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책읽기

개처럼 가볍게, 행복하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소라언냐 2024. 3. 20.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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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by Milan Kundera, 이재룡 옮김 (민음사)

 

이 책은 이렇게 만나게 됐죠

몇번의 우연이 겹쳐 이 책을 모임에서 고르게 되었을까. 맑스의 <<공산당 선언>>과 함께 읽기로 선정되었던 책. 니체의 <영원회귀> 철학이 모티브로 씌여진 책이라는 소개가 궁금증을 키웠고, 같은 국적의 체코 작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아우라가 아직도 어른거리는 터라 추천이 나오자마자 만장일치로 정해진 책.

 

간단히 <<공산당 선언>>을 읽고 가슴 설렜던 내게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서 접한 공산주의 체제하의 인민의 삶은 처절하다.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고, 일상이 강제수용소와 같은 발가벗겨진 삶. 유능한 외과의사인지라 오피니언 리더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증명은 더욱 선명해야 한다. 끝내 평생의 임무라 여겼던 외과의사에서 자의로 유리창 청소부로 직업을 바꿔야만 하는 현실. 조지 오웰의 <<1984>>가 그저 허구의 소설이 아니었다는 충격.

 

한 번 읽고 이 책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어떤 내용들이었는지 기억이 다 나기나 할까. 전지적 작가 ‘나'가 말해주는, 에세이 형식을 빌린 짤막한 여러 글들로, 시간의 연속성 없이, 그러나 반복해서 토마시,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 이 네사람들과 카레닌이라는 개의 에피소드들이 어우러진다. 헌데 그 양념들이 ‘영원회귀’, ‘키치’ 등의 어려운 철학적 개념들이었던 탓에 내 머리속에서만 정리해 기억하기는 불가하다. 반드시 서평을 남겨야 겨우 기억에 남길 수 있겠다. 허허

 

목차는 다음과 같다

  1부 가벼움과 무거움
  2부 영혼과 육체
  3부 이해받지 못한 말들
  4부 영혼과 육체
  5부 가벼움과 무거움
  6부 대장정
  7부 카레닌의 미소

 

 

가벼움과 무거움

밀란 쿤데라는 극중 인물들 성향을 예로 가벼움과 무거움의 극단의 폭이 닿을 듯 좁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혼과 육체에 대한 가볍고도 무거운 생각들은 결코 서로 이해 받을 수 없는 혼자만의 우주에 있다는 것을 중첩된 목차로도 보여주는 듯하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결코 닿을 수 없다는 듯.

 

표면적으로 드러난 행동에 비춰 보자면 테레자와 프란츠는 무거운 축에, 토마시와 사비나는 가벼운 축으로 구분해둘 수 있지만 <3부 이해받지 못한 말들> 챕터를 읽고, 책을 마치고 나면 이들의 무거움과 가벼움은 뒤섞여 구분이 불가하다. 가벼움과 무거움의 양극단의 폭은 닿을 듯 좁고, 섹스로 설명하려는 영혼과 육체의 관계도 그러하다.

· 테레자의 끈적한 집착과 약함의 모습을 한 무거움은 읽는 내내 거북했을 정도였으나 공격적인 약함(가벼움)으로 가볍게 살고자 했던 토마시를 끝내 가라앉힌다.

· 토마시는 세상 모든 여자들을 잠재적인 애인으로 여기는, 에로틱한 우정(가벼움)을 유지하고자 하는 동시에 테레자를 위한 무겁디 무거운 선택을 연속적으로 한다.

· 프란츠는 사비나의 가벼움을 사랑한 동시에 아내 마리클로드와 딸의 가벼움은 경멸했고, 안경을 낀 젊은 애인에게 부성애(무거움)와 같은 사랑을 주고자 한다.

· 사비나는 아버지, 애인, 조국 등 배신을 통한 가벼움을 추구하면서도 조상과 아버지의 유일한 유산, 그리고 토마스와 프란츠의 기억이 담긴 중절모에 집착(무거움)한다.

 


자신이 썼던 오이디푸스 기사에 대해 토마시는 모순이 되는 의견을 말한다.

그리고 그는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알았는지 몰랐는지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문제는 몰랐다고 해서 그들이 과연 결백한가에 있다. 권좌에 있는 바보가, 단지 그게 바보라는 사실 하나로 모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자신이 한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을 징계하는 것은 야만입니다.

 

 

키치 (kitsch)

1-5부를 통해 가벼움과 무거움, 영혼과 육체 사이의 간극과 모순이 거의 없다는 것을 강조한 작가는 <6부 대장정> 챕터에서 각 등장인물들의 이후 여정들을 이야기해주며 본격적으로 형이상학과 현실이 전혀 동떨어져있지 않음을 말한다.

