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책읽기

내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 채사장>>

소라언냐 2023. 10. 24.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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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Tat tvam asi&nbsp; &nbsp;네가 바로 그것이다



리디북 앱으로 받아서 네 다섯번을 반복해서 읽었던 책,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났던 책, 그리고 현재 나의 가장 사랑하는 책. 그렇게 여러번 읽고도 서평으로 남겨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니… 이런 시간이 주어졌음에 무척이나 감사한 마음이다. 

 

채사장님 덕분이예요

‘지적인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 2, 0’이라는 책 시리즈의 동저자인 채사장. 본인을 지식 소매업자라고 소개하는 그의 책들을 찾아 읽으면서 내 나름의 인문학을 위한 탐험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무방하겠다.

 

나도 이 책의 젊었던 채사장처럼 불안하고 마음이 바빴던게다. 철학이나 인문학은 수행자들처럼 속세를 떠난 사람들의 언어 유희 또는 나보다 똑똑한 사람들의 뭔가 고상한 사유 체계 정도로 구분하고 치워두고,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뜬구름 잡는 지식보다는 현재 내게 바로 적용할 실리를 배워야 한다고, 그렇지 않은 내용에까지 신경을 쓸 정도로 인생이 한가하냐며 스스로 그런 쪽에 관심이 가는 것조차 애써 차단했다.

 

이랬던 내게 우연히 만난 채사장의 책들은 나의 세계를 넓히는데 단초를 주었으며, 복잡하고 막연했던 세계에 대한 내 여행을 위한 나침반으로써 손색이 없었다. 

 

 

배운 바를 나의 언어로 남기는 즐거움

이 책은 다시 나의 서평만을 읽어보아도 채사장이 전한 메시지가 주르륵 떠오르게 마음에 들었던 챕터를 인용과 함께 좀 더 자세하게 남겨야겠다. 서평을 남기는 일이 이렇게 기대가 되다니! ‘모든 관계는 내 안에서 별을 이룬다’는 저자의 말로 시작하는 이 책은 나와 타인, 세계와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를 이루는 도구와 의미에 대해 이야기한다. 



타인

 

[ 별에 대하여 ]

모든 지식은 언젠가 만난다에서는 작가의 재수학원의 사회문화 과목 강사의 말을 빌어 지식을 얻는 과정을 설명한다. 별모양의 지식을 얻으려면 별모양에 대해 설명한 책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삼각형, 사각형, 원이 그려진 다양한 책들을 읽어야 그 모든 도형들이 내 머리에 들어와 비로소 별을 만든다고. 그간 이렇게 저렇게 남은 내 안의 잡다한 지식들과 생각들도 언젠가는 한곳에서 만나 내 삶에 대한 궁극의 지식을 만들겠지. 

 

 

[ 관계에 대하여 ]

나와 타인의 관계.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모두 자폐아다.

나의 존재라는 것에 의심을 가진 후부터 해답을 찾아보고 고민하던 나의 방황을 조금은 잡아준 챕터.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내용들을 설명해주지만 채사장 특유의 간결하고 솔직한 문장들이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또 있다는 깊은 위안을 주었다. 

 

외부 세상이라고 보고 있는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빛의 반사물을 내 시상세포로 인식해 머릿속에 비춰주는 이미지이라는 것을, 내가 만들었기 때문에 그 존재를 믿을 수 밖에 없다고 믿는 물건도 사실은 미립자보다 더 작은 입자로 나누고 나누면 존재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과학적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정말 나의 자아 밖에 외부 세계라는 것이, 타인이라는 존재가 과연 존재할까? 

 

당신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일수록 사회는 그것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당신의 자유, 당신의 내적 성장, 당신의 영혼, 당신의 깨우침, 당신의 깊은 이해. 그 어떤 것도 사회는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깊이 파헤칠수록 타인의 실존에 대한 의심과 더불어 외로움이 느껴져 몇번 건드리다 덮어두었던 불편한 진실에 다시 한번 마주할 수 있는 용기와 재각성을 불러 일으켜준 글. 

 

 

[ 이별에 대하여 ]

‘나와 세계의 관계’. 지구라는 물리적인 공간이 마련된 후에 나라는 존재가 와서 사는 게 아니라 나와 세계는 동근원적으로 생긴 것이라는 관점. 위의 자폐아와 같은 인간의 한계를 고려해볼 때 유신론자와 무신론자의 세계가 다르듯이 ‘세계’는 언제나 ‘자아의 세계’이다. 객관적이고 독립된 세계는 내게 결코 드러나지 않고, 나는 내가 해석한 주관적 세계에 갇혀 산다.

