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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나의 조국은 우주 <<명상록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소라언냐 2024. 4. 2.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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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록 (Meditations)

 

by Marcus Aurelius (121/04/26-180/03/17), 박문재 &nbsp;옮김

 

 

작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님을 소개합니다

로마의 5현제 중의 마지막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저서로, 원 제목은 '타 에이스 헤아우톤(Τὰ εἰς ἑαυτόν)'으로 '자기 자신에게' 라는 의미.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의 양자가 되고, 12세부터 철학에 깊은 흥미를 보여 스토아 철학에 입문하여 에픽테토스의 <<담화록>>을 배웠고, 소크라테스를 존경했다고 한다. 이들의 철학은 그의 <<명상록>>에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전장에서 남긴 비망록 형식의 글이라 반복되는 내용도 많고, 두서 없기도 하지만 그의 사망 후 약 100년 이후 후대 사람들이 <<Meditations (명상록)>>이라는 제목으로, 12권으로 나누어 편찬된 책이라고 한다.

 

 

난중일기 아니예요

<<명상록>>이라는 제목만으로는 뭔가 서정적인 내용이리라 예상했다가 서문에서 도나우 지역의 약 10여년 간의 전장에서 쓴 글이라기에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급으로 전장의 상황이 많이 등장하리라 예상했던, 나의 기대를 크게 저어 버린(?) 책. 전쟁의 상황이나 정치적인 묘사라고는 1도 없어서 서문의 내용을 보지 않고 읽었더라면 평온한 궁에서, 황제로서 흐트러지지 않기 위해 쓴 글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내용은 차분히 내면으로 향해 그 곳에 머물며 자신을 성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생몰년도를 보면 올해부터 약 1900여년 전에 태어나 살다 간 사람이지만, 그의 글을 읽고 있자면 약 2000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사람의 생각은 크게 변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고, 최근 내가 깨달은 내용들을 그의 손을 빌어 담담히 적어둔 듯한 글을 보고 있자니 그와 내가 본시 하나라는 새삼스런 깨달음에 몹시 반갑다. 

 

 

죽음에 관한 명상

거의 모든 장마다 반복해 나오는 죽음에 대한 명상. 전장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매일 같이 목도했던 것이라 그랬을까. 만물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는 철학적 확신, 인간은 신과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에 곧 닥칠 수 있는 죽음 앞에서도 초연한 힘이 느껴지는 짤막짤막한 노트들을 써내려 가며 그는 스스로 위로하고 격려 받았슴이 분명하다. 죽음을 항상 명료히 인식하고 있었음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어떻게 살아야 할 지에 대한 본인의 행동 철학을 만들 수 있었지 않았을까.

 

 

가치 중립 / 판단 중지

또한 인상적인 것은 ‘가치 중립'과 ‘판단 중지’에 관한 내용이 많았는데 실재와 무관한 에고 놀음에 빠지지 말라는 <<기적 수업>> <<상처받지 않는 영혼>>의 내용과 똑같은 메시지여서 놀라웠다. 즉각적이고 본능적으로 우리는 호불호를 나누고 편을 갈라 비실재를 실재화 시키는데,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바탕으로 판단하지 않고 가치를 중립으로 둠으로써 비실재에 빠져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나의 조국은 우주' 라고 말하는 저자. 오늘 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주의 정신이며, 이성인 우리는 신과 하나라는 것을 말하는 고대의 지혜를 우리는 잊고 산지 오래여서 이토록 신선하게 와닿는 것인지. 스토아 학파의 철학이 몹시 궁금해졌다. 사유만 하는 철학자가 아닌 실천했던 철학의 실현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보면 철인 황제의 통치가 유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인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럴 수만 있다면 엘리트주의 정치체제도 나쁘지 않으련만 이 모든 걸 한 사람의 의지에 기대야 한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남기고 싶은 문장들

자주 상기하고 싶은 내용들을 옮겨둔다.

 

[ 메멘토모리 Memento mori ]

얼마나 많은 영웅들이 무수한 사람들을 죽인 뒤에 자기도 죽었는지 끊임없이 생각하라.
마케도니아 사람 알렉산더와 그의 마부는 죽은 뒤에 동일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들은 둘 다 똑같이 우주의 생식력이 있는 이성으로 환원되었거나 아니면 원자들로 분해되었기 때문이다.
죽음을 무시하기 보다는 인정하라. 죽음 역시 자연의 섭리 중 하나이므로.
행동을 할 때마다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라. ‘이 행동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가. 내가 이 행동을 하면 후회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머지않아 나는 죽고,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만다. 그러니 내가 지금 신과 동일한 법 아래에서 살아가면서 이성적이고 공동체적인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매일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는 듯이 살아가면서도, 거기에 초조해 하는 것이나 자포자기해서 무기력한 것이나 가식이 없다면, 그것이 인격의 완성이다.

 

 

[ 가치중립과 판단중지 ]

바른 마음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나의 자녀들은 안전해야 해' 라든가 ‘나의 모든 행위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아야 해'라고 말한다면, 녹색만을 보려고 하는 눈이나 부드러운 것만을 구하는 치아처럼 병든 것이다.
오늘 나는 나를 괴롭히는 온갖 것들에서 벗어났다. 아니, 그것들을 내던져 버렸다. 그것들은 외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안에, 즉 내 자신의 판단에 있었기 때문이다.
판단을 하지 말라. 그러면 네가 피해를 입었다는 생각이 사라질 것이다, 그런 생각이 사라지면, 피해도 사라질 것이다.
네 마음에 새겨두고서 늘 반추하고 돌아보아야 할 두 개의 원리가 있다. 하나는 외부에 있는 사물들은 외부에 있어서 너의 혼을 지배할 수 없고 너를 흔들어 놓을 수 없기 때문에, 불안은 언제나 너의 내면에 있는 생각이나 판단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것들은 한순간에 변하여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리라는 것이다. 네 자신이 이미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겪어왔는지 끊임없이 생각하라.
우주는 변화이고, 삶은 의견이다.
하지만 내가 그런 일들을 해로운 것이라고 판단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여전히 해를 입지 않고, 내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도 있다. … 나의 마음과 정신은 자신의 활동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도리어 그 활동을 촉진시키는 요소로 적절히 바꾸어 놓음으로써, 그 활동을 저해했던 것들이 도리어 돕는 것들이 되고, 나의 길을 막고 있던 것들이 도리어 나의 길을 활짝 열어주는 것들이 된다.
그(에픽테토스)는 행운이 그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기 위해 그에게 풍부하게 공급해 준 물건들을 아무런 주저없이 사용했지만, 과시하는 것이나 미안해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다. 있을 때에는 별 생각없이 사용했고, 없을 때에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 우주관 ] 

우주는 단일한 실재와 단일한 정신을 지닌 하나의 생명체라는 것, 만물은 우주의 단일한 생각으로 돌아가고, 우주의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며,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장래에 존재하게 될 모든 것들의 공동의 원인들이고 또한 만물은 수많은 실들이 서로 촘촘하게 짜여져서 이루어진 하나의 피륙과 같다는 것을 언제나 잊지 말라.
우주를 주관하는 이성은 스스로 깨어나서, 스스로 변화하며, 자기 자신을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만들고, 모든 일어나는 일들이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보이게 한다. 

 

 

나의 사랑하는 책 <<기적 수업 A Course In Miracle>>의 첫 장 머릿글도 함께 남긴다. 

 

실재는 위협 받을 수 없고, 비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 하나님의 평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