 

눈 앞에 보이지만 실상 존재하지도 않는 이원론적인 세계 너머에 단일한 세계가 있다는 개념을 전달하기 위해 ‘키치'를 한 챕터를 할애하여 설명한다. 우선 우리는 다들 각자의 우주에서 자폐아처럼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 모두 동의한다고 생각하는 바를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 라고 정해두자고 시작한다. 우리는 상상력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피엔스 종이니.

우주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저절로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간의 논쟁, 그리고 인간에게 주어진 존재 그 자체를 의심하는 사람과 주어진 존재에 아무런 조건 없이 동의하는 사람들 간의 견해차가 엄존하는 이 세상 (즉, 결코 서로에게 닿을 수 없다는 이원론의 믿음의 세상이었던) 유럽에서 그것이 종교적 믿음이건 정치적 믿음이건 간에 모든 유럽인들의 믿음 이면에는 창세기의 첫 번째 장이 존재하며, 이 세계는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모양으로 창조되었고, 존재는 선한 것이며 따라서 아이를 갖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거기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근본적인 믿음을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라고 부르도록 하자.

 

 

신의 아들로 불렸던 스탈린의 아들이 똥 때문에 수용소의 고압철책선에 매달려 최후를 맞이했다는 이야기로 시작된 키치(kitsch)라는 개념. 이미 앞 부분에서 사비나가 실수로 붉은 물감을 흘려 망쳤다고 생각했지만 그 그림을 가장 사랑하게 되었다는 에피소드에서도 소개되었는데, 키치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가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세계는, 똥이 부정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가 처신하는 세계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은 키치라고 불린다. … 말하자면 키치란 본질적으로 똥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다. 문자적 의미나 상징적 의미에서 그렇다. 키치는 자신의 시야에서 인간 존재가 지닌 것 중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전체주의적인 키치 왕국에서 대답은 미리 주어져 있으며, 모든 새로운 질문은 배제된다. 따라서 전체주의 키치의 진정한 적대자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인 셈이다. 질문이란 이면에 숨은 것을 볼 수 있도록 무대장치의 화폭을 찢는 칼과 같은 것이다. 사비나가 테레자에게 자기 그림의 의미를 이런 식으로 설명했다. 앞은 이해 가능한 거짓말이고 그 뒤로 가야 이해 불가능한 진실이 투명하게 드러난다.

 

 

영원회귀 - 한 번은 무의미하다

인간이라면 니체의 ‘영원회귀’ 보다는 토마시의 ‘영원회귀’에 더 희망이 있다. 전생의 기억을 모두 간직한 채 무한 반복되는 생. 반복을 통해 쌓이는 지혜가 있다면 삶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니체의 ‘영원회귀’는 그야말로 아무런 각성없는 무의미한 반복이라니... 니체가 맞건 토마시가 맞건 ‘한 번은 무의미하다’는 것에 동의한다. 테레자가 찍었던 소련 점령군들 사진들처럼 나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이 선인지 악인지도 알 수 없으니.

 

하지만 여기까지로 이야기가 마쳐졌다면 밀란 쿤데라가 위대한 작가 반열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작가는 마지막 장에서 피아의 분리가 없는 단일성의 세상에 사는 개, 카레닌의 이야기를 우리가 지향할 바로 제시한다. (개인적으로는 책을 읽으면서 토마시와 테레자, 프란츠의 죽음보다 카레닌의 죽음이 더 마음이 아팠다 ㅜ.ㅠ)

개는 결코 낙원에서 추방된 적이 없다. 카레닌은 영혼과 육체의 이원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혐오감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테레자는 그곁에 있으면 기분이 좋고 편안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동물을 생기있는 기계로 바꾸고 암소를 우유를 생산하는 자동인형으로 만드는 것이 그토록 위험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 천국과 그들을 연결하는 끈을 인간이 끊는 셈이며, 그 어떤 것도 시간의 공허를 통해 비상하는 동물을 막거나 위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토마시의 자신에 대한 사랑의 증거 유무로 분리의 지옥을 살았던 테레자에게 카레닌은 단일한 세계의 이해 관계가 없는 사랑을 전한다. 그러한 카레닌의 존재에 대해 테레자 역시 ‘아예 처음부터 그가 지닌 개의 우주를 수락했고 그것을 압수하고 싶지 않았으며 그의 은밀한 성향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지도 않았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카레닌의 미소

작가는 카레닌의 미소를 통해 우리 인류의 지향점을 보여준 것이라 생각한다. 카레닌의 행복의 원천이었던 원운동, 그 반복의 영원 회귀. 직선으로만 나아가는 인간에게는 끔찍하게도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만, 카레닌이 살았던 일원론의 세계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해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영원회귀가 무거운 짐일 수 있을까.

 

혹시 니체는 천재성을 소진한 이후 정신줄을 놓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자니 그는 ‘영원회귀’ 사상을 정리하고 마침내 일원론의 세계를 체험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에서 읽었듯 다른 존재의 고통 위에 사는 삶임을 직시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떠났으므로.

