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책읽기

작가는 죽어도 독자는 이어진다 << 담론 - 신영복 >>

소라언냐 2024. 9. 12.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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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저자는 죽어도 독자는 이어진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강의>>에 이어 신영복 선생의 <<담론>>을 마쳤다. 첫번째 책이 무기징역시 감옥에서 왕래했던 편지들을 모아 출간했다면, 두번째 <<강의>>는 출소 후 성공회 대학에서 수감기간 중 독학했던 동양학 고전 강의 내용을 녹취한 것을 근거로 출간 되었다고 한다.

 

이제 이 두 권의 내용들의 발췌본이랄 수 있는 <<담론>>을 읽고 존경하는 신영복 선생의 책에 대한 나의 서평을 남기게 되어 진심으로 기쁘다. 우리 싸목싸목 독서 모임 덕분이다.

 

신영복 선생의 책을 읽을 때마다 나는 채사장이 어른거린다. 신영복 선생 판 <<지대넓얕>>이랄까. 제자백가와 법가를 통한 인간관계론과 자본노동론까지… <<지대넓얕 0, 1, 2>>을 읽으면서 이런 거 학교에서 배웠는데 왜 이렇게나 새로울까 싶었던 그 기시감이 다시 느껴졌다. 역시 사람은 비교를 통해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굵직굵직한 스케일로 대략의 비교를 맛보았으니 이제 좀 더 깊이 파나가는 것은 내 몫이다.

 

부드럽지만 냉철한 인사이트들을 담은 선생님의 강의를 같은 시공간에서 공감하며 들을 수 있었으면 참 좋았겠지만 이렇게 책으로 남겨준 분들이 있기에 ‘저자는 죽어도 독자가 이어진다는’ 선생의 가르침을 얻을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이다.


 

우리의 손때 묻은 친숙한 그릇 <<시경>>과 <<주역>>

책은 1,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 ‘고전에서 읽는 세계 인식’에서는 세계인식에 초점을 맞추고 사서삼경 중의 <<시경>>과 ‘우리의 손때 묻은 친숙한 그릇'이라는 <<주역>>의 오래된 세계 인식틀을 소개해준다.

 

문사철(고전문학, 역사, 철학 - 추상력, 이성 훈련 공부)과 시서화악(상상력과 창의력, 감성 훈련 공부)를 강의 첫 시간에 다루면서 언어, 개념, 논리 중심의 문사철의 추상화로는 세계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으므로 그 틀을 깨야한다는 주장을 한다.

 

언어나 문자는 추상적인 기호일 뿐 문학, 역사, 철학의 올바른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며, 역사는 역사가가 선별하고 재구성하는 것이며, 철학 역시 세계의 본질과 운동을 추상화하는 것이므로 추상화의 속성과 한계가 분명함을 지적하며 언어와 개념 논리라는 지극히 추상화 된 그릇으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담을 수 없다고, 온당하지도 않다고 갈음한다. 그리고 이렇게 인식틀을 깨뜨리는 것이 공부의 시작임을 분명하게 말한다.

 

그러면서 ‘시어’에 대해 설명하는데 안도현 시인의 <연탄재>와 간장게장을 주제로 한 <스며드는 것>을 예로 든다.

시어는 그 언어의 개념적 의미를 뛰어넘고 있습니다. 메타 랭귀지라 할 수 있습니다. (…) 시는 세계를 인식하고 재현하는 상투적인 방식을 전복하고, 상투적인 언어를 전복하고, 상투적인 사유를 전복하고, 가능하다면 세계를 전복하는 것, 이것이 시인의 카타콤 catacomb이며 그 조직강력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서화악이 좀더 세계의 인식과 전달에 효과적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무심히 보고 듣는 영상서사양식의 위험성을 따끔하게 지적한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세계인식은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이 그것입니다. 여러차례 이야기했습니다. 세계를 이해하고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공부'의 뜻이 그러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영상서사양식의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바로 이 주체가 세계 인식에 있어서 소외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선생의 주장이 시서화악으로 기운다고 느낄 즈음 문제의 핵심을 긴급히 짚어낼 수 있는 추상력도 역시 중요함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핵심을 요약하고 추출할 수 있는 추상력을 키우기 위해서인데, 문제를 옳게 제기하면 이미 반 이상이 해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실천은 우경적으로’하라는 비전향 장기수 선배들의 충고를 인용하면서 문사철의 추상력과 시서화의 상상력을 유연하게 구사하고 적절히 조화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공부임을 다시 한 번 전한다.

