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책읽기

연초에는 더욱 그러하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 김영민>>

소라언냐 2024. 1. 4.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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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우리 함께 시시한 행복을 꿈꾸자 : )

 

작가 김영민님을 소개합니다

스스로 배우 전도연을 닮았다고 소개하는 작가. 궁금증을 참지 말고 찾아보기 바란다. 벌써 피식하게 된다.

 

책 커버에 소개된 그의 약력은 이렇다. 

서울대 정외학부교수. 하버드대학에서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브린모어대 교수를 지냈다.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비교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해오고 있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김영민 교수의 국내 첫 저서다. 책은 지난 10여년 간 일상과 사회, 학교와 학생, 영화와 책 사이에서 근심하고 애정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어쩌다 이 책을 만나게 됐는지...

분명치 않지만 제목과 프롤로그에 확 끌렸다. 그렇지. 아침에 눈 뜨면 죽음을 생각해야지. 정작 독서모임에 추천만 해두고 읽던 책을 마저 읽고 시작하겠다 맘 먹어 미루고 있었는데, 먼저 시작한 분들 모두 작가의 웃음 코드가 딱이라고 했다. 엇 그래? 제목은 굉장히 심오하지만 뭔가에 통한 사람은 그걸 쉽게 재밌게 자신의 말로 설명하는 법이니... 기대된다.

 

짤막짤막한 에세이 묶음이라 잘 읽혔다. 작가 스스로도 잘 읽히도록 리듬감이 있게 쓴다고 했던만치 그러했고, 유머 코드가 범상치 않아 더욱 그러했다. 무릎을 치게 하는, 본인 속심 못내 자랑스러웠을 반짝이는 인사이트들을 도처에 숨겨 놓았으되 부끄러워 내놓고 야 봐라~ 하는 성격은 못되는 것 같다. 천상 엄근진 분위기에 알러지 있는 아재가 쓴 에세이 묶음이랄까. 에세이 묶음이라 기억에 남는 챕터들을 간단히 기록해둬야겠다. 

 

 

프롤로그의 내용이 좋다

그리하여 나는 어려운 시절이 오면, 어느 한적한 곳에 가서 문을 닫아 걸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불안하던 삶이 오히려 견고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삶의 기반이 되어주는 것은 바로 그 감각이다. 생활에서는 멀어지지만 어쩌면 생에서 가장 견고하고 안정된 시간. 삶으로부터 상처받을 때 그 시간을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말을 건넨다.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갈 수 있다고.

 

 

1부 책은 시간의 흙탕물 속에서_일상에서

작가는 새해에는 행복해지겠다는 계획 따위는 세우지 않겠다고 말한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 그리고 설거지에 대한 고찰. 허허~ 어떤 캐릭터인지 벌써 감이 온다 와. 

 

<추석이란 무엇인가> 정체성을 들이대고 묻는 시리즈로 본인만의 개그 코드 입지를 다진 작가는 <무신론자의 추석_명절을 보내는 법 3>에서 의례에 밝았던 강씨 부인의 문집을 거론한다. 이를 읽으면 며느리인 여자가 아들을 낳으면 자신에게도 남근이 생겼다고 무의식 중에 믿어 본인의 위치가 을이었던 며느리에서 원래부터 시가의 기득권이었던 양 모드가 바뀐다는, 그에 더해 남성의 기득권 가치를 더욱 옹호하게 된다는 가설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남성 지배의 조선사회에서 여성이 공적 발언권을 가지려면 남성들이 인정한 가치를 구현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아예 보통 남성들이 범접할 수 없는 신 내림을 받아 영험한 무당이 되어버리거나. 강씨 부인은 남성들의 가치를 받아들여 그 속에서 인정받는 길을 선택했다. 

 

 

2부 희미한 희망 속에서_학교에서

교직에 몸담고 있는 작가는 <수능 이후>는 입시를 위한 기술적인 공부에만 열을 올리다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 공부에 몰리는 교육과 공부에 대해 한탄한다. 