그러므로 만남이란 놀라운 사건이다. 너와 나의 만남은 단순히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넘어선다. 그것은 차라리 세계와 세계의 충돌에 가깝다. … 헤어짐이 반드시 안타까운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흘러 마음의 파도가 가라앉았을 때, 내 세계의 해안을 따라 한번 걸어보라. 그곳에는 그의 세계가 남겨놓은 시간과 이야기와 성숙과 이해가 조개껍질이 되어 모래사장을 보석처럼 빛나게 하고 있을 테니.

 

 

[ 소년병 이야기 ]

어째서인지 매번 이 책을 읽을 때마다 다 아는 스토리인데도 꼭 이 이야기를 읽을때 눈물이 터져버린다. 채사장의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체와 ‘다른 시간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만날 수 없다’는 내용의 연인의 슬픈 이야기가 너무나 절묘하게 어우러져서일까? 나에게 남긴 위로인 것 같은 두 문장.

불안한 영혼이 안심하고 세상과 마주할 수 있기를.
하지만 걱정할 건 없다. 그녀의 겨울은 언젠가 끝날 것이고, 초원은 어김없이 들꽃이 점령할 것이며, 바람은 다시 따뜻해질 테니. 그리고 약속처럼 그들은 언젠가 만나게 될 것이다.

 

세계

 

세상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존재가 태어나고 어쩔 수 없이 자기만의 시간을 고스란히 지내야만 한다. 오랜 시간 세상을 살아가며 얻게 된 소중한 경험과 이해는 오래 산 존재들과 함께 침묵 속으로 사라지고, 세상은 이 세상이 처음인 싱싱한 존재들이 장악한다. 그래서 아름다운게 아니겠는가. 세상이 이렇게 치열하고 다채롭고 활력 넘치는 이유가.

 

[ 인생에 대하여: 여행할 시간 30년이 주어진다면 ]

 

[ 노력에 대하여: 열심히 살아도 괜찮은가 ]

 

[ 왜 나는 나에게 집착하는가: 던져진 세계에 대하여 ]

 

[ 시간에 대하여: 나의 이야기 ]

대량으로 발견된, 고대 이집트의 도시 옥시린투스의 유물들의 내용은 연애편지, 초대장, 청구서, 계약서, 계산서, 영수증, 연습장 같은 것들이었다. 보통의 사람들이 그저 자신의 삶 안에서 최선을 다해 마음 쓰며 살았던 흔적들. 

 

통념과는 반대로 흔한 것은 이들이다. 한 가지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거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한 가지 목표에 모든 것을 거는 행위다. … 한가지에 모든 것을 거는 이가 실패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포기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간 어딘가에서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도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다.

… 반대로 당신이 자신을 아끼면서 이곳까지 왔다면, 최선을 다하지 않고, 모든 것을 쏟아붓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고, 걸어오는 동안 발견한 풍경들을 감상하며 이곳에 도달했다면, 당신은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걸을 것인가, 쉴 것인가, 다른 길로 들어설 것인가.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길가를 둘러보며 여유 있게 걷는다는 것. 그것은 한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가기 위해 신중히 걷는 것이다. …  이제 여행자의 눈으로 그것들을 볼 시간이다.
마음 쓰던 영화가 끝나듯, 감정을 소모하며 읽던 소설의 마지막 장이 넘어가듯, 그렇게도 아끼고 애지중지하던 나라는 존재도 사실은 하나의 배역이었고, 소설의 등장인물이었고, 내가 반복해서 선택해왔던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죽음을) 능동적인 선택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언제 어떻게 닥쳐올지 알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죽음을 전체 과정의 마무리로, 수작업의 마감질로, 여행의 마지막 날로, 긴 문장의 마침표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가진 이에게 죽음은 삶과 단절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길고 긴 인생을 마치고 결실을 수확하는 시간이 된다.

 

나의 자아의 본질이 여행자라면, 이제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나는 남은 30-40년의 인생을 어떻게 보내야할까? 유물로 기억되는 옥시린투스의 보통 사람들처럼 여행 경비를 계속 모아야 할까? 계속 열심히 노동하고, 재산을 모으고, 이를 기록하고, 만족하고, 아쉬워하며…  더 많은 노동의 결과물을 더 모을수록 떠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지금까지 나름 착실히 살아왔다고 여기는 내 경험도 조언한다. 이제는 인정을 받기 위한 투쟁을 그만두고 돌아갈 때 뿌듯하게 여길 수 있는 여행을 해야한다고. 




