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책읽기

허무한 줄 알면서 왜 사는가 <<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 최진석 >>

소라언냐 2024. 5. 10. 10:18
반응형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우리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내가 별이 되는 것이다. 이 순간의 삶 속에서 내가 영원을 경험하는 것이다. 나에게 별은 무엇일까? 목적을 잃지 않게 해주는 힘이다. ... 자유로워지는 것! 깨닫는 것! 자존감을 잃지 않는 것! 자부심을 잃지 않는 것!



작가 최진석님을 소개합니다

개인적으로 작가 최진석을 잘 모른다. 그러나 왠지 낯이 익다. 프로필을 읽어보니 안철수 캠프에서 뛰었던 적이 있었던 분이었다.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 교수, 사단법인 ‘새말새몸짓' 이사장, ‘새말새몸짓' 기본학교 교장이며, 건명원의 초대 원장을 지냈다.

 

1959년 전남 신안군 하의도 곁의 장병도라는 작은 섬에서 태어나 함평에서 유년을 보냈다.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학사 석사를 마치고 베이징 대학교에서 당나라 초기 장자 해석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원래 서양철학을 공부하려고 독일 유학을 계획했지만 ‘공부를 하려면 재밌고 좋아하는 것을 해야지'란 생각으로 동양철학으로 바꿨다고 한다. 게다가 유가보다는 도가 책을 읽을 때 더 영감이 떠오르고 짜릿했다고.

 

 

노자의 '무위'와  장자의 '소요유'

그는 우리에게 삶의 주인으로서 주체적이고 욕망에 집중하며 살라고 권한다.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미래가 주체적이고 욕망하는 개인에게 달려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요즘 나의 관심사가 그러해서 그랬는지 도서관에 가서 집히는 책들도 노자 장자 등의 도가 철학서들이고, 유튜브를 봐도 강신주 선생의 장자 강의 같은 채널들이 추천영상으로 뜬다. 

 

철학자 강신주의 강의를 듣고 장자와 노자에 대한 어렴풋한 의문이 생겼다. 제자백가 사상과 명확히 구분되는 철학으로 노장사상을 묶어 도가 사상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었던가? 

 

노자의 ‘도가도비상도'와 같이 잡힐 듯 떠다니는 가르침을 우화 등의 이야기 형식을 빌어 더욱 구체화된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 장자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읽은 책과 강신주의 강의를 들어보면 두 사상가의 주장도 가리키는 방향이 사뭇 달라보인다.

노자의 무위는 국가 통치 방법으로써의 ‘무위’로 사람들이 스스로 모여드는 강력한 나라는 이루고자 하는 것으로 일면 공자의 궁극적인 목표와도 닿아있다고 한다. ‘무위무불위’의 방점은 무불위에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없는 강국이 되기 위해 무위하라는 것.

 

이에 반해 장자의 경우 소요유 즉,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상을 제시하는 것으로 본다. 안빈낙도를 예로 드는데, 낙도에 방점이 있어 안빈한다는 것. 

 

우리는 거꾸로 안빈과 무위에만 꽂혀있지 않은가. 



매우 급진적인 노장 사상

작가 자신의 살아온 여정을 고백하며 노장 사상의 철학을 비추어 이야기해준다. 책을 읽고 나면 노장 사상이 당시에 얼마나 급진적인 사상이었을지 (아니 지금 읽어도 충분히 그러하다) 이해가 된다. 

언어도단의 고요의 순간에 찾아오는 ‘유령의 시간’을 붙들기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서 한발짝 떨어져 주의깊게 관찰하기를.  
그들이 원하는 바를 내가 원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고 나의 욕망을 확실히 하기를.
매트릭스에 갇혀 살지 말고 빠져나와 자유롭게 살기를. 

 

 

강력히 원하는 바가 있어야 영감이 떠오르고, 그러한 영감으로부터 나의 머릿속의 퍼즐들이 조화롭게 맞춰지는 그러한 지적 환희의 체험을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체험은 다시 나의 욕망,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더욱 선명하게 해주고, 해야 할 일들이 명료하게 순서를 갖게 되는 것 아닐까.

