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
<<동물농장>>은 이렇게 읽게 됐죠
작가 채사장님이 <지서재>에 추천한 책들 목록에 <<공산당 선언>>이 있다. 책이 책을 추천한다고... 이 책을 읽으면서 조지 오웰의 책들을 연달아 만나게 되었다. 영국의 소설가로 특유의 풍자와 비판 정신으로 <<동물농장>>과 같은 제국주의와 파시즘을 비판하는 소설과 에세이를 여럿 발표했다. 동작가의 <<1984>> 그리고 최근 읽었던 <<마지막 수업>>의 <미국의 민주주의> 그리고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내용이 겹쳐져 풍자우화의 깊이가 달리 느껴지는 듯 싶다.
신조어 부자 - 작가 조지오웰님을 소개합니다
인도에서 출생한 영국의 작가이며 언론인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 1903.06.25-1950.01.21)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라는 필명으로 작품들을 출간했다. 민주 사회주의자 중 한명으로, 명료한 문체로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고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과 민주사회주의에 대한 지지를 표한 것으로 유명하다.
문학 평론, 시, 평론, 소설과 같은 작품을 남겼는데, <<동물 농장>>과 <<1984>> 두 작품이 특히 유명하다. 논픽션 작품으로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카탈로니아 찬가>> 등이 있다. 2008년 <타임스>는 1945년 이후 위대한 영국 작가 50선에 2위로 조지 오웰을 꼽았다.
조지 오웰의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대중 문화와 정치에 영향을 주고 있다. 조지 오웰이 만든 신조어인 빅 브라더, 사상 경찰(Thought Police), 신어, 이중 사고(doublethink)와 같은 언어와 그가 예견한 냉전 체제 등은 여전히 영향력 있는 개념이다.
이 정치 풍자 책의 대략적인 내용은
메이너 농장에서 인간 존스의 착취에 신음하던 동물들은 수퇘지 메이저의 대동세상의 꿈에서 비롯한 혁명 제안 하에 뭉쳐 농장주 인간 존스를 몰아내고 모든 동물들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이상향을 실현하고자 한다. 메이저는 칼 맑스를 의미하는데, 모든 인민이 평등한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주장했다.
이 정치 풍자 소설은 이렇게 동물들이 힘을 뭉쳐 이루어진 혁명이 어떻게 배반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혁명이라는 기치 아래 이상향 실현이 목표인 사람들과 권력 자체만을 추구하며 가담한 사람들 그리고 이후 현실 파악에 무지하고 무관심한 대중의 암묵적인 동의로 어떻게 절대권력이 타락하는지를. '네발은 옳고, 두발은 나쁘다'던 돼지들이 어떻게 두발로 걷게 되는지를.
책을 읽고나니... 답답하네요
소련의 혁명과 스탈린 체제의 부패를 상징적으로 그린 우화. 소련이라는 나라가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그 역사적 시간대를 같이 살았음에도, 아무 관심이 없었던 나. 조지 오웰의 <<1984>>와 <<동물농장>>을 읽으면서 부록 해제로 읽은 스탈린 체제의 독재 상황보다는 해방 후의 한반도 역사가 더 쉽게 연관되어 그려졌다. 주인 없는(?) 한반도를 차지하려던 미국과 중국, 이승만과 김일성, 그리고 김구의 암살과 북한 등. 읽을 때마다 안타깝고 분한 마음이 솟구치는 우리의 현대사 말이다.
읽는 동안 ‘절대권력은 필히 부패한다'와 ‘사피엔스 종에게 관용은 없다'는 말들이 생각났다. 더불어 저 독재체제가 자리잡는 데에는 우둔하고, 현실 파악을 하지 못했던 우매한 동물들이 제대로 한몫했다. 노전대통령이 생전 ‘깨어있는 시민'을 그리도 한서리게 주장했던 것이 무엇 때문인지가 이 책에 고스란히 씌여있다.
