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책읽기

생각이 정말 많아지는 책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 - 우에노 지즈코>>

소라언냐 2023. 11. 22.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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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 

“어떻게 죽는게 가장 편할까?” - 나이 들수록 혼자 지내는 사람이 편안한 이유

by 우에노 지즈코, 이주희 옮김

 

 

덧니가 귀여운 할머니, 작가 우에노 지즈코님을 소개합니다

1948년 생. 교토대학교 대학원 사회학 박사과정 수료. 페미니스트이자 사회학자로 사회학과 여성 연구에 있어서 일본 최고의 지성으로 손꼽힌다. 현재 도쿄대학교 대학원 인문사회계연구과 명예교수로, 일본 내의 여성 활동 지원과 단체 간 연결을 위해 NPO법인 여성행동네트워크(Women’s Action Network)를 설립해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1994년 <<근대가족의 성립과 종언>>으로 산토리학예상을 받았으며, <<스커트 밑의 극장>> <<내셔널리즘과 젠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독신의 오후>> <<느낌을 팝니다>>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 <<허리 아래 고민에 답변 드립니다>> 등 다수의 저서를 통해 한국과 일본에서 여성과 사회 문제에 대한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국내에서는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미소지니(misogyny, 여성혐오)가 우리 사회의 큰 이슈로 떠올랐을 때 그녀의 대표작인 <<여성혐오를 혐오한다>>가 크게 주목 받은 바 있다. 



우연히 이 책을 만났죠 

도서관 서가를 어슬렁거리다 이 책의 제목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에 확 당겨져 그 자리에서 반을 읽고 왔다. 그만큼 설득력 있고 흡입력 있게 읽히는 에세이집이었다.

 

책 속 표지의 안내에 따르면 이 책은 ‘싱글의 노후' 시리즈인 <<싱글, 행복하면 그만이다>> <<여자가 말하는 남자 혼자 사는 법>>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 이상 세 권의 종결편에 해당되는데, 이 시리즈는 누적 판매 부수 130만 부를 달성한 초베스트셀러라고 한다. 나는 왜 들어본 바가 없었을까나. 허허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1장. 혼자 늙는 게 어때서

2장. 자녀가 없는 노후는 정말로 비참한가?

3장. 시설에서 죽기 원하는 노인은 없다.

4장. 중요한 것은 살아 있을 때 고립되지 않는 것이다.

5장. 치매에 걸려도 집에서 혼자 죽을 수 있을까?

6장. 우리는 모두 언젠가 늙고 병든다.

7장. 사회에 도움이 안되는 사람은 살면 안 되나요?

8장. 집에서 혼자 죽을 수 있습니까?



악마의 속삭임

작가는 자신이 2007년에 <<싱글, 행복하면 그만이다>> 책에서 부모를 혼자 둔다는 비난받은 자녀가 부모에게 같이 살자고 요청하는 것을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표현했다고 했다. 이제 그런 ‘악마의 속삭임’을 입에 담는 자녀도 부모도 줄어들어 세대간 분리가 완전히 자리 잡았다. 그래야 부모와 자녀 모두가 행복하다는 사실을 배웠으므로.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는 혼자 사는 싱글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나이가 든 노인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한데, ‘무연고 사회' ‘고독사' ‘1인 고령 사회의 노인, 고립, 빈곤' 등이 그들에게 당연한 수식어처럼, 독거 고령자의 말로가 마치 다 그런 것인 양 겁을 준다. 



노후는 혼자 사는 게 행복하다

작가는 오사카에서 이비인후과 개원의인 쓰지가와 사토시가 쓴 <<노후는 혼자 사는 게 행복하다>>라는 책을 인용해 매우 흥미로운 반대 주장을 한다. 2013년에 오사카부 가도마시에 사는 60세 이상의 고령자 5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혼자 사는 고령자의 생활 만족도가 가장 높다’는 데이터를 얻었다고 한다. 오사카 근교의 중산층 노인들을 대상이 되어 편향됐을 수 있다는 점과 표본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는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시사하는 바가 커 정리해둔다.

