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책읽기

윤회의 강물 비유가 압권 <<싯다르타 - 헤르만 헤세>>

소라언냐 2023. 9. 11.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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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Siddhartha)

 

Hermann Karl Hesse (1877/07/02 ~ 1962/08/09)

 

작가 헤르만 헤세님을 소개합니다

사진으로 만난 그리고 싯다르타를 읽고 난 후 연상되는 헤세의 이미지는 왠지 모를 동양적 현인의 풍모가 느껴졌는데 그의 부모는 일찌기 인도에서 선교사 활동을, 외삼촌 또한 일본에서 활동한 불교 연구의 권위자였던 그의 집안 배경이 있어 그의 작품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가 더 궁금해진 나는 이러저러한 작가에 대한 글들을 읽다 심리분석학 교수가 작성한 논문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는데, 그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키워드들은 기독교적 경건주의와 가족으로부터의 트라우마, 전쟁 그리고 10여년에 걸친 칼 융 학파를 통한 심리분석학 치료로 정리된다.
 
<<페터 카멘친트>>로 일약 독일어권에서 성공한 그는 이후 전업 작가의 길을 간다. 멜랑콜리라는 신경증 진단을 받았던 그는 펜을 놓아야 할 정도로 우울증이 심해지면 심리분석 치료를 받고, 경과가 좋아질 경우 역작용으로 경조증을 앓게 되는데 왕성한 집필들은 대부분 이때 이루어졌다고 한다.
 
우울증은 헤세 본인에게는 지난한 경험이었으나 동시에 작품 활동을 위한 보고 그 자체였으므로 병을 치료하지 않겠다고 할 만치 그의 작품들은 그 자신의 치료를 위했던 심리 분석과 증상의 호전, 악화와 궤를 같이하는 듯 보인다. 
 
세 번의 범상치 않았던 결혼 생활과 독일과 스위스의 이중 국적. 두 번의 세계 대전과 대공황을 겪은 작가는 2차 세계 대전시 반전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고국 배신자의 프레임과 함께 그의 작품은 인쇄에 필요한 종이를 배당해주지 않는 나치의 탄압을 받게 되고 스위스 국적을 취득하게 된다. 고국이 패망한 후 노벨상을 받게 되고, 이후 독일 정권에서도 그에 대한 부정적인 비판들을 지워내면서 독일의 대문인으로 추앙하게 된다.
 
대표적인 저서들로 필독서들의 일부였던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서>> <<전쟁과 평화>> <<나르치스와 골트문트 (지와 사랑)>> 그리고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유리알 유희>> 등이 있다.
 
 
 

책 내용을 소개할까요

<<싯다르타>>. 처음에 제목만 알고 있을 때에는 막연히 고타마 싯다르타, 즉 석가족 부처님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인 줄 알았으나 동명이인이었슴 주의. 중간중간 나오는 인도의 범, 아트만, 베다와 우파니샤드 등에 대한 어휘도 <<지대넓얕 - 제로>>를 읽은 덕인지 걸림없이 이야기는 쉽게 읽혔다. 오호호 배운 사람~
 
내가 왜 여기에 와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바로 나에 대한 비밀을 깨닫는 것은 머리로 공부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하고 고유한 본인만의 체험이라는 믿고 있는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번뇌했던 싯다르타를 만나 너무나 반가웠다. ‘강물의 이야기’라는 탁월한 비유로 이 세계가 하나라는 (민음사 번역의 책에서는 ‘단일성'이라 번역했지만 나는 채사장의 ‘일원성'이 더 와닿는다) 일원성과 동시성의 비밀을 설명하는 작가. 
 

“무엇 때문에, 아무 흠잡을 데 없는 아버지가 날이면 날마다 죄업을 씻어 내어야만 하며, 날이면 날마다 스스로를 정화시키려고 애써야만 하며, 날이면 날마다 똑같은 그 일을 새삼스럽게 반복하여야만 하였을까?”