 

 

톨레랑스에서 노마디즘으로

책을 읽고 가장 마음에 남는 단어는 유목주의 nomadism이다. 왜 우리는 남들과 다름을 인정하지 못할까를 답답해하던 나의 비좁은 그릇을 탁! 깨뜨려준 한 단어. ‘배울 것이 없는 상대란 없다’라며 서로 왕래하면서, 배우고, 동화되는 통일화화(通一和化)를 우리의 통일 청사진으로 제시한다. 이에 비해 소위 ‘통일대박론'은 너무 낯 뜨겁다.

톨레랑스는 은폐된 패권 논리입니다. 관용과 톨레랑스는 결국 타자를 바깥에 세워두는 것입니다. 타자가 언젠가 동화되어 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강자의 여유이기는 하지만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탈주와 노마디즘은 아닙니다.
차이는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출발이어야 합니다. 차이는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의 대상이어야 하고, 학습의 교본이어야 하고, 변화의 시작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목주의입니다. 들뢰즈, 가타리의 노마디즘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 발 걸음의 완성이 아니라 한 발 걸음이라는 자각과 자기비판, 그리고 꾸준한 노력입니다.

 

 

군자는 본래 궁한 법이라네 <<논어>>

공자의 <<논어>>를 제대로 읽은 적은 없으면서도 항상 한국 유교문화의 폐단의 근본을 공자 탓으로 여기며 불만이 많았다. 사실… 책을 읽고난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물론 공자님이 많이 억울하실 일이다.

 

신영복 선생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군군신신의 예론은 지금에 보기로는 매우 보수적이나 당시로는 공자가 증오했던 참주 정치(힘에 의한 지배와 혈연에 의한 계승이면 충분했던)에 반하는 광견의 개혁적 사상이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우선 사군자를 포함한 지배층을 인(人)으로, 노예와 생산 담당자들을 민(民)으로 구별하여 백성들을 기른다는 사고로 접근하는 보수적인 책은 맞지 않는가.

 

공자 당시에 종복의 관계와도 같았던 이 같은 인간관계를 역동성 있게 바꿔주는 사군자라는 제3 계급이 등장하는데, 이는 지배-피지배라는 2항 대립 구조에서 제3항이 추가되는 혁명적 변화라고 설명한다. 그래, 그 당시의 구조에서는 혁명적이었지만 보수가 너무 악용했다고 이해된다.

 

반면 법가는 법을 성문화하고 공개함으로써 군주의 자의성을 규제하려고 했으나 아래의 문장으로 일갈한다. 엄청나게 소름끼치는 일침이다. 억울한 옥살이를 20년간이나 했던 선생의 말이라 더 무게가 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은 원해 법을 만든 사람은 규제하지 못합니다. 2천년이 지난 오늘의 우리 현실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권력자는 법 감정이 없습니다. 처벌과 감시가 자기들의 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쪽은 그 사람의 행위만이 불법임에 반하여 다른 쪽은 인간 자체가 범죄인이 됩니다. 사법 현실과 사회의식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대의제는 중간계급을 승인하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그 중간계급이 실은 민보다는 기득권인 인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와 <<논어>>에 대하여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논어>>는 사회 전환기에 분출하는 개방적 사유를 풍부하게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인간과 인간관계에 대한 인문학적 사유가 풍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효율성이 높은 기계를 사용해서 만들었거나 효율성이 낮은 기계를 사용해서 만들었거나 시장에서 동일한 가격으로 거래되기 때문에 가치와 가격을 같은 뜻으로 이해합니다만 기계는 가치를 늘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줄이는 역할을 합니다.

 

 

점은 선이 되지 못하고 <<맹자>>

도시는 자본주의가 만들었습니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존재 형태가 도시입니다. 그리고 그 본질은 상품교환 관계입니다.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가 상품교환이라는 형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입니다. 얼굴 없는 인간관계, 만남이 없는 인간관계란 사실 관계없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새롭게 읽힌 부분이 맹자였다. 이 역시 어설프게 공자왈 맹자왈 그 나물에 그 밥일거란 오해… 정말 미안합니다.