 

‘행복'이란 극히 주관적이라 조사에서는 ‘생활 만족도'라는 지표로 조사했고, 동거 고령자를 여러층으로 나눠서 동거인이 1명인 경우, 2명인 경우, 3명인 경우, 4명인 경우 각각으로 구분해 비교한 것이 특징인 조사. 

 

그 결과 동거인이 1명 늘어나, 즉 2인 가구가 되면 생활 만족도가 최저로 떨어졌다. 동거인이 1명 늘어나 3인 가구가 되면 생활 만족도가 조금 상승하고 4인 이상, 즉 다세대 가구가 되면 생활 만족도가 독거 고령자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 된다고 한다.

 

여기서 2인 가구는 ‘부부 가구' 아니면 ‘부모 1인과 자녀 1인'인 경우이고, 부부 가구는 이른 바 ‘빈 둥지' 시기로서 육아가 끝나 공동의 목표를 상실한 커플이 얼굴을 마주하는 위기의 시기로, 부부만 남게 되면 서로 다른 문화가 충돌해 생활 만족도가 당연히 낮아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때는 자녀가 함께 살거나 반려 동물을 통해 대화하는 커플도 많다고 하니 3인 가구가 되면 생활 만족도가 좀 더 상승한다는 결론에 수긍이 된다.

 

동거 가족이 3인 이상 즉, 다세대 가구가 되면 독거 노인의 생활 만족도와 비슷해지므로 정부나 미디어에서는 2대 이상의 세대가 함께 사는 행복한 노후의 이미지를 반복 노출하는데, 닥터 쓰지가와의 결론은 ‘혼자 사는 것'은 ‘3대가 함께 사는 것과 맞먹는 만족도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애초에 타인의 고통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사실은 약간 웃프지만- 나이를 먹을 수록 체력이 떨어지고 몸에 문제가 생기는데, 시간의 흐름에 다른 조사 대상의 변화를 추적해보니, 건강 상태가 나빠져도 혼자 사는 사람의 만족도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은 애초에 타인의 고통이므로. 말해봤자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5장. 치매에 걸려도 혼자 살 수 있나요?’ 챕터에서도 동일한 사례가 나오는데, 치매 환자도 혼자 생활할 경우 동거인들의 지적(야단)을 받는 일이 상대적으로 적으므로 증세 호전에 더 도움이 된다고 한다. 

 

가족을 형성했다가 혼자 사는 고령자가 되었다면 자녀가 있을 수 있는데, 닥터 쓰지가와의 조사에 따르면 혼자 사는 고령자들 중 자녀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생활 만족도는 다를 게 없다고 한다. 

 

평생 미혼이었던 작가의 말을 인용해 나의 안도감을 남긴다 ‘아, 천만다행이다. 자녀가 없는 노후는 비참하다고 겁주는 말을 얼마나 들었던가.’ 허허. 자녀의 유무와 상관없이 따로 사는 것은 이제 당연한 일이 되었으니.

 

 

웰다잉으로의 전환, 재택사

책의 앞부분은 이렇게 노후 독거 생활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려주면서 혼자 늙어간다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두렵거나 불쌍하게 여길 일이 전혀 아니란 점을 환기시켜주면서 중반부터는 죽음을 다루는 현장의 모습과 목소리들을 전한다.

 

일본은 이제 ‘병원화’가 한 바퀴 돌고 난 후의 ‘재택사'로 변화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지역의 의료화와 간병 자원이 이전과는 달리 충실해졌으므로, 병원이나 시설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것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고 웰다잉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탈병원화'가 화두가 되고 있다고. 