평생을 취업이나 시험을 위한 수단이 아닌, 또 다른 종류의 공부가 존재한다는 것도 모르고 나머지 생을 살게 될 수도 있다. 자신은 공부라면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믿으면서. … 생활인으로 살기 위하여 입시, 취직, 고시 공부를 해야만 하는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써 시험공부를 해서 기왕에 대학에 들어왔다면, 반드시 지식을 통해 머리에 전구가 들어오는 경험을 해야 한다. 자루에 갇혀 있다가 튀어나온 고양이처럼 그러한 사치스러운 지적 경험을 찾아 캠퍼스를 헤매야 한다. 그리고 입시를 위해 보내야 했던 그 지루했던 시간에 대한 진정한 보상을 그 환한 앎에서 얻어야 한다. 세상에는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할 수도 있는 다른 종류의 공부가 있음을 영원히 모른채 죽지 않기 위해서.

 

<K교수의 국가론>에 소개된 Mancur Olson의 국가론이 흥미롭다. 그는 도적 집단의 유형을 크게 두 가지 '유랑형'과 '정주형'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책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남(국가)이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을 갖기 위해서라고.

올슨에 따르면, 국가란 깡패죠. 깡패는 약자의 금품을 갈취하는 게 일이죠. 주변의 약자로부터 더 뺏을 게 없어지면 다른 약자를 찾아 떠나죠. 그렇게 유랑하다가 약자와 마주치면 또 뺏죠. 유랑 생활이 피곤해졌을 무렵 국가가 탄생했다고 하네요. 깡패가 정착해서 세금을 걷기 시작하는 거죠. 약자를 완전히 초토화시켜버리면, 피곤하게 또 다른 약자를 찾아 떠나야 하니까 이제 폭력을 자제하죠. 대신 선거를 치르기도 하고, 국정교과서를 만들기도 하는 등 자기합리화를 통해서 어느덧 민주 국가가 된다는군요.

 

<<소마>>의 재정 대신 다이만의 말이 생각이 난다. 다이만으로부터 재정보고를 받던 소마가 이렇게 재정이 넘치는데도 백성들에게 세금을 걷는 이유를 묻자 다이만은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그들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3부 고독과 이웃하며_사회에서

<희망을 묻다>와 이어지는 <광장으로>는 이 책의 여러 에세이들 중에서도 작가의 통찰이 빛났던 에세이들이라고 생각한다. ‘왜 똑똑한 민족인 것 같은 우리는 이렇게 치킨게임으로 몰려버렸을까?’와 ‘왜 요즘 우리는 이렇게 무력하게 있을까?’란 질문에 일면 이해가 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므로.

 

작가는 영화 <대부>의 주인공 비토 코를레오네의 예를 한국 사회에 투영한다. 어린 시절 시칠리아 갱의 어이없는 폭력으로 전가족이 몰살 당하다시피 한 그. 그의 생은 당한 폭력의 되갚음과 되먹임으로 점철되었다. 어떤 폭력적인 경험은 때로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다. 

난입한 제국주의자들이 말했다. 너희는 스스로 현대적인 공적 질서를 창출해서 살아갈 능력이 없으므로 우리가 대신 지배해주겠다. 그 말을 부정하기 위하여 한국인들은 질주를 시작한다. 추구할 공동체의 헌법적 가치를 새삼 숙고할 여유는 없다. … 제국주의자들의 침탈과 모욕을 피하여 달리기 시작한 그들은 정부수립을 거쳐, 동족상잔의 전쟁을 넘어, 현대 국가의 모습을 갖출 때까지 멈출 수 없다. 마침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때까지. 그것이 무엇을 위한 질주이든, 그들은 일단 세계 자본주의의 주변부에서 질주해야만 한다. 