 

백성과 함께 즐긴다는 여민락 사상과 개인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그 개인이 처한 사회적 조건도 대단히 중요하다는 맹자의 사회적 관점은 지금 읽어도 타당하기 그지 없다. ‘돈은 개처럼 벌고 정승처럼 쓴다’는 말도 쉬이 수긍하면 안되겠다고… 직업관을 점검했다. 생각없이 살게 되는 관성이 사는 대로 생각하게 한다고 했으니.

 

 

잠들지 않는 강물 <<노자>>

신영복 선생이 추천하는 세 권의 책들. 인간에 대한 담론 <<논어>>, 자본주의 사회 구조에 대한 이론 <<자본론>>, 그리고 자연에 대한 최대 담론 <<노자>>.

 

아하~ <<도덕경>>을 읽었지! <<담론>> 앞부분 중 가장 반갑게 읽혔던 챕터였다. 뭔가 앞선 담론들을 모두 휘저어 덮어버리는 듯한 자유로운 거대 담론. 작가는 아기와 엄마의 까꿍놀이와 숨바꼭질을 무유론의 예로 들며 아기는 ‘있다'와 ‘없다'를 함께 생각한다고 말한다. 

 

‘무위'는 노자 실천론의 핵심이며, 철학적인 개념으로 읽히고 있으나 당시의 반전사상이라는 설이 있는데, 이를 받침하듯 노자의 저자나 지명은 전혀 전혀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 작가 자신을 철저히 숨겨야 했던 당시 상황의 반증이라는 것. 반전 사상과 반문화적인 민중사상을 뒷받침하는 책이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상선약수’ 물, 그 모든 물들을 받아들이는 바다를 하방연대라고 비유하며 민중에게 희망이 있음을 전한다. 위로 하는 연대는 추종이고 영합일 뿐 연대는 물처럼 낮은 곳과 하는 것임을, 그리하여 바다를 만들어 내는 것임을 역설한다. 감동이다. 

유가도 부지런히 도가를 읽고, 도가 속에서도 유가적 담론이 많습니다. 주자는 <<장자>>를 유가 텍스트로 받아들여 주를 달았습니다. 모순관계가 아니라 긴장관계입니다. 크게 보면 노장과 유가는 서로 좋은 반려자를 두고 있는 셈입니다. 동양사상의 인문학적인 깊이가 그래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1장의 핵심이 바로 무유론(無有論)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를 통합적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노자>>는 유와 무를 통일시킴으로써 우리의 왜소한 사유를 확장합니다. 우리의 강의에서 계속해서 강조하는 세계인식의 확장이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가 무를 개념화 한 것입니다. 큰 것이 다만 작게 나타났을 뿐입니다.
노자의 자연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닙니다. <<노자>> 영역본에서 자연을 ‘self-so’라고 번역합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최고의 질서, 가장 근본적인 질서입니다.
법가는 군주 권력을 중심에 두는 사상입니다. 이에 비해 유가는 예, 악, 인과 같은 유화적인 지배 기제를 통해서 법가의 적나라한 권력의지를 은폐합니다. 그러나 국가란 본질에 있어서 폭력이며 잠재적인 전쟁 기구입니다. 국가는 계급 지배가 본질입니다. 그리고 국가의 역사에는 반드시 전쟁의 기억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외부와의 전쟁이든 내부 전쟁이든 차이가 없습니다. 정치권력은 본질적으로 억압과 지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시대의 민중정서는 반국가적입니다. 노장의 반문화 사상과 무위 사상은 모든 시대, 모든 국가의 저변에 깔려 있는 민초들의 사상적 기조가 됩니다.
끝으로 당부하고 싶은 것은 연대는 전략이 아니라 삶의 철학이라는 사실입니다. 산다는 것은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만남이 연대입니다. 관계론의 실천적 버전이 연대입니다.



하지만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를 읽고 난 후에는 <<도덕경>>이 달리 읽히기도 한다. 노자와 장자 역시 긴장관계였을까.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탈주와 노마디즘 <<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 >>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  이 책은 이렇게 만나게 됐죠새삼 채사장의 >를 읽고 받았던 충격이 떠오른다. 동서고금의 지혜들이 모두 한결같이 일원론의 세계관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thebrownbottle.tistory.com

 

 

양복과 재봉틀 <<자본론>>

<<자본론>>을 잘 읽으면 이 정도의 인사이트를 나도 얻을 수 있을까 싶게 충격적이었던 챕터였다. 이런 저런 책들을 통해 나도 자본주의 시장이 돌아가는 원리 쯤은 좀 안다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일 뿐이었다는 부끄러움과 동시에 노동과 자본에 대한 집약적인 사고의 핵심을 떠먹여주는 듯한 고마움에 몇번을 읽었던 부분이다.