 
부처님과 동시대를 살고 직접 만나기까지 한 것으로 묘사된 싯다르타는 지체 높은 바라문 집안 배경, 출중한 외모와 학식 그리고 사람들의 사랑까지 이 모두를 뒤로 한 채 구도의 길을 떠난다. 고타마 석가모니와 매우 비슷하게 출가한 후 사문들과 함께 지내면서 사색하고, 단식하고, 기다리는 법을 수련하고 마침내 모셨던 스승을 떠날 때에는 스승을 제압할 정도의 경지에 올랐으나, 여전히 깨달음의 갈증을 느끼던 싯타르타는 완성한 자, 고타마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고 절친 고빈다와 함께 그의 설문을 들으러 떠난다. 우연히 고타마와 독대할 수 있었던 싯다르타는 모든 것을 이룬 자의 면면에 압도되지만, 이같이 말한다.
 

“세존께서 몸소 겪으셨던 것에 관한 비밀, 즉 수십만명 가운데 혼자만 체험하셨던 그 비밀이 그 가르침 속에는 들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점이 제가 가르침을 들었을 때 생각하였고 깨달았던 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저는 당신의 가르침을, 당신을 본받는 일을, 당신에 대한 저의 사랑을, 그리고 승려들의 교단을 저의 자아로 만들어, 저의 자아가 오로지 겉모습으로만, 오로지 거짓으로만 안식에 이르거나 해탈을 얻을 뿐, 실제로는 저의 자아가 계속 살아남고 커지는 일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의 고백을 읽으면서 나는 작가가 평생동안 시달렸던 ‘기독교적 경건주의’에 대한 양가감정을 싯다르타의 입을 통해 말했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내가 조직화된 종교들에서 느끼는 그와 같은 감정도 읽을 수 있었다. 모든 종교,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니 초기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쳤던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의 믿음 생활이 따르는 무리들로부터 성인으로 추앙받게 되고, 조직화/종교화되어 주류 교세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그 집단 속에서의 정해진 의식 수행에서의 안온함과 동시에 본인의 깨달음도 한 차원 높아졌다고 믿는, 종국에는 자아만 키우게 되는 과정을 비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가장 핵심인 개인의 ‘신과 나의 합일의 그 고유한 체험’이 누락되었음으로.
 
그 말로는 표현할 수도, 전할 수도 없는 합일의 체험 자체를 불완전한 언어로 전한다는 것에 대한 의심으로 싯다르타는 본인만의 깨달음의 ‘체험’을 얻기 위해, 반대로 조직 안에서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기로 결심한 고빈다와 헤어져 다시 길을 떠나 숲을 벗어나면서 그는 뱀이 허물을 벗듯 한 가지가 자신을 떠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라문 집안에 태어나면서부터 그의 일부를 이루었던 한가지, 즉 스승을 모시고 가르침을 듣겠다던 소망이 이제는 그의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다시는 생활을 아트만이나 세계고 따위로 시작하지 않아야지. 이제 다시는 나 자신을 죽이거나 산산조각 내어, 그 파편 뒤에 있는 비밀을 찾아내려고 하는 따위의 짓은 하지 말아야지. 이제 다시는 요가 베다의 가르침도, 아타르바 베다의 가르침도, 고행자의 가르침도, 그 어떤 가르침도 받지 말아야지. 나 자신한테서 배울 것이며, 나 자신의 제자가 될 것이며, 나 자신을, 싯다르타라는 비밀을 알아내야지.’

 
스스로 꿈에서 깨어났고 새로 태어났다고 생각한 그가 모든 생활을 새롭게, 완전히 맨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느끼는 순간, 그는 이제까지의 바라문의 싯다르타가 아니므로 이제 고향의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수 없다는 통찰을 얻는 그 순간 몸이 얼어붙을 정도의 절대 고독에 잠기게 된다. 이제 어디에도 적을 둘 수 없게 된 싯다르타의 진정한 출가가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예전에는 이 모든 것들이 불신의 눈으로 관찰되었으며, 철저한 사유에 의하여 무화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깨달음을 얻어 자유로워진 그의 눈은 차안의 세계에 머무르게 되었으니, 그는 가시적인 것을 보고 인식하였으며, 이 세상에서 고향을 찾았으며,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피안의 세계를 목표로 삼지 않았다.’ 