내 눈 앞에는 여전히 나무둥치에 앉아 카레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류의 실패에 대해 생각하는 테레자가 있다. 이와 동시에 또 다른 이미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토리노의 한 호텔에서 나오는 니체. 그는 말과 그 말을 채찍으로 때리는 마부를 보았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마부가 보는 앞에서 말의 목을 껴안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그 일은 1889년에 있었고, 니체도 이미 인간들로부터 멀어졌다. 달리 말해 그의 정신 질환이 발병한 것이 정확하게 그 순간이었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바로 그 점이 그의 행동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한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데카르트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을 것이다. 그의 광기(즉 인류와의 결별)는 그가 말을 위해 울었던 그 순간 시작되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니체가 바로 그런 니체이며, 마찬가지로 내가 사랑하는 테레자는 죽을 병에 걸린 개의 머리를 무릎에 얹고 쓰다듬는 테레자다. 나는 나란히 선 두 사람의 모습을 본다. 이들 두 사람은 인류,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행진을 계속하는 길로부터 벗어나 있다.

 

 

이제 이해가 된다. 니체가 말한 초인은 인생의 허무함을 인간의 의지로 극뽀~옥하고 초인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카레닌처럼 그냥 인생이 키치로 가득한 세계, 그 반복과 윤회의 원운동 안에 살고 있음에도 언뜻언뜻 느껴지는 ‘유령의 시간'을 예민하게 지각해 그 너머에 분리가 없는 사랑을 하고 살라고 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카레닌처럼, 개처럼 가볍게 행복하게.

 

제목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밀란 쿤데라는 ‘우리의 존재는 본시 가볍다’라고 말한다고 생각한다. 한 번 밖에 살지 못하던, 영원히 반복되더라도 전생의 기억이 전혀 없는 반복이라면 허무하고 가볍기 짝이 없을테지만, 그 가벼움을 살아내려면 카레닌의 지혜가 필요하다. 동물들에게는 기본 값으로 장착된 비-분리의 지혜, 반복에서 찾아내는 행복 말이다.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덧붙임 

덧붙이자면, 토마시와 테레자가 개 카레닌을 입양되어 이름을 정할 때 <<안나 카레니나>>의 얘기가 나오고, 안나의 남편이었던 카레닌으로 개 이름을 정할 때 개인적으론 뭔가 은밀한 복수의 장치가 아닐까 상상했는데… 아닌 듯 싶다.

 

<<안나 카레니나>> 소설 속 주인공들 중 맨 마지막 애정 역학의 위너(?)는 카레닌이었다. 카레닌은 자신의 배우자 안나가 정부 브론스키와 딸을 낳고 사실혼의 관계를 유지하지만 끝까지 이혼해주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배신한 안나를 연인 브론스키의 정부의 위치로 끌어내리고, 끝내 신경증으로 인한 자살로 생을 마치게 했으므로.

 

 

작가 밀란 쿤데라님을 소개합니다

체코와 프랑스의 소설가 밀란 쿤데라(1929.04.01-2023.07.11)를 아주 오랜 고전을 쓴 작가로 알고 있었는데, 작년에 향년 94세, 숙환으로 작고했다는 사실을 책을 읽는 동안 알게 됐다. 명복을 빕니다. 나무위키의 작가 소개는 다음과 같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으나 1975년 이후 프랑스로 망명해, 1981년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했다. 프라하예술대학교 영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의 교수를 지낸 적이 있다. 원래는 체코어로 글을 썼으나 1993년부터 프랑스어로 글을 썼고, 이전에 썼던 체코어 작품도 1985년과 1987년 사이에 쿤데라 본인이 직접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어본 또한 정본으로 쳐주며 현재 한국에 번역된 쿤데라의 글들은 대부분 프랑스어 번역본이다. 심지어 쿤데라 본인도 자신의 소설은 프랑스 소설로 분류되어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다.

 

당시에 체코에서 거주했을 시절 쿤데라는 개혁적인 마르크스주의자였으며,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에 입당했으나 1950년에 당에 반(反)하는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당에서 추방당했고, 1956년 재입당이 승인되었으나 1970년에 또다시 당에서 추방당한다. 이 기간 중 쿤데라는 1968년 프라하의 봄에 참여하였으며, 이 경험을 바탕으로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집필하게 된다. 쿤데라의 저작은 1989년 벨벳 혁명으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 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모국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금서로 지정되었다.

 

2019년 12월 3일, 체코 정부에 의해 체코 국적이 회복되었다. 그동안 이에 대해 쿤데라가 거부해 왔으나 2018년 안드레이 바비시 총리가 직접 방문했을 때 설득 끝에 이루어진 결과라고 한다. 1979년에 국적을 박탈당한 지 40년 만의 일이다. 현재 국적은 체코 단일이며, 시민권은 프랑스와 체코 둘 다 보유하고 있다. 국내에도 대부분의 소설 및 에세이들이 번역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