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책읽기

나를 불편하게 하는 오래된 지식 <<열한 계단 - 채사장>>

소라언냐 2023. 9. 28.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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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계단

 

 

믿고 보는 채사장님의 책이예요

독서모임에서 추천된 반가운 채사장의 책. 내게는 믿고 읽는 작가인 채사장의 책이었기에 읽고 싶기도 했지만, 대체 그는 어떻게 그렇게 방대한 양의 책들을 읽었는지, 어떤 계기가 있었던 건지 작가가 궁금해 꼭 읽고 싶었던 책이기도 했다.

 

성장. 이것은 일생이라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내가 성취해야만 하는 숙명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장에 이를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우선 표류하는 자신을 깨뜨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외부의 힘이 필요하다. 그 외부의 힘이란 나를 불편하게 하는 오래된 지혜다.

 

 

 

제게도 나름의 독서 여정이 있었군요 :D

작가는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의 말을 인용해 무성한 백발과 깊은 주름을 가진 노인의 외관으로는 그가 오랜 인생을 살았는지 그저 오래 생존해오기만 한 건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나도 중년을 지나며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고 스스로 믿다가도 이유를 알 수 없이 허망하고 헛헛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는데, 이는 세상의 인정을 받기 위해 그저 표류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반증 아닐까?

 

두려운 일이다. 허망한 감정이 두렵다는 것이 아니고, 사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그 감정을 그저 치워두고서 허망하다는 그 감정이 주는, 성장해야 한다는 그 싸인을 외면하고 살게 됨으로써 마지막 순간에 크게 후회하게 될 일 말이다.

 

작가는 나를 깨뜨리는 외부의 힘으로 불편한 독서를 권하며 문학 - 기독교 -  불교 - 철학 - 과학 - 이상 - 현실 - 삶 - 죽음 - 나 - 초월이라는 본인의 독서 여정을 독자와 나눈다. 되돌아보니 나의 경우도 시기마다 굵직한 독서 카테고리들이 있었다는 점이 반가워 글로 남긴다.

 


 

나의 출발은 현실이었다. 돈과 시간 부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 자본주의에 사니 자유로운 시간을 누리려면 우선 돈 걱정이 없어야 했다. 론다 번의 <<시크릿>>으로 시작한 나의 본격적인 독서는 이미 부자인 사람들이 그들의 성공 노하우를 알려준다는 책들로 이어졌는데 사실 실전 팁들이라기 보다는 돈의 속성이나 돈을 대하는 태도와 같은 책들이 더 많았다. 뭔가 팍 꽂히는 팁은 없이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쓰기야? 세속적인 부유한 삶을 누리고 있는데도 영적으로 빈곤하지 않을 수가 있다고? 기독교를 믿는 집안에서 자라 부자가 천국가기는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믿고 있던 내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마음수련원에 등록하고 명상을 배우며 영성서적들을 읽었다. <<우주가 사라지다>> <<기적수업>> 등 영성 서적은 종교 서적들과도 궤를 같이 했다. 기독교 서적 중에는 비교종교학자가 쓰고 해설한 <<도마 복음>>이, 그리고 내게는 익숙치 않았던 불교의 교리를 설명해주는 책들이 특히 인상 깊었는데, 각기 다른 어휘들로 설명했지만 나의 영적 성장을 가로막는 자아, 에고에 대해 알려주는 내용들이었다. 심지어 부자가 되고 싶어 읽었던 책들에서도 내가 보고 느끼는 이 세상이 모두 허상이라고 했다. 책들을 읽다보면 정말 그렇다 싶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 사람을 이렇게 홀리는건가. 

 

영성 분야를 잠시 접고, 우주의 오래된 역사를 알려주는 과학 책들과 다큐멘터리들을 읽고 보았다. 학교에서 공부했던 내용들이 나오니 안심이 된다. 그래 나는 정신 똑바로 박힌 사람이지. 뉴턴, 아인슈타인, ... 이 사람들은 과학자들이니 정확하게 이 세상을 이해한 바를 설명해 줄거야. 편견 없이 재반복이 가능한 데이터들로 사실만을 말하는 사람들 아닌가. 그런데 이상하다. 믿었던 아인슈타인마저 이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을 뿐 허상이며, 이것은 철학이 아니라 과학이라고 말한다. 이제 나는 어쩌나... 에너지 보존의 법칙도 내가 알고 있던 그 법칙이 더 이상 아니다. <<왓칭>>으로 시작한 양자물리학이 끈이론으로 가면서 어지럽기만했던 내 세상에 뭔가 내가 이전에는 몰랐던 것이 어렴풋이 보이는 듯했다. 게다 우주의 언어라는 수학에 대한 경이로움까지!