 

영양 수준, 위생 수준, 의료 수준, 간병 수준이 일제히 상승한 결과로 장수사회가 된 일본의 사망원인은 대부분 노화로 인한 질환으로 인한 사망인 ‘예상할 수 있는 죽음' ‘원만한 죽음'으로, 자택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맞이하는데 의료가 개입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의료는 병을 고치는 것이 목적이지 죽기 위한 게 아님으로. ‘의료의 역할은 개입을 삼가고 사후에 사망진단서를 써주는 것’이라고 못 박는다.  



노인이 죽어간다면 119는 부르지 마라

작가는 만약 노인의 상태가 위급해 보이거나 죽어가는 현장을 본다면 절대 119는 부르지 말라고 조언한다. 닥터 하마베 유이치의 에세이 내용을 인용했는데, 최근 응급 의료 현장의 급격한 변화라면 119에 실려오는 고령자가 늘어났다는 점이라고 한다. 이런 고령자는 며칠에서 몇주 정도 연명치료를 하면서 생명을 연장하는데, 의사인 그는 이런 치료가 꼭 필요한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또 막상 환자의 가족들은 당황해서 119를 불러 응급실로 오기는 하지만 이어지는 연명치료 때문에 나중에 환자 가족들로부터 원망을 듣는 일도 있다고 한다. 

 

또 응급실을 이용하는 고령자의 수가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지역 응급실이 응급 의료 현장의 기능이 마비되는 경우가 많아져 치료 골든 타임을 놓치는 환자들이 늘고 있다고.

 

죽음의 외주화 사회에서 사는 우리는 다들 죽음이 무르익어가고 있다는 싸인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일단 응급실로 모시고 가지만 그 이후의 프로세스는 평화로운 죽음에 역행하는 연명치료뿐이라는 점을 알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살아 있을 때 고립되지 않는 것

작가는 노후의 고독사에 대해서도 명쾌한 설명을 해준다.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는 고독사의 경우를 잘 살펴보면 대부분 50대 후반에서 60대로, 주로 남성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즉, 냉정하게 말해 중장년 남성의 문제이지 고령자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고.

고독사한 사람들은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고립된 인생을 살았다. 고립된 인생이 고독사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살아있는 동안 고립되지 않는다면 고독사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고령자의 경우 주기적으로 방문해 살펴주는 케어 매니저(한국은 고령의 노인이 혼자 사는 경우 사회복지사가 매일 전화 통화와 정기적인 방문 돌봄을 해준다)가 노인의 죽음을 주치의에게 상의하고 예측할 수 있어 사후 며칠이 지나도록 방치되는 일은 거의 없다.



병원내 고독사

시설이나 병원에 있으면 고독사는 피할 수 있을까? 일본재택호스피스협회 회장인 오가사와라씨는 병원이나 시설에 있다고 해서 반드시 ‘입회인이 있는 죽음’을 보장받지는 못한다고 조언한다. 시설도 간호사나 직원이 몇시간 간격으로 순회하면서 체크하므로 공백시기에 사망할 수 있으므로. 각종 모니터가 알람을 해주면 누군가가 달려오겠지만 이 역시 죽음 이후의 알람일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다시 연명치료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치매에 걸려도 혼자 살 수 있나요?

치매는 내 개인적으로도 가장 두려운 상황이기는 하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인지 상태로 화재 등 주변에 해를 끼질 수도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끔찍한 상황. 

 

그러나 작가는 케어 매니저 시스템이 있으므로 치매 환자도 집에서 생활하다 재택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치매 환자 본인이 가장 행복한 환경은 그 자신이 살아온 익숙한 내집이 제일이고, 그 상황을 버틸 수 없는 건 환자가 아니라 환자의 가족들이라고.   

내가 원하는 것은 치매를 두려워하는 사회가 아니라 치매에 걸려도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다. 혼자 치매에 걸리지 않으려고 아득바득 노력할 정도라면 그 에너지를 ‘안심하고 치매에 걸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에 쓰면 좋겠다.

 

 

사회에 도움이 안되는 사람은 살면 안되나요?

7장에서는 연명치료사전지시서의 이면을 생각해보는 인사이트를 전해준다. 