 

<<장자>>의 반기계론을 서두로 시작하는 이 챕터는 우리의 과거 노동력의 집약이 현재의 기계이며, 이는 가치를 줄이는 역할을 하는 한다는 인사이트를 던진다. 처음 읽을 때는 껌뻑껌뻑했지만 다시 읽을 수록 대단하다.

 

눈부신 기계의 발전을 이루었으나 여전히 우리의 노동시간이 줄지 않는 이유 그리고 부의 재분배의 불공평. 이는 다시 장자의 기계론에 대한 관점 그리고 노동에 대한 성찰로 돌아온다.

기계를 보는 관점이 판이합니다. 기계가 기심을 만들어 내고 결국은 순백이 불비하고 신생이 부정해서 도가 깃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도'의 문제입니다.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이러한 장자의 관점이 대단히 성찰적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은 피고용 노동이기 때문에 노동은 당연히 비효용이고 고통입니다. 따라서 노동시간이 적을 수록 행복합니다. 노동이 과연 비효용이고 고통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전혀 알지 못했던 묵자. 약간은 중국의 마오 홍군이 연상되기도 했던 실천적 반전 운동가였으며 사유가였던 묵가에 대해 알게 되었다. 묵가의 겸애 사상과 지식인이 품어야 할 가장 중요한 품성인 ‘양심적인 사람’까지 설명을 마친 후 친절히 중간 정리를 해준다.

 

언뜻 불가의 연기설 같이 읽히지만 그것이 약간 수동적인 느낌이 든다면 동양적인 정체성의 정의는 관계를 능동적으로 맺어 나가는 창조적 실천이라고 이해된다.

동양적 사유는 결정론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모순과 대립의 통일과 조화가 세계운동의 원리입니다.
존재는 고립된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관계 속에서 비로소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정체성이란 내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적극적으로 조직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입니다. 정체성은 본질에 있어서 객관적 존재가 아니라 생성(being)입니다. 관계의 조직은 존재를 생성으로 탄생시키기 위한 창조적 실천입니다.
그러나 모든 존재를 관계라는 객관적 얼개 속으로 해소시키는 것 역시 관념론이 됩니다.
'사이존재’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시간, 공간, 인간 등 세상의 모든 존재는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것과의 ‘사이'가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양자 물리학에서 불변의 물질성 자체가 사라지고 존재는 확률과 가능성이 됩니다. 동양적 사유에서 자연은 생기의 장입니다. 우리가 사용해온 관계의 정확한 의미는 관계의 조직입니다.



책의 2부는 ‘인간 이해와 자기 성찰'에서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내용들 중 발췌된 내용으로 강의가 진행된다. 필자가 인생 공부의 ‘대학’으로 일컫는 감옥 수감 생활을 통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에피소드 형태로 소개한다.

 