마침내 잘 조립한 자동차 한 대를 들고 제국주의자들의 면전에 나설 수 있게 되었을 무렵, 광주 5.18 민주화운동은 신군부에게 짓밟히고, 그해 주한미군 사령관 John wickham은 한국인들은 들쥐와 같아 민주주의가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침내 우리도 민주주의를 이루고 살 역량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다시 질주한다. 광화문 광장의 촛불 시위를 거쳐 이뤄낸 탄핵까지.
이들의 고독에는 원인이 있다. 집권세력은 분노의 근본원인을 이해하려 들지는 않지만, 그 분노를 제압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집단행동을 하는데 드는 시간적, 금전적, 체력적, 정서적 비용을 증가시킨다. 그리고 그 비용을 지꺼이 지불하기 어렵게 사람들을 궁핍한 상태로 유지시킨다.
그러나 2016년 사람들은 이제 비열한 거리를 지나,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날로 가난해져가는 이들이 갑자기 집단행동의 비용을 흔쾌히 지출할 만큼 여유를 갖게 된 것은 아니다. 어떤 비용이라도 기꺼이 지불할 만큼 분노가 커졌을 뿐이다.

 

이 에세이가 지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즈음에 씌여진 것이다. 탄핵 이후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으나 지금 어떠한가. 전국민 듣기평가를 일으켰던 '날리면', ‘심리적인 G8였다'라는 쥐구멍 찾게 만드는 외교와 '실패하면 떡볶이 성공하면 디올 아닙니까'라는 웃픈 짤이 돌게하는 적폐들.

 

그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앞뒤없이 달린 후 직시하게 된,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버린 모래들. 무력하고 고독한 군중들. 계속 더 팍팍하기만 한 살림. 다시 2016년의 역사를 반복하기 위해 지금 이렇게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는건가. 그 임계점은 도데체 언제일까. 두렵다. 집권세력도 학습이란 걸 하고, 진화한다는 것이...

 

 

<어떤 자유와 존엄을 선택할 것인가>

채사장의 그것과 같았던, 죽음과 직통하는 에세이. 

모든 이야기에 끝이 있듯이, 인생에도 끝이 있다. 모든 이야기들이 결말에 의해 그 의미가 좌우되듯이, 인생의 의미도 죽음의 방식에 의해 의미가 좌우된다. 결말이 어떠하냐에 따라 그동안 진행되어온 사태의 의미가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인간은 제대로 죽기 위해서 산다'는 말의 의미이다.

 

나라는 인간의 삶은 ‘내던져졌다'고 할 만치 전적으로 자유와 존엄이 박탈된 채 시작되지만 양육자에 의존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서기 위해 저항하고, 그런 과정을 거쳐 어느 정도 심적, 물적 자원이 확보되면 그 자원을 활용하여 자기 인생의 독특한 이야기를 쓰게 된다고 한다.   

 

어디에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 삶은 선택할 수 없지만 죽음은 선택할 수도 있다. 나의 낙타와 같았던 삶의 시기도 나의 인생의 이야기를 탄탄하게 해줄 나름의 까닭이 있어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다.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존엄사와 재택사에 깊은 관심이 생기는 이유이다. 나의 결말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병석에서 탕진하고 싶지 않고, 자유와 존엄을 갖춘 인간으로서 맞이하고 싶으니.

 

 

4부 이 세상 것이면서 이 세상 것이 아닌 것들에 대해서_영화에서

<안토니아스 라인> 

어떤 장르의 예술이라도 작가의 의도를 100% 전달하고 전달 받을 수 없겠지만 내게는 영화라는 장르가 그러하다. 김영민 교수의 평을 읽으니 스토리를 거의 다 알려준 듯 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궁금하다. 

