 인터뷰 장면이었는데, 작가는 웨이 박사의 목소리를 통해 정확히 짚는다.

대사님께서 인용하신 담화문은 거대하고 추상적인 이야기로서, 모호하고 비명시적인 고통해 관해 말합니다. 사과라고 하기에는 물타기를 해도 너무 심하게 한 것입니다. 대사님께서 말씀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는데요, 바로 수많은 개별 전쟁 범죄를 인정하는 것과 실제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것을 일본 정부가 지속적으로 거부한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대사님께서 인용하신 것 같은 담화문이 발표될 때마다, 일본에서는 바로 얼마 후에 유력 정치인이 2차 대전 중에 일어난 사건의 진실성에 근거 없는 의혹을 제기하는 성명을 발표하곤 합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마치 두 얼굴의 야누스처럼 이야기하는 일본 정부의 이런 쇼에 익숙해졌습니다.

<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

 

끔찍한 묘사들 탓에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힘들었을 때, 마침 우연히 매불쇼라는 유튜브 채널의 박구용 교수님의 철학 코너를 보게 됐다. 그날의 주제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었는데 이 책의 내용과 큰 울림이 있어 정리해둔다.

 

그는 비판적 사고와 기능적 사고를 대비시켜 설명했다. 나치 부역자 아이히만의 논리는 자신은 나치 정부의 일개 공무원이었고, 공무원으로서 주어진 임무에 충실했을 뿐이었다는 것.

 

하지만 박교수는 그의 사고는 유태인들을 효과적으로 ‘최종처리’하는 방법을 기능적으로 했을 뿐 자신이 명을 따를 때에 발생할 일들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 상관의 명이 인권에 반함을 알고도 수행한다면 군인이라도 비판 받아야 한다고 일갈한다.

 

 

731부대에서 생체 실험을 마다하지 않았던 의사들. 군의관이었던 야마가타의 인터뷰도 기억에 남는다. 전후 중국 공산당은 자격있는 군의관이 별로 없어 일본 군의관들의 기술이 절실했기에 그들에게 관대한 처우를 했다고 했다. 소년 보초병이 음식도 배려해 더 좋은 음식을 주었을 정도로.

 

보초병들과 매일 들었던 마오쩌둥주의와 공산주의 수업에서는 말했다. 천황과 군부의 우두머리에게 속아서 중국 인민을 억압하고 침탈하는 전쟁에 참가한 일개 군인일 뿐이므로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면 중국인이든 일본인이든 무산계급은 모두 형제라고.

 

자신이 생체실험을 했을 때 보조를 했던 중국인 여성을 만난 사건 이후 야마가타는 자신이 그간 행해온 일들이 다 무엇이었는지 절감하게 됐다고 비탄에 빠진다. 자백서에 훌륭한 외과의사가 되겠다는 욕심에 눈 멀어 인간이라면 하지 말았어야 했던 일들을 써냈고, 징역형을 살고, 석방 후 일본으로 귀환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돌아온다.

일본에 돌아온 저는 막막했습니다. 일본에서는 모두가 너무나 부지런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뭘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자백 같은 건 하지 말았어야지.’ 예전에 같은 부대에 있던 친구는 제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난 자백을 안 해서 벌써 몇년 전에 석방됐어. 지금은 번듯한 데서 일해. 내 아들도 의사가 될 거야. 전쟁 중에 일어났던 일 같은 건 입 밖에 내지도 마.’

<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

 

‘기억의 힘’을 내세우는 이야기들

켄 리우는 ‘이거 꾸며낸 이야기인거 알지?’하고 나를 방심하게 했다가 여지없는 역사로 끌고 간 작가다.

 

열강들의 대상이었던 아시아. 그리고 어렴풋이 알고는 있으나 끔찍한 만행의 기록을 대할 자신이 없어 외면하던 진실. 소설이라는 포장이 아니었다면 731부대의 생체 실험이나 양주 대학살 등의 역사물을 내가 집어들 수 있었을까. 서평을 쓰기 위해 대략 재독을 하는 데도 상상되는 이미지가 너무나 잔혹해 두번을 들여다 볼 엄두가 안나는 내용을 말이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계속 머릿속에 남는 단어는 ‘기억’이었다. 베티의 아들의 버스 여행 시위처럼 당장은 아무에게도, 아무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할지라도 기억하는 것. 중국계 작가가 쓴, 중국의 역사가 대부분 반영된 소설들이지만, 같은 아시아인의 기억의 공유가 반갑고 힘이 된다. 이 책이 널리 읽혀야겠다. 덕분에 비밀이 조금이나마 지키기 힘들어지도록.

 

 

SF인가, 판타지인가, 역사 기록물인가

작가는 기억하려 애쓰지 않고, 자국의 이익을 정치적으로 셈해 접근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모든 이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그러한 무심한 평범함이 초래했던 거악의 역사가 존재했음을, 또 다시 반복될 수 있음을. 이야기의 힘을 빌어 진실을 전달한다. 이야기와 노래는 힘이 세니까. 프롤로그의 작가의 말이 새롭게 읽힌다.

나는 판타지와 SF를 구별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기로는 ‘장르 문학’과 ‘주류 문학'을 구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에게 소설이란 손쓸 수 없을 만큼 변칙적이고 무분별한 현실보다 은유의 논리를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논리란 대개는 은유의 논리이므로.

 

진실은 연약하지 않고, 누가 부정한다고 해서 훼손되지도 않습니다. 진실은 아무도 진짜 이야기를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숨을 거둡니다.

<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

 

작가 켄 리우(Ken Liu)님을 소개합니다

1976년 중국 서북부 간쑤 성의 란저우 시에서 태어나 열한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했다. 하버드 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마이크로소프트 등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한 후 하버드 법학 전문 대학원을 졸업, 법무법인에서 변호사로 7년간 일했다.

 

대학 시절부터 습작을 시작하여 수많은 단편을 썼으나 오랫동안 출판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2002년 오슨 스콧 카드가 편집한 <포보스 SF 단편선>에 <<카르타고의 장미>>를 발표하며 소설가로 첫발을 내딛었다. 이후 2011년에 발표한 단편 <<종이 동물원>>으로 2012년에 SF 및 판타지 문학계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휴고 상과 네뷸러 상, 세계환상문학상을 모두 휩쓴 최초의 작가가 됐다.

 

2013년에는 단편 <<모노노아와레>>로 휴고 상을, 2016년에는 장편소설 ‘민들레 왕조 전쟁기' 3부작의 1부 <<제왕의 위엄>>으로 로커스 상 최우수 선집상을 수상하는 등 SF 및 판타지 문학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로 자리 잡았다. 창작뿐 아니라 번역에도 힘을 쏟아 2015년 중국 SF 작가로는 처음으로 휴고 상을 수상한 류츠신의 <<삼체>>를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현재 미국 보스턴에 거주하며 낮에는 기술 전문 법률 컨설턴트로 일하고 밤에는 소설을 쓰고 있다.

 

일하는 짬짬 이런 글을 쓰는 그대는 천재다. 그리고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