 

과학 관련 책들을 읽는 동안 예전에는 천재들이 철학, 과학, 수학, 예술까지 두루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과학 관련 책들을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철학 쪽으로도 이동이 쉬웠다. 2000년도 더 전에 살았지만 지금을 사는 나를 관통했던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던 그 베짱이 궁금해 니체를 읽었고, 크게 감동 받았다. 정말이지 허무주의에 빠져있던 내게 조금 맛 본 니체의 철학은 말그대로 단비와 같았다. 

 

자연스런 정반합의 과정이었는지 나의 관심은 인간의 삶의 이야기인 인문학 책들로 갔다. 이러저러한 책들을 읽다가 드디어 만난 채사장의 책들! 생각해보면 그간 내게 채사장의 팟캐스트 ‘지대넓얕'을 전했던 지인들도 왕왕 있어 관심은 있었는데 나와 채사장이 만나는 때는 따로 있었던가 보다. 그 지나친 간략화로 비판을 받기도 하는 <<지대넓얕 1, 2>>와 채사장의 다른 책들을 읽으면서 탈출구는 없어 보여 괴롭기도 했지만 자본주의의 어두운 현실을 직시하기도 하고, 알지도 못하면서 외면만 했던 공산주의, 사회주의 등 다양한 체제에 대한 큰 실험들이 눈에 들어오는 계기였다. 깨어있는 시민이 되어야지.

 

나의 작은 철학책인 <<우린 언젠가 만난다>>와 이 책 <<열한 계단>>를 읽으면서 신비와 죽음에 빠졌다. 사실 ‘신비'라는 서적의 카테고리가 있는지도 몰랐다. 하긴 도서관에서도 UFO부터 별 잡다한 미스테리 책들을 그곳에 분류해둔다지 않는가. 한국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기 어려운 분야다. <<티벳 사자의 서>>를 읽고 KBS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죽음을 가까이 두고 묵상하면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가 선명해진다는 것이 감탄스러울 뿐이다. 이런 지혜를 얻을 수 있다니 나이 먹는 것이 싫지 않다. 

세상의 모든 텍스트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텍스트에서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그 지식에 대해 앞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책은 우리가 알고는 있지만 정리하지 못했던 것들을 언어화 해줄 뿐입니다. 나의 체험을 벗어난 것들은 나에게 체험되지 않습니다.

 

나를 깨뜨리는 외부의 힘, 불편한 독서

자신을 지식 소매상이라고 소개하는 채사장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작업 덕분에 내 머릿속에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지식들을 대략 정리해 자리를 정해 보관할 수 있었고, 내가 나와 세계의 관계를 규명하는데 그간 온통 마음을 쏟고 있었음을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무지의 지를 얻은 기쁨. 이렇게 작가의 말로 정갈하게 묶어져 나온 책들을 읽을 수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주변을 정리한 후 느끼는 그 개운함과 비슷하달까? 

 

나름의 독서 여정을 정리해보니 불편하게 느껴졌던, 스스로 금기시 했던 분야가 역으로 나의 관심 분야였음을, 나의 의식의 지평을 여기까지 이만큼이나마 넓혀오려면 반드시 필요했던 여정이었음이 보인다. 이제 나의 개인적인 독서여정은 신비를 지나 고전으로 향하는 중인것 같다. 작가의 말대로 지금의 계단은 끝이 아니라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나는 이제 고전들을 통해 나를 깨뜨려줄 불편한 지혜를 파헤쳐 만나 볼 준비를 갖췄고, 그 큰 즐거움을 살짝 알아버렸으니 고전을 쓴 작가들과의 시간을 뛰어넘는 연대가 있어 점점 풍요로우리라.  

 

 

독서모임을 하면서 책을 읽을 때마다 서평을 나의 언어로 남기는 작업을 통해 내 생각들을 다시 한번 정리하게 된다. 필요할 때마다 쉽게 꺼내 복기하기 편하게. 비즈로 악세서리를 만드는 취미가 있는데, 구슬들은 정말 엮어두면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결과물들이 나와 재밌다. 독서 후 서평 남기기 또한 시간과 노력이 드는 작업이지만 이는 나의 평생에 걸쳐 누릴 즐거운 창작 놀이임이 분명하다. 놀 일 천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