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책읽기

삶의 주도권을 가져라 << 건너가는 자 - 최진석 >>

소라언냐 2024. 10. 27.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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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가는 자 by 최진석

익숙함에서 탁월함으로, 얽매임에서 벗어남으로

 

 

동작가의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를 강신주 작가의 <<노자 혹은 장자>>와 연달아 읽었다. 강신주 작가 특유의 울분(?)이 읽혔던 책에 비해 최진석 작가의 책은 읽는 동안 내내 어딘가 신영복 선생의 날카롭지만 따듯한 문체를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은 붓다 사후 제자들이 엮어 낸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 반야심경>>의 최진석 표 해설서이다. 

불교의 핵심 경전인 동시에 철학서. 작가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인류가 철을 조금씩 다루기 시작했던 2,500여년 전 개인 붓다의 깨달음이 현세의 인류에게 밝혀지고 있는 새로운 과학, 양자역학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은 다시 읽어도 놀랍다. 

 

우리는 양자역학에서의 파동함수처럼 확산되어 중첩 상태로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를 내재한 채 존재하고 있다가 인연을 매개로 수축해 다음 상태가 결정된다고 이해되는... 관심이 있던 양자역학의 이론이 불교 철학과 모순없이 이어져 설명된 것을 읽는 즐거움! 이는 내가 왜 주도적으로 내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 지도 깔끔하게 설명해준다.

 

일원론 혹은 이원론의 세계관 구분에 익숙했던 나는 다시 한 번 세계는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붓다의 정리에 탄복한다. 그걸 깨닫지 못하는 우리는, 하나인 우리가 그때그때마다 맺어진 관계에서의 역할 놀이에 심취해 각각 따로 존재하고 있다고 그렇게 철석같이 믿게 되었구나. 마치 바다의 파도를 셀 수 있다 생각하면서.



무엇가를 진실로 알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진실을 알아가면서 우리는 변화를 경험하고, 그 변화를 말미암아 달라지고 성장하는 것이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고통임을 절절히 깨닫는 것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시작이라 했다. 머리로 아는 ‘인생은 고통이다'는 의미 없다며. 진실로 그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어떻게든 그 생로병사의 고해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겠는가.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살만하다 생각하니 우리는 깨달음을, 해탈을 이렇게 매번 치워두고 살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러면서 행복하지 않고, 불안이 일상인 삶. 게으른 탓이다. 작가가 인용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의 구절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려는 것, 난 그것을 살아 보려 했을 뿐이다. 그게 왜 그리 힘들었을까?’ 자신의 고통의 원인을 직시하기 않고 손쉽게 외주 주고 쉬운 길을 간 탓에 타인의 행복을 거들 뿐 나 자신의 생생한 행복은 쟁취할 수 없었다는 지적이 뼈아프다. 

 

 

성장소설이라고 쓰고 '꿈 깨!'라고 읽는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데미안 Demian 작가 헤르만 헤세님을 소개합니다 사진으로 만난 그리고 를 읽고 난 후 연상되는 헤세의 이미지는 왠지 모를 동양적 현인의 풍모가 느껴졌는데, 그의 부모는 일찌기 인도에서 선교

thebrownbottle.tistory.com

 

 

본격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를 들면서 불교의 핵심경전 <<반야심경>>의 공(본무자성) = <<도덕경>>의 도(유무상생) = <<주역>>의 도(일음일양)이 같은 맥락임을 짚는다. 세계는 본래 본질을 근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공이나 도라는 단어는 세계가 관계로 존재한다는 말에 붙인, 그저 기호일 뿐이라고.

 

불교의 불이 사상을 통해 차안과 피안이, 속세와 불국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바라밀다’라는 행위는 그저 ‘건너가는’ 행위 그 자체를 말한다고 설명한다. 붓다는 그 행위를 지속할 수 있는 방편으로 수행방법을 계율로 남겼고, 건너가는 수행방법으로서의 팔정도가 반야심경의 바라밀.

 

깨달음에 이르고 싶은 사람이라면, 혹은 지적으로 좀 더 진일보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자신만의 규칙을 정해서 부단히 반복해야 합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어떤 묘한 경지는 누가 단순한 행위를 오랫동안 반복하느냐로 결정됩니다. 계율은 지켰다 안지켰다 하거나 잠깐 지키다 마는 일이 아닙니다. 평생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삶이 될 때까지.

 

생이 고해임을 직시한 후 진단을 내리고, 처방을 하고, 마침내 해탈을 이루어 낸 인간 붓다는 얼마만큼 기쁘고 자유로웠을까. 그의 구도 과정은 그저 삶이 허무하다는 걸 확인하고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기로 가득하다는 걸 확인하기 위했던 적극적인 발걸음이었다. 

 

형이상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한 귀납적 깨달음. ‘행'에 방점을 둔 불교 철학을 어렴풋이 이해할 듯하니 어쩌면 형식이 내용을 이끌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는 찰나, 작가는 ‘전도몽상’이란 말로 경고를 날린다. 지적인 투쟁을 미루지 말고 삶의 주도권을 가지라고. 

 

모든 것을 깎아낸 나만의 삶의 방식을 가진 자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했다. 익숙함을 버림으로 출가의 길을 가라고. 붓다가 ‘중도'를 강조했듯 ‘상황적 맥락을 초월해 탁월한 상태’로, 그렇게 자유롭게 살라고.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 마음을 고요하게 도와주기는 하지만 그 공간 자체가 그러하다고 자리매김하면 그 공간에 메인다는 것을, 내가 ‘성공’이라는 단어에 보이는 알러지 반응도 상을 지음으로써 스스로를 묶어두는 꼴이라는 것을 글을 읽을 땐 너무나 당연한데... 쉽지 않다. 

 

그래도... 이치가 그러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하다. 엉엉~

그럼 이제 주문을 외워보자.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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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가세, 건너가세, 저기로 건너가세.

저기로 다함께 건너가세. 깨달음이여,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