악, 고통, 우연을 넘어서 삶을 긍정하는 원리로서의 자연, 건강한 욕망을 긍정하는 태도로서의 자연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대안적 삶의 태도를 제안하는 것이지만, 나아가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많은 장애물들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대표적인 방법론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인간 본연으로서의 자연은 대안적인 삶의 형태를 추구하는 모든 시도에서 하나의 준거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 억압적인 것들은 ‘원래 그러한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정당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억압적 인위의 소산으로 환원시키고 대안을 추구하고자 할 때, 우리의 자연 상태가 원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되물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설원에 핀 장미 아닌 꽃> 챕터에서 홍상수 감독의 초기 영화들에 대한 리뷰를 했는데, 나는 어쩐지 그 리뷰가 이 책에 대한 리뷰처럼 읽혔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다음 든 생각은 뭔가 심하게 까기는 했는데, 그리고 뭐지? 하는 생각. 문제제기-비판-해결방안-동기부여의 틀에 갇힌 내가 문제인가, 홍상수 감독마냥 이 사회 도처의 크랙들을 그저 관망하는 조물주 모드를 켜고 있겠다는 건가, 아니면 작가의 말따나 ‘근대성이 가진 허망하고 파괴적인 에너지 자체를 사회비평에 적용한 경우'인건가.

홍상수 이전의 한국 영화들은 각기 다른 가치를 옹호했을 망정, 그리고 옹호하는 방식이 달랐을망정, 가치의 기초 자체를 이처럼 급진적으로 회의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홍상수 영화는 기존의 가치를 냉소하는 반면 아무런 대안적 가치를 이야기할 의사가 없다는 점에서, 근대가 도달한 참으로 황폐한 그 저지대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황폐한 저지대에서 홍상수 영화의 캐릭터들은 지속적으로 서툰 해석질을 일삼고 있고, 그 서툰 해석질들은 가학적인 코미디의 질료가 된다. 

 

 

<박식하고, 로맨틱하고, 예술적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 

삶을 예술적으로 창조하라는 니체와 <<우아한 가난의 시대>>에서 읽은 듯한 기시감이 든다. ㅎㅎ 

공들여 음식을 장만하고 식탁보를 준비하고 조화와 예의를 아는 사람들을 엄선하여 초대하는, 이 잘 준비한 저녁식사는 다름 아닌 그의 생을 예술적으로 고양하는 과정이다. 우리가 가장 상관하는 것은 늘 자신의 삶이며, 삶이란 저녁식사와 같은 일상의 집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저녁식사 순간이 예술의 경지가 된다면, (바로 그 부분의) 삶이 예술이 되는 것이다. 즉 예술의 인간에 대한 궁극의 공헌은, 만들어내거나 향수하기 위해 사들인 예술품 자체에 있다기 보다는 그러한 예술품을 만들거나 향수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고양된 자신의 생 자체에 있다. 가장 위대한 예술가는 예술이 궁극적으로 실현되는 장소가 일상임을 아는 사람이다.

 

 

5부 맛없는 디저트를 먹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잖아요

<대화에서>는 앞의 1-4부에 나왔던 에피소드들의 재탕이 많아 은근 실망스러웠던 챕터였지만 작가의 유쾌한 개그코드를 실전에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계획은 세우지 않겠다, 행복보다는 소소하게 불행한 삶을 꿈꾼다는 그는 영화 <<박화영>>과 <<꿈의 제인>>를 인용해 우리에게 당면한 사회문제를 언급하며 정부의 사회 안전망 구축을 위해 증세를 통한 복지론을 주장한다.  

 

 

2024 새해가 밝았습니다

에피쿠로스의 최고선은 세계의 작동 원리와 욕망, 쾌락, 고통의 한계에 대한 참된 지식을 통한 아타락시아(마음이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평정한 상태)와 아포니아(몸 고통의 부재)라는 소박하고 지속가능한 쾌락을 누리는 것. 부처님의 가르침과도 닿아있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에서 발견한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책이 유머러스할 수 있다는 점도 놀랍지만 지속가능한 행복이 죽음과 딱 닿아 있다는 것... 새삼스럽다.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면... 닥친 현실이 덜 가혹하다고 생각될까. 그럴 수 있겠다. 이미 죽은 바에야 뭐 중요할 게 있다고. 나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게 했던 젊음이 한 발짝씩 멀어지는 걸 느끼는 요즘 외려 아침마다 눈 뜨면 생각한다. 아 죽지 않고 또 살았구나. 감사한 하루가 또 주어졌구나. 정말이지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연초에는 더욱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