우엘바의 콜롬버스와 인도의 바라나시를 비교하며 인도의 달관의 문화를 짚어주는데, 달관은 탈문맥으로 이어지고, 우물을 벗어나는 탈정이므로 중요하다고. 내게는 오리엔탈리즘처럼 하나의 이데올로기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마저도 그러한 자유와 달관은 중요하다고 말한다. 기억하고 싶은 통찰들을 남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라 하더라도 특정 계급에 갇히지 않는 장기적이고 독립적인 사유공간이 필요합니다. 대학의 존재 이유입니다. ‘오늘'로부터 독립한 사유 공간, 비판 담론과 대안 담론을 만드는 공간이 바로 대학입니다. 지식인도 그 사회적 입장에 있어서 대학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를 가두고 있는 보이지 않는 감옥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옆 사람을 향하여 부당한 증오를 키우지 않기 위해서 그 증오를 만들어 내는 보이지 않는 구조를 드러내고 우리를 가두고 있는 보이지 않는 감옥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가 하는 공부의 목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소비가 미덕이라는 구호도 비인간의 극치입니다. 단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소비는 전쟁입니다. 전쟁이야말로 미덕이 된다는 역설입니다. 지금 그것이 현실이기는 합니다.
콜롬버스에서부터 오늘의 이라크에 이르기까지 타자의 희생 위에 자기의 존재를 키워 오고 있습니다. 탈근대에 관한 철학적 논의는 여러가지 개념을 구사하면서 여러 경로로 진행되고 있지만 모든 탈근대 철학이 공유하고 있는 담론이 바로 주체의 해체입니다. 존재론의 반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든 생산물은 노동이 만든 것입니다. 그 생산에 투입된 기계까지도 그렇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하는 것이 바로 자본은 노동이 축적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축적된 자본이 노동을 소외시킨다는 역설이야말로 역설 중의 역설입니다.
성과 주체인 경우 노동을 강요하거나 착취하는 외적 지배 기구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복종적 주체와는 구별됩니다. 외적 지배가 없다는 사실이 언뜻 자유롭긴 하지만 더욱 더 부자유한 상태로 전락합니다. 이른바 자기착취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자본권력 아래에서 그림자를 추월해야 하는 가망없는 질주를 하고 있는 피로 사회의 자기착취자가 앓는 병이 우울증입니다.  - 한병철 <<피로사회>>
부패 문제는 흔히 윤리적 문제로 인식됩니다. 그러나 부패의 근본 원인은 경쟁입니다. 사활이 걸린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정직한 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을 윤리 문제로 분리하여 거론하는 것 자체가 축적 구조의 모순을 은폐하는 논리입니다.
우리가 생산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자원과 인간 노동을 사용한 다음 자연과 인간을 원상태로 돌려놓지 않습니다. 가져왔으되 도로 돌려놓지 않은 부분 즉 외화된 부분을 생산이라고 합니다. 가치 창조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오염입니다.
수많은 생산자들은 각각 개별적 판단에 의해서 생산을 진행합니다. 공급과 수요가 맞아 떨어질 리가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불균형이 누적됩니다. (…) 불균형의 누적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파열하는 것이 공황입니다.
이러한 파괴적인 시스템을 뒷바침하고 있는 것이 전쟁국가인 미국의 군사력임은 물론입니다. 엠마누엘 토드에 의하면 미국은 어떠한 국제 분쟁이나 전쟁도 문제의 최종적 해결에 이르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쟁과 준 전쟁 상태를 지속시킴으로써 개입의 가능성을 계속해서 열어둡니다. 그런 점에서 한반도의 평화협정 체결이라는 최종적 해결은 미국의 계획에 없습니다.
민족 투쟁에서는 무력하고 비겁한 반면, 국내의 계급 투쟁에서는 예의 그 탁월한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 1623년 인조반정 이후로 노론 세력들은 지금까지 지배 계급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 일제 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 군사정권에 이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보수 구조를 완성해 놓고 있습니다. 물론 배후에 외세의 압도적 지원을 업고 있는 것 역시 그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점은 선이 되지 못한다

담론이었다. 큰 이야기들였지만 눈감고 현대를 살고 있는 듯한 내게 꼭 필요한 이야기였다. 타이핑을 치는 것 같은 서평을 남겼으나 옮겨 쓰는 와중에도 울림이 있었다.

 

봄에 땅을 갈아엎고 씨앗을 심는 것은 땅과 씨앗에게 모두 상처가 되는 일이지만 꽃은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지금 우리는 신영복 선생 그리고 함께 수감되었을 당시의 비전향 장기수들에게 부채감이 든다.

 

우리는 모두 유한한 삶을 사는 무기수들이란 점에서는 신영복 선생의 수감 생활과 다를 바 있을까. 그러니 그가 그만의 대학에서 무릎만한 햇살 덕에 자살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처럼 지금 현재를 끊임없이 명상하고, 공부하며 살아야겠다.

점은 선이 되지 못한다는 뼈있는 가르침. 부질없어보여 치워버리고 싶지만 잊지 말고 더 낮고 넓게, 나의 삶의 철학으로서 연대하는 것. 그것이 순간순간에는 비록 떨리는 지남철처럼 방향만 잡으려하는 무의미한 움직임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런 고민조차 멈추는 순간 존재의 의미도 없어진다는 선생의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겠다. 나의 틀을 예민하게 자각하고 고민하는 순간 순간들이 나의 대학 생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