나는 2017년에 정년을 7년 앞두고 교수직을 그만두었다.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큰 결정을 하셨나요?”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가 아주 분명하다. ‘별처럼 산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삶을 살면서 ‘내가 나로 빛난다'는 뜻이다. 내가 교수 생활을 하면서 가장 놀랍고 슬픈 일은 청춘들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원하는 것이 없는 삶은 빛날 수 없다. 원해야 한다!

 

가능하면 빨리 은퇴를 하고 조용한 시골로 들어가 자급자족하는, 스스로 일어서는 생활을 시작하기로 남편과 마음을 정했다. 부모님께 말씀드리면 이민을 통보하다시피 했을 때만치 놀라실 것 같다. 시골로 들어가 살 것이라고 알고 계시지만 퇴사를 하고 들어가는 줄은 모르고 계시니... 주위 사람들도 잘 이해 못하는 분위기였는데 우리 맘을 찰떡같이 알고, 이미 실행하고 있는 작가를 보니 반갑고 든든하다.



허무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

또 작가는 허무가 기본값인 인생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조곤조곤 이야기한다. 

순간만 살다 죽을 것을 우리는 왜 굳이 애쓰며 사는가. 다 사라질 것을 우리는 왜 잡는가. 결국 다 털고 갈 것을 왜 굳이 배우는가. 허무한 줄 알면서 왜 사는가. 우리의 존재 조건이 허무함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산다는 것은 허무와의 투쟁이 아닐까? 허무에 지지 않기 위해서. 허무에 지면 왜 안되는가. 여기서부터는 질문이 불가능하다. 존재의 가장 궁극적 상태이기 때문에 질문도 거기서부터만 출발할 수 있다. 허무하기 때문에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허무를 관찰하고, 허무와 투쟁한다. 허무와 투쟁하면서 나는 나로 살아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확인된다. 자신을 허무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허무를 관찰하고 투쟁하도록 하는 토대가 허무인 것은 참 모순적이다. 삶을 죽음과 연결해 죽음 쪽에서 삶을 보면 삶이 더 또렷하게 드러나고 충실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삶은 자신의 존재 형식인 허무와 스스로 전선을 형성하면서 허무이면서도 허무가 아닌 것으로 재탄생시킨다. 자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하는 자는 그 순간에 영원을 함께 경험한다. 자기 존재의 자각, ‘순간'과 ‘영원’이 교차하는 성스러운 자리다.
허무는 주관적 가치 평가가 아니라 우주의 진실한 모습이다. 가치(value)가 아니라 사실(fact)이다. 어떤 의미인가는 아무 상관없다. 우주는 원래 허무하다. 허무하게 생긴 우주의 존재 형식을 노자나 장자는 ‘도'라고 불렀다. 이런 도의 이치를 온전히 깨닫고, 그 이치를 자기화해서 구현할 능력까지 겸비하면, ‘득도'했다고 말한다. 우주적 삶을 살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이런 단계에 오른 자가 걸리는 것 하나 없이 일을 잘 수행한다면 ‘도통'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궁극적 사명은 득도하는 데에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 같은 가르침을 전하고 있어요

나의 사랑하는 책 <<기적 수업>>과 같은 가르침을 준다. 우주는 원래 허무하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 마음이 심란한 것은 내가 생각하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의미 없는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판단하고, 분리를 믿는 나. 우리가 생을 사는 이유는 허무한 생을 사는 찰나에 내 존재의 영원을 경험하기 위해, 작가의 말대로 우리 삶의 목적은 내가 별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스님이 되어 성불하고 싶었지만 어머니 때문에 그런 마음을 접었다고 했다. 대신 어머니를 위해 ‘밥은 나오는' 아궁이에 불을 떼며 마음은 산속에 가 있었던 시간들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고 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아궁이의 불을 떼던 그 시간이 성불하는 시간이었슴을. 그것이 장자가 말했던 ‘곤이 대붕이 돼가는 착실한 걸음’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