 

이제 일본에서는 병원에 입원시 고령의 환자는 연명치료사전지시서를 작성해야하는데, 치료를 받다가 사망이 임박했을 경우 마음이 바뀌어서 연명치료를 받고 싶어도 내가 서명한 서류때문에 철회할 수 없다. 사전지시서를 쓴 과거의 자신이 현재 자신의 죽음을 결정하는 것.

 

질문 내용만 바뀌어도 작성자의 대답이 달라지는 연명치료사전지시서에는 이제 체크할 수 있는 답변에 ‘네'만 제시하는 등 ‘아니오'를 말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질지도 모른다고. 일단 문서에 서명하고 나면 다른 의견을 낼 수 있는 여지는 줄어든다. 어떻게 보면 문서화를 통해 일부러 장벽을 높이는 것 아닐까.



조력사와 안락사

이는 또 자연스럽게 조력사와 안락사에 대한 생각으로도 이어지는데, 안락사는 적극적인 자살 방조, 존엄사는 임종기의 의료 억제라고 한다. 

 

2016년 <문예춘추>에 게재되었던 하시다 스가코(드라마 시나리오 작가)의 에세이 <<나는 안락사로 죽고 싶다>>에 이어진 저명인 60명에게 찬반을 물은 설문조사에 작가도 참가하였는데, 무응답을 제외하면 오직 4명만이 ‘안락사와 존엄사 모두에 반대한다’는 의견이었다고. 

 

작가는 ‘사회에 도움이 안되는 사람은 살면 안되나요?’라고 묻는다. 사회에 공헌할 수 없으면 살아 있을 가치가 없을까? 

‘존엄한 생’과 ‘존엄하지 않은 생'의 경계선은 어디일까? 어떤 사람은 스스로 배변과 배뇨를 할 수 있는 상태를 ‘존엄'의 지표로 보고, 타인에게 배변과 배뇨를 부탁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존엄'이 사라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배설 처리 도움을 받는 장애인이나 환자, 고령자는 수없이 많다. 기저귀를 차는 것 정도는 죽을 이유가 되지 않는다.
‘사전지시서의 유효기간은 언제까지일까? 자신의 일관성은 잃었는데 동일성을 추구하는 것은 과거의 자신이 현재의 자신에게 월권 행위를 하는 것은 아닐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망설이면 돼요

작가 본인의 아버지의 예를 들면서 요양시설로 들어가고 싶다 하셔서 온가족이 갈만한 시설을 알아보고 정했더니 마음이 변해서 절대 가지 않겠다고 번복했던 적이 많았다고 한다. 

 

시설에 입소할 때에도 연명치료 사전지시서의 내용과 같은 임종시의 ‘동의서’를 가족에게 받는다고 한다. 본인이 아니라 가족의 동의를 받는 이유는 입소자의 태반이 치매이기 때문.

 

맘에 들었던 다카구치 씨의 시설에서도 가족 동의서를 받느냐고 물었더니 받지 않는다면서 덧붙인 조언이 감동스러웠다고 한다. “살고 죽는 데는 정답이 없어요. 가족과 직원이 함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망설이면 돼요.”



사전지시서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사전지시서는 도데체 누구를 돕는 것일까? 작가는 ‘사전지시서가 있어 좋았다' ‘도움이 됐다' 등의 이야기들은 가족과 전문가들의 목소리 뿐이라고 일갈한다. 본인의 목소리를 듣고 싶으나 이미 죽은 사람의 이야기는 들을 수 없으므로. 뜨끔하다. 



생각이 무척 많아집니다

서가를 어슬렁거리다 집혀 쉽게 읽을 거라 생각했던 책이었다. 독거 고령자의 생활 만족도에 대한 반전 설문조사 결과로 시작해 의료 현장과 재택 간호 현장의 서비스, 그리고 연명치료 사전지시서의 이면 등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에서의 죽음에 대한 실질적인 조언들과 함께 국가 의료보험의 나아갈 방향을 함께 고민하는 큰 내용이었다. 

