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책읽기

죽음을 사는 사람들 <<노르웨이의 숲 - 무라카미 하루키>>

소라언냐 2023. 10. 10. 15:26
반응형

노르웨이의 숲

 

세상에! 유튜브 뮤직에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상실의 시대)>>을 읽을 때 틀어놓을 독서 BGM Norwegian Wood (This bird has flown) 한시간 짜리가 있다. 고맙게도 배경음악 깔고 서평을 쓰는 맛이란.

 

원제 <<노르웨이의 숲>>  한국판 번안 제목 <<상실의 시대>>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님을 소개합니다

책에 소개된 사진 속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젊은 시절 후드티에 까만 자켓을 걸친, 평범했던 나의 대학 시절 옷차림을 하고 있으나 1949년 생으로 우리 엄마뻘 되시겠다. 책의 뒷부분에 하루키 신드롬에 대해 자세히 서술되어 있어 작가와 그의 작품이 끼친 세계적인 영향력을 알게 되어 놀랐다.

 

생각해보면 내가 대학을 다녔던 90년대 중반 유난히 일본 소설들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많이 올랐었던 기억이 있다.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는 물론 <<앵무새 죽이기>> <<빙점>> 같은 소설들. 라디오, 신문 등 다양한 매체에서 광고를 했던 덕에 나도 마치 이 책들을 읽었던가 착각했을 정도.

 

<<상실의 시대>>는 정확히 68혁명을 거친 직후의 일본을 배경으로, 당시 20대를 맞이하는 세대를 묘사하고 있다. 작가도 2차대전 일본 패망후 전쟁의 폐해를 극복하고 재건에 힘쓰던 시기에 유년과 청년기를 보냈고, 프랑스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전세계적 운동이었던 68혁명의 파도를 함께 겪었으니 이렇게 글로벌하게 공감받을 수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을 써낼 수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68이라는 혁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내가 느꼈던… 어쩌면 나는 그 그림자도 모르고 있었을까 했던 충격과 당혹감. 혁명의 나라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던 그 큰 물결이 이웃나라 일본까지는 상륙했었으나 바로 그 옆의 한국은 박정희 독재하에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패싱되었다는 안타까움. 

 

 

책 내용을 소개할까요

책의 주인공 와타나베는 지금의 나나 94년 입학 당시의 내가 읽어도 전혀 이질감이 없을 인물이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전공 교수가 요구한 첫 리포트는 생뚱맞게도 ‘X세대란 누구인가'였던 기억이 난다. 별다른 종특이 발견되지 않아 X라고 부른다는 그 세대. 선배들은 말했다. 귀신같이 94학번부터 총학에 신입생들이 1도 오지 않는다고. 이제 학생운동의 명맥이 그만 끊길 것 같다는 하소연을 하면서.

 

소설 전반에 주인공 와타나베가 정치나 사회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은 전무할 뿐더러 대학생인 그는 소위 ‘전공투' 같은 학내 투쟁에 전혀 무관심하다. 그저 학교가 문 닫으면 알바를 하고 재즈 음악을 들으러 다니는 등 개인적인 관심사와 인간관계에만 몰두하는 그. 그리고 그런 그가 전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질 뿐만 아니라 그런 그에게 호감마저 보이는 등장인물들.

 

그렇게 엮어보자면 나와 하루키는 동시대적 공감대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상실의 시대>>를 모종의 자서전 같은 책이라고 치면, 하루키와 90년대 중반 당시 대학생이었던 우리. 어쩌면 당시 일본과 우리는 한 세대 정도 간극이 있었던 거란 생각이 든다. 부모와 자식 세대만큼의 차이 말이다. 

 

우리보다 더했으면 더했던 전체주의와 집단주의의 끝판이었던 국가 일본에서 들려온 개인의 자유에 대한 책. ‘모든 금지를 금지하라'는 68혁명의 개인의 자유를 향한 모토는 <<상실의 시대>> 전반에 흐르고 있다. 사상에서도, 집단주의에서도 자유롭지만 그간의 금기였던 원나잇 스탠드를 포함한 섹스와 자살, 죽음에 대해서도 거침이 없다.