 
뱃사공 바주데바를 만날때까지 싯다르타는 새로운 눈으로 마주하는 모든 풍경들을 명상하듯 읊는다. 마치 소로우의 <<월든>>을 읽는 착각이 들 정도로 디테일하고 생생한 풍경의 묘사들. 예전에 <<월든>>을 처음 읽었을 때에는 책의 내용과 작가의 용감한 시도는 흥미진진했으나 내게는 늘어지듯이 반복되는, 풍경과 계절별 호수의 묘사는 내심 지루하다고 느껴졌었는데 <<싯다르타>>의 이 부분을 읽으며 드디어 왜 그렇게 소로우가 세세한 풍경의 묘사에 공을 들였는지, 왜 아름다운 책으로 손 꼽히며, 법정스님이 타계하실 때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던 책이었는지 깨달았다. 새로 태어난 눈으로 세상을 처음 보듯 관찰하고 음미하는 것. 그것이 현존을 수행하는 명상이었기 때문에. 산책을 하며 불현듯 얻은 이 반가운 깨달음!
 
강을 사랑하고, 자주 강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주 강의 눈을 들여다보고, ‘모든 것은 다시 돌아온다'라고 강으로부터 배운다는 친절한 뱃사공, 바주데바를 만나 하루 머물고 강을 건넌다. 소설 전체를 보았을 때 싯다르타는 삶의 대전환이 이루어지는 시기마다 그 강가로 와서 그를 만나고 함께 한다. 고타마를 만나고 그 압도적인 현존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만의 체험을 구하기 위해 떠날 때, 사랑하는 카말라와 상인 카마스와미 그리고 그 어린애들 같은 사람들, 알아차리지 못할 만치 깊이 몸 담았던 속세를 떠나 죽으려 했을 때, 자신으로부터 도망친 아들에 대한 미련을 거두고 다시 떠나왔을 때. 강물은 자신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떠난 아들로부터 거울같은 깨달음을 주기 위해 아버지를 떠나던 젊은 시절의 그 자신 싯다르타를 비춰줌으로써 윤회를 체험하게 해주고, 이 모든 인생의 죄와 지난했던 구도의 과정이 깨달음을 위해 그 무엇보다 필요했다는 통찰을 얻게 된다. 
 


 
한편 절친 고빈다는 고타마의 곁에서 구도자의 길을 착실히 걸으며 중간중간 우연히 부유한 사업가로써의, 가난한 뱃사공으로써의, 그리고 비로소 완성한 자의 면모를 갖춘 싯다르타의 변화를 지켜본다. 작가는 피안의 말씀을 따르며 사는 구도자와 차안의 삶을 살아내는 수행자의 대비를 이 두 친구를 통해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예전의 나는 고빈다 같은 신앙인이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고, 친구들과 이웃들이 그러했으며, 문제가 생기면 가까운 전도사님을 찾아 상의했고, 나의 생활의 기준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그것에 어긋나지 않으려 나름의 노력했으니. 나는 싯다르타와 같이 나의 안온한 세계를 ‘떠나지도' 고빈다처럼 '올인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신앙 상태로 30대 후반까지 왔었기에,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극심한 혼란에 빠진 고빈다의 마음에 100% 이입되었다. 친구인 싯다르타가 하는 말은 스승의 말씀과 뭔가 모순이 되는 것 같은데 어찌해서 그 둘은 그렇게 똑같은 지극한 평화로움과 자비스러움, 평정심을 보이는 것인가! 내가 열심히 나를 바쳐 살아온 것은 다 무엇인가.
 