도구

 

이야기는 나와 세계를 관계 맺게 하는 도구다. 우리는 날것 그대로의 세계를 볼 수 없다. 어떤 안경이 되었든 반드시 집어들어야 하고, 그 안경의 색깔이 만들어내는 명도와 채도 안에서만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다. 세계의 거대함은 이야기를 통해 나에게 의존하고, 나는 이야기를 통해 세계의 거대함을 포용한다.

 

[ 자본주의가 빼앗아 가는 것들: 현실에 대하여 ]

자본주의는 생산자로서의 지위를 빼앗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생산자로서의 역할의 축소와 고정이다. 아주 고도로 분화된 업무의 일부분만을 수행하도록. 작가는 춤과 노래, 말과 대화 그리고 사유와 지식을 빼앗겼다고 짚는다.

 

처음 이 부분을 읽기 전까지 ‘기계의 부품처럼’ 소모되는 노동자의 문제는 인지했지만 춤, 노래, 대화, 사유와 지식의 생산자로서의 역할까지 빼앗겼다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춤과 노래에 능하다는 동이민족의 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6시 내고향이나 전국 노래 자랑에서 노래만 나오면 흥에 겨워 앞으로 나와 춤을 추고 즐기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그저 촌노인네들의 흥으로만 여겼었는데… 자본주의 사회에 나고 자란, 상식적인 나는 결국 놀지 못하고, 관계 맺지 못하고, 생각할 줄 모르는, 단지 철저하게 소비하기 위해 노동하는 존재로만 내 평생을 살았구나… 가슴이 서늘해진다. 사유가 없는 사람이란...

 

작가가 짦게 인용했던 마르크스의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아무도 독점적인 활동 영역을 갖지 않는 세계’를 서술한 부분을 읽으면 지금도 그 이상향이 그립다.

내가 오늘은 이것을, 내일은 다른 것을 할 수 있고, 아침에 사냥 가고 오후에 고기 잡으러 가며, 저녁에는 가축을 돌보고 저녁식사 후에는 비판에 몰두할 수 있게 되어, 나는 사냥꾼이나 어부, 목자나 평론가와 같은 전문인이 되지 않고도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곧바로 ‘공산당 선언’을 다운받아 읽었다. 뒷부분은 번역이 이상한지 읽히지 않아 포기했지만 지금의 나는 40년이 넘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난 이후의 공감인데, 어쩌면 저 시대에 이미 저런 통찰력을 가지고 비판할 수 있었는지. 또 70-80년대에 한국인으로써 저 책을 대했다면 얼마나 가슴이 뛰었을지 상상이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연스러움을 비판해야하고 점검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여지껏 살아온 방식대로 나머지 내 인생도 그렇게 소비자로서만 살 수 밖엔 없는, ‘눈 뜨고 휘둘리는’ 구조이니까. 

 

 

[ 책을 읽는다는 것: 언어에 대하여 3 ]

우리가 앞서 체험한 경험이 책을 통해 정리되고 이해될 뿐이다. … 이해의 앞에는 언제나 체험이 있다. 그 반대일 수는 없다.

가능한 어릴 때부터 책 읽는 습관을 들여주는 것이 좋다는 것이 진리가 아닐 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준 챕터. 사실 공산당 선언을 읽으면서 ‘계급 갈등’과 현 자본주의에 패해와 비판이 소름끼칠 정도로 술술 읽혔다는 것은 나와 내 주위 사람들의 지난한 불안을 경험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기 싫은 일을 소위 영혼을 갈아넣어 일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고용불안을 느껴보지 않은 이들에게 이 책이 이렇게 가슴 뛰게 읽힐 수 있을까? 아니 이해란 걸 할 수가 있을까? 고전이 난해하다고 느낀 건 경험이 선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글은 읽어도 내용은 공감할 수는 없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래서 행운이다. 당신이 충분히 나이 들었다는 것은. 서른을 넘기고, 마흔을 넘기고, 노동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사회의 부조리와 대면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돌보고, 이별하고, 삶의 누추함과 고통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 그것은 당신이 이제야 비로소 인류가 오랜 시간에 걸쳐 남겨온 보석 같은 고전들을 읽을 준비가 끝났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은 그래서 그렇게 주옥같은 내용들을 다음 세대들에게 한시라도 빨리 알려주고 싶은 욕심에 권장 도서 리스트에 고전들을 올려두셨던 가보다. 이제 그 권장 도서 목록의 책들을 한권 한권 읽어보고 싶다. 아마도 이 나이에 스펀지의 흡수가 무엇인지 보여줄 터. 