 

그러니 <<상실의 시대>> 내용이 출판 당시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우리는 피흘리며 독재 정권과 싸우고 드디어 민주정권을 수립한 뒤에도 서로의 이념 딱지를 떼지 못한 채 먹고 사는 재건에만 매몰되어 있을 때 그 모든 이슈에서 훌훌 홀가분하게 해방되어 오롯이 개인사에, 그 너머 죽음에 집중하고 있는 와타나베를 만나면 말이다.

 

 

이제 또 그만큼의 시간이 흐른 후 만나게 된 <<상실의 시대>>는 다르다. 1990년대 전후 고도 성장기에 느끼는 개인의 소외 그리고 전통 가치의 상실에서 비롯된 상시적인 불안감은 지금도 동시대적으로 읽힌다. 이제는 전체주의를 대신하는 자본주의 하에서 부속품이기를 거부하는 메시지로도 읽힌다. 또 다르게는 드라마 <오징어 게임>처럼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장치라는 것도 있는 민주주의의 허상도 겪어본 지금의 우리는 작가가 말하고 있는 기즈키와 나오코의 죽음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안다. 그 일상에 깔린 소외, 상실, 허무함. 죽음을 사는 사람들.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2장_ 죽음과 마주했던 열일곱 살의 봄날

… 그때까지 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삶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있었다. 즉 ‘죽음은 언젠가는 확실히 우리는 자신의 손아귀에 쥐게 된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죽음이 우리를 사로잡는 그 날까지 우리는 죽음에 붙잡히는 일이 없는 것이다’ 하고. 그러나 기즈키가 죽은 밤을 경계로 해서, 나로선 이제 그런 식으로 죽음을 (그리고 삶을) 단순하게 파악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있는 존재 따위가 아닌가. 죽음은 ‘나’라는 존재 속에 본질적으로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이며, 그 사실은 아무리 노력해도 잊어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열일곱 살의 오월 밤에 기즈키를 붙잡았던 죽음은, 그때 동시에 나를 붙잡기도 했던 것이다. 나는 그런 공기덩어리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열여덟 살의 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심각해지지도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심각해진다는 것이 반드시 진실에 가까워진다는 것과 같은 뜻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어슴푸레하게나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죽음은 심각한 사실이었다. 나는 그런 숨막히는 이율배반 속에서 끝없는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확실히 기묘한 나날이었다. 삶의 한복판에서 모든 것이 죽음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11장_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분명히 그것은 진리였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시에 죽음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이런 것이었다. 그 어떤 진리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어떤 진리도, 그 어떤 성실함도, 그 어떤 강인함도, 그 어떤 부드러움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그것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인가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 대해서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나오코가 죽은 이후 와타나베는 그녀의 옷을 입고 찾아온, 나오코의 또 다른 소울 메이트였던 레이코와 나오코와의 이룰 수 없었던, 걸림이 없는 합일의 관계를 의미하는 성관계를 갖고 헤어진 후, 반대급부의 피가 통하고 생기 넘치는 여자, 미도리에게 전화해 ‘이 세상에서 너 말고 내가 원하는 것 아무것도 없다, 너와 만나 이야기 하고 싶다, 모든 걸 너와 둘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라고 말한다. 미도리가 지금 어디있느냐고 묻는 질문에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라고 반문하며 자신의 처한 상황과 위치를 가늠하려 하며 소설을 마친다.

 

 

죽음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내게는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원제보다 <<상실의 시대>>가 더 와닿듯 표지의 부제처럼 ‘젊은 날 슬프고 감미롭고 황홀한 사랑 이야기’라기 보다는 ‘죽음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혔다. 죽은 친구, 죽음과 고전했던 애인, 그리고 그들의 죽음을 겪은 와타나베. 면역이 생기는 죽음은, 상실감은 없듯 삶의 허무함도 그러할 것이다. 종국엔 죽음의 손아귀에 잡힐테니까.

 

그럼에도 그 허무함과 상실감을 동력 삼아 살아갈 이야기. 삶은 곧 죽음이기에. 살면서 만나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 그 상실과 허무함을 실컷 애도한 이후 또 나의 정해진 시간까지 피가 돌게 살아야 하는, 상시 나의 위치를 조율해가며 사는, 아니 동시에 죽어가는 것이 인생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