혁명 당시 자신들이 함께 만들었던 7계명이 소리소문없이 권력층 돼지들의 입맛에 맞게 조금씩, 요리조리 수정되고 있슴에도, 과거를 쉬이 잊고 눈앞의 개들이 두려워 과거에도 아마 그랬던 것 같았다며 쉽게 자신들의 과거를, 생각을 수정하며 비판하지 않는 대중들. 이런 편리한 침묵은 충직함으로 동물들 사이에서 신뢰받던 말, 복서가 끝내 말도살장에 끌려가 죽음을 맞는 비극이 일어나도 이제는 동요조차 일어나지 않고 돼지들의 거짓선전을 그저 믿게 된다. 그래, 편하게 살려면 믿으라고 니체도 경고했다.
모두가 ‘평등'한 이상향을 꿈꾸고 가담했던 혁명이었으나 글을 읽을 줄 알았던, 권력 자체만을 꿈꾸며 가담했던 소수 지식층이 지배계급이 되고, 혁명을 배반하고 있음을 읽지 못한 대중이 혁명 이전보다 더 착취당하는 계급이 되고 마는 부분.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지배계급과 피지배계층의 자리가 공고해지는가를 읽을 때에는 동저자의 디스토피아 소설 <<1984>>의 내용이 겹쳤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정치판과 한 점 다른 부분이 없다는 서늘함.
감옥에서 오브라이언이 한 말 중 서늘했던 것은 상, 중, 하의 (그 이름이 무어라 불렸더라도) 계급과 계급투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거였다. 상층은 그들의 위치를 영원히 지속하고 싶어하고, 중층은 상층과 위치를 바꾸고 싶으며, 하층은 상층이 누가 되더라도 지배자의 이름만 바뀔 뿐 자신들의 고달픈 일상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권력투쟁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중층은 자리를 바꾸기 위해 하층에게도 매력적인 제안을 해 그들을 포섭해 자리를 바꾸지만 바꾼 이후에는 또 똑같은 계급투쟁이 이루어지며, 하층은 바뀐 상층을 위해 체제 유지를 위한 고달픈 생계를 또 이어나간다는 사실.
<<1984>>
역사는 반복되고 있음이 여실히 보인다. 지금도 멀쩡히 있던 육사의 홍범도 장군 동상을 생전 그의 이적행위를 이유로 이전한다는 뜬금없는 뉴스.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은 도려낸 채 앞뒤만 붙인 악마의 편집. 지긋지긋해도 여전히 빨갱이 장사는 남는 장사인지... 답답하다. 여전히 우리의 해방후의 역사는 정리되지도, 청산되지도 않았고, 해방후 70년 이상이 훌쩍 넘었건만 지금도 대통령은 이를 철지난 이념이 아니라고 말했다. 다시 패를 나누자! 집토끼, 산토끼 그리고 중도층으로. 상중하층으로.
답이 있긴 할까요?
에리히 프롬의 경고처럼 대중이 눈 먼 ‘평등'에 치중하는 사이 ‘자유'는 점점 가치를 잃는다. 아니, 자유는 기득권만이 누리는 자유가 된다. <<동물농장>>의 돼지들처럼 ‘평등'의 가치로 유혹하며 권력 자체만을 탐하는 정치인들에게 현혹되지 말고 그들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지 매의 눈으로 감시하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
수퇘지 메이저가 꿈꿨던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대동세상. 그러나 소련의 정치 실험은 이미 실패로 끝났고, 북한도 같은 길을 걸어가는 듯 보인다. 그렇다고 반대입장이었던 우리가 살고 있는 자유경제 체제도 인간답진 못하다는 것은 한국에 와보니 더욱 여실히 보인다. 다시 혁명이 일어나게 될까? 아니면 토크빌의 예언대로 '촘촘한 규제의 그물로 덮어 그 누구도 그 절대다수이면서 동시에 침묵하는 군중을 뚫고 나갈 수 없게 되어, 인간의 의지가 분쇄당하지는 않지만 약화되고 굴절하며 종속적으로 살게’ 될까.
어쩌다 조지 오웰의 책들을 연달아 읽게 되고 나니 서평도 이리 ‘엄근진’ 문체인지... 다시 읽어보니 우습지만 머리 아픈 주제일수록 깊이 파고 들어야 한다. 편하게 치워버리고 보이는 대로 믿고 살다가는 어찌되는지를 이렇게 여러 책들이 부단히 경고를 날리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TV 종편만 보고 계신 아빠와 답없어 보이는 정치 얘기를 하기는 싫으나 적어도 자식 세대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을 때마다 알려드려야겠다. 김수한무거북이와두루미…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나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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