 

 

의미

 

여행자. 그래서 이것이 모든 나라는 존재의 숙명이다. 여기에 이유나 목적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이 지루하고도 긴 무한이라는 시간 동안 이 우주에서 저 우주로 눈뜨고 휘둘리며 여행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세계를 여행하다 이곳에서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일까.

 

[ 꿈에 대하여: 꿈이 삶을 가르친다 ]

그래서 허망한 것일까. 우리가 알고 있기에. 이렇게 마음 쓰고 있는 현실도 끝과 함께 사라지고 만다는 근원적인 진실을 우리가 대면하고 있기에 말이다. 그렇기에 허망함의 감정이란 일상 속에서 가끔씩 나타나는 불안정한 마음 상태가 아니다. 허망함은 존재론적이고 본질적이다.

 

[ 죽음에 대하여: 상실과 소멸이 우리를 일으켜준다 ]

 

[ 노화에 대하여: 죽음이 무르익어 가는 과정을 지켜본다는 것 ]

잃어간다는 것. 매번 경험하면서도 그때마다 새로고 적응되지 않는 이 사건들은 왜 이리도 삶의 후반부에 많이 준비되어 있는 것일까. 우리의 삶을 계획한 그 최초의 의지는 도대체 우리가 상실 속에서 무엇을 배우기를 기대했기에 잃어가는 시간을 이리도 오래 준비해둔 것일까.

큰 이모의 부고 탓에 죽음에 대한 글이 나를 더 붙잡는지 모르겠다. 치매로 자아를 상실한 채 5년이 넘는 긴 시간을 보냈던 이모. 그 동안 이모는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과거를 살고 계셨을까 아니면 시간의 부재를 살았을까. 그렇게 오랜 기간을 내가 누군지 모르고 살다 삶을 마치는 인생에서 그 기간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모는 외로우셨을까? 지금의 나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이모의 그 시간들도 이해할 날이 올까?

 

 

[ 결론을 향하여 ]

나는 무엇인가 > 보고 있음 = 나는 관조자 > 관조자의 특성은 빛 = 나는 빛 > 내가 나의 본질인 아트만이고, 동시에 우주의 본질인 브라흐만이다. 내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눈을 감아도 색을 보고, 꿈을 꿀 때도 색을 보며, 상상만으로도 빛을 부른다. … 그렇다면 이 내면의 빛은 도대체 무엇이고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외부에서 오는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내 내면의 특성이다. 그렇다면 내 내면은 무엇인가? 그것은 관조자였다. 그리고 관조자는 자기 내면을 보는 자였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결론 내려야만 한다. “세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빛이다. 그리고 빛은 관조자의 특성이다”

 

의식 = 세계 =  자아 = 빛

내 앞에 펼쳐진 빛으로서의 세계가 곧 나 자신이라는 진실. 이 심오한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서구철학은 이를 ‘현상’이라고 부르고, 고대 인도에서는 ‘마야’라고 부르며, 불교에서는 이를 ‘색’이라고 말한다.

 

가장 오래되고 부족하지 않고 소멸하지 않는 완벽한 존재인 최초 의식이 가질 수 있는 단 하나의 의문,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면서 답을 얻기 위해 생성과 소멸을 경험하는 방법을 택했다고 했다. 죽음, 한계, 유한성, 끝을 경험해 역으로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기적 수업 (Course of Miracle)’이라는 책에서도 이와 같은 설명을 하는데, 창조하는 최초 의식이 존재의 의미에 의문을 가지면서 빅뱅이 생겼고 창조자의 능력이 있어 끊임없이 분열 분화하여 현재 내가 나라고 여기는 존재와 내가 보고 있는 세상을 만들었다고. 

그리고 이렇게 인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우리가 도달하게 될 최후의 답변은 나의 답변을 넘어 최초의 의식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답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과 내가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운명처럼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테니.



나의 작은 철학책

읽을 때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다시 읽으면 이런 내용도 있었지 하고 되새김을 했었는데, 드디어 나의 말로 남김으로써 이제 이 책은 오롯이 나의 책이 되었다. 

 

꼬박 한 나절을 걸려 이 서평을 남기는 동안에도 ‘이렇게 종일 서평만 잡고 있어도 되나?’하는 막연한 불안감과 죄책감 같은 편치 않은 기분이 중간중간 들었지만 이젠 이런 습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이만하면 됐다. 그간 이렇게 저렇게 남은 내 안의 잡다한 지식들과 생각들도 언젠가는 한 곳에서 만나 내 삶에 대한 궁극의 지식을 만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