 

혼자 죽는 것이 그렇게 피할 일인가? “동물들도 죽을 땐 혼자 죽어요”라던 지인의 조언이 무척 와닿았던 나. 자녀가 없으니 애저녁에 혼자 죽는게 디폴트라고 맘 다잡고 있던 나로서는 그나마 있던 부담마저 날려준 고마운 책이다. 막연히 안락사나 조력사가 나의 마지막으로 합리적이라 생각했었고, 양가 부모님이 대학병원에 간 김에 연명치료 사전지시서에 아무것도 해주지 말라고 서명했다고 하실 때에는 잘하셨다고, 이줄 저줄 끼고 고생만 하는 것 자식들도 원치 않는다고 시원하게 말씀드리기도 했다. 이건 정말 ‘내’ 생각이었을까?

 

이 책을 읽고 생각이 많아졌다. 부모님은 정말 본인들의 의지로 사전지시서를 작성하신 걸까? 호주에 살면서 한국에 방문할 때마다 예전 우후죽순 노래방 늘듯 차로변에 너무나 눈에 띄게 늘던 ‘요양병원’들. 

 

2022년 6월 17일 캐톨릭 국가 이탈리아에서 불치병의 조력 사망을 합법으로 인정했던 날,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종편 TV의 패널들은 한 목소리로 말한다. 똥오줌도 못가리고 사는 게, 콧줄끼고 병상에 누워 숨만 붙어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자식들만 고생하고 병원 좋은 일 시키는 거라고. 내가 똑바로 인지 능력이 있을 때 사전지시서를 작성해야 이런 고생 안한다고. 

 

갑자기 짠듯한 방송들을 보면서 쌔~한 느낌이 들었는데, 마침 아빠가 생각난 김에 알려준다는 듯 며칠 전 서울대 병원에 진료 있어 갔을 때 엄마랑 두분 다 사전지시서에 서명하고 왔노라고 말씀하셨다. 자식들 신세 안지는 당당한 부모란 이런 것인 양 말씀하시면서 종편 패널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셨다.

 

그날 남편과 본가에 가면서 왠지 어머님도 사전지시서를 작성하셨을 거다에 한 표라며 농담반 얘기하며 갔는데, TV에서 또 사전지시서 작성 주제가 나온다. 어머니도 역시 다음 번 대학병원에 약 타러 갈 때 저거 꼭 하고 와야겠다고 말씀하신다. 역시나 종편 패널들의 얘기를 그대로 옮기시면서…

 

 

한국 특유의 조급증이 보인다. 이런 거대 담론을 종편 TV에서 몰고 가는 모양새라니! 이런 사회적인 압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전지시서 작성 안해!' 라고 말할 수 있는 노인이 있을까? 정말 다들 깊이 고민들을 하시고 그 지시서에 동의하신 걸까? 나의 지금의 동의가 미래의 나를 옴쭉달싹 못하게 할 수 있다는 걸 알고도? 그렇게 생에 집착이 없어 보이는 분들이 아닌데...

 

정치가, 사회가 고령층을 눈 뜬 채 후려치는 걸 본다. 종편 TV에서, 유튜브에서 선거철이 되면 선동해 그들의 투표권을 이용하고, 임종이 가까워 사회적 비용이 들게 되면 -전형적인 우생학의 입장에서-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사전지시서'를 자신의 의지로 작성하고 있다고 믿게 만들어 서명시키는.  



안락사를 추구하는 사회는 정의로운가?

노망을 굳이 치매라 바꿔 부를 것도 없다. 노망은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의 하나다. 노망이 나도 즐겁게 살아가는 노인은 얼마든지 있다. 태어나는 것을 결정한 사람은 없다. 죽는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이다.

 

나는 어쩌다 안락사가 좋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을까? 두껍지 않은 책 한 권을 읽고 정말 많은 생각들이 겹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