 
싯다르타는 친구에게 부처님과 자기는 똑같은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로 설명해준다. 이 책의 진수가 이 장에서 나타나는데, 실제 헤세도 카말라와의 생활에서 떠나온 이후의 2부 집필 부분에서 막혀 1년 반 이상을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며 글을 쓰지 못했다고 한다. 깨달음을 체험하지 않고는 묘사할 수 없는, 체험한 이후에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이야기에 작가는 도전했고, 훌륭히 묘사해내었으며, 그 어려운 작업의 결과물을 읽는 나로서는 깊이 감사한 마음이다.
 
긴 대화 끝에도 여전히 혼란스럽고, 이대로 헤어진다면 다시는 이 몸을 가지고 친구 싯다르타를 만날 수 없으리라 생각한 고빈다는 그에게 남은 평생을 의지하고 갈 수 있도록 싯다르타의 깨달음의 말을 알려주길 간절히 구한다.

“나의 말과 고타마의 말씀이 실제로 모순이 되는 것이 아니라 착각 때문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것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야. 나는 내가 고타마와 의견이 같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분이 어떻게 사랑을 모르실 수가 있겠는가. 무릇 인간 존재라는 것이 덧없고 허무하다는 것을 인식하셨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중생을 그토록 사랑하셔서, 온통 노고로 가득 찬 길고도 긴 한 평생 동안 오로지 인간 중생을 도와주고 가르치는 데 온 힘을 다 쏟으셨던 그 분이 아닌가. 그분의 행위와 삶이 그분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며, 그분의 손짓이 그분의 사상들보다 더 중요해.”

 
3차원을 인지하는 우리는 공감각을 본다고 생각하나 기실 우리는 나의 뒷모습도, 발바닥 아래도 볼 수 없는, 단지 지금 시간의 사물의 일면만을 인식할 수 있는 2차원의 존재인데 강물의 이야기, 즉 부처님의 말씀은 존재의 전모를 한번에 동시적으로 보는 통찰력을 통한 깨달음이므로 이를 전하는 것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지혜임이 분명하다. 부처님 당대의 사람들은 설문보다는 그의 현존 자체에서 깊은 체험을 얻은 것은 아니었을까.
 
여전히 그의 말은 스승의 그것과는 모순인데도 스승의 손짓과 미소 그것과 완벽히 같은 친구 싯다르타. 친구 고빈다의 절박함을 아는 싯다르타는 말로 설명하기를 그치고 자신의 이마에 입을 맞춰보라 한다. 이제 고빈다는 영원한 동시적인 윤회의 강을 체험하면서 싯다르타와 스승의 가르침의 간극이 처음부터 없었음을, 그와 친구와 스승이 모두 하나임을 그저 깨닫게 된다.
 

그의 눈에는 친구 싯다르타의 얼굴이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았으며, 그 대신에 다른 얼굴들이 보였다. 수많은 얼굴들이 기다랗게 한 줄로 서서 나타났는데, 수백 개의 얼굴들이, 수 천 개의 얼굴들이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왔다가는 다시 흘러가 버렸다. 그렇지만 그 모든 얼굴들이 동시에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얼굴들은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어 새로운 모습의 얼굴로 변하였다. 그렇지만 그 얼굴들은 모두가 싯다르타의 얼굴이었다.

 
영원히 지속적으로 변화하며 현존하는 것에 대한 상징인 강물로부터 일원성과 동시성을 온 몸으로 체험해 완성한 싯다르타. 고빈다의 체험, 강물의 이야기, 싯다르타의 깨달음, 부처님의 가르침, 말로는 전할 수 없는 지혜. 이 모두는 하나였다. 이 소설의 강물 속에 나왔던 그 모든 등장인물들이 결국은 하나였고, 부처였다. 싯다르타로 대변되는 치열한 깨달음의 여정을 글로 남긴 헤세와 지금 이렇게 읽고 있는 나도 하나라는, 써놓고 보면 항상 조금 간지러운 글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