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책읽기

얄미운 고모같은 작가 <<나의 아름다운 이웃 - 박완서>>

소라언냐 2024. 1. 24.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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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이웃

 

 
 

여자들끼리의 수다 같은 책

모국어로, 여성 작가에 의해 쓰여진 글을 읽는 것은 분명 책을 읽는 즐거움들 중에서도 새로이 꼽을 또 다른 낙이다. 여자들끼리의 수다가 더 즐겁듯 나는 여성 작가의 글들이 더 구미에 당기는 듯하다. 
 
박완서 작가의 책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꼴찌에게 갈채를>>에 이어 이번이 세 권째 책일 뿐인데도 벌써 박완서 풍의 글이라는 포맷이 익숙하다. <나의 아름다운 이웃>은 전에 읽었던 <<꼴찌에게 갈채를>> 책에서 이미 읽었던 콩트였다. 짧은 글들은 이렇게 저렇게 묶어 편집해 출판을 한 모양인지 초기에 썼다는 콩트들은 다른 책들에도 중복되어 있는 듯하다. 
 
 

얄미운 고모 같은 작가

내게 박완서 작가는 입바른 소리 잘하는 쫌 얄미운 고모 같은 작가다. 다들 별스럽지 않게 하고 있어 나 하나 더 뭍어간다고 별일 있겠어 하는 안일함의 폐부를 말랑말랑한 일상의 문체로 그야말로 쑥! 찌른다. 명랑하나 날 선 문체가 읽는 내내 긴장하게 하지만 네 흉이 곧 내 흉인 조카 고모 사이처럼 집안 사람이 들이미는 문제 제기는 민망하기는 하나 억울하지는 않다. 사실이 그렇지 모...
 
김홍도 화가의 풍속화 마냥 작가도 70년대 한국 서민들의 생활상을 그리고 그 속의 문제 의식들을 예리한 통찰력으로 그리듯 글로 남겼다. 미친 듯 오르는 부동산 가격과 내 집 마련의 고충, 고등 교육을 마쳤으나 여전한 여자의 사회 진출의 어려움과 기실 정해져 있는 여자로서의 삶. 외모와 학벌, 집안 등의 조건들을 맞춘 장사 같은 사랑과 결혼, 서울 특히 강남으로의 진출, 교육, 이민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통해 기어이 이루려는 신분 상승의 욕구. 한편 이와 함께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현기증과 단절로 인한 소외감을 토로한다.
 
70년대면 내가 태어났던 때라 그렇게 오래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글들을 읽는데 왜 이리 고릿적 글처럼 걸리는 부분들이 많았는지 작가가 일부러 고쳐두지 않았다고 귀뜸해주지 않았으면 작가의 수준을 의심할 뻔. 하지만 다시 보니 근 50년 전의 이야기들이었음을 깨달았을 때는 혼자 아연실색했다. 강산이 다섯 번은 바뀌었을 시간이 흘렀으니. 
 
그러나 그러한 세월이 흘렀음에도 다수의 콩트를 시작하는 인물 소개가 외모, 키, 소득과 학벌 수준으로 시작되어 전개되는 글들을 몇 편 연달아 읽자니 짧은 지면을 고려한 전개일 수도 있으나 그때나 지금이나 타인을 평가하는 외모지상주의 기준은 별반 변한게 없구나 싶어 씁쓸하다.
 
 

<노파>

가장 인상 깊었던 글은 <노파>였다. 불쌍한(?) 사람을 돕는다고 포장하는 에고의 은밀한 즐거움의 고백과 그에 따른 과보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자세가 보였달까.  

노파는 나의 소위 착한 마음의 허실을 빛과 그늘처럼 명백히 들여다보고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의 자선을 베풀고 싶어하는 마음을 비웃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노파가 혼자서 고목처럼 서 있는 모습을 보면서 자존심이 후광처럼 서려 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런 자존심으로 당당하게 장사를 해서 사는 노파가 고객에게 바라는 건 결코 자선이 아니라 평등이라는 생각이 든다.
...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않으리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노파에게 자선을 베풀고 있다는 우월감이 나에게 남아 있는 이상 아마 나는 노파로부터의 그 정도의 보복은 피할 수 없으리라.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 1>

학교를 다니는 동안은 평등하다고 배우고 자랐으나 졸업 후에는 여전히 답보중인 여성의 삶과 사회적 지위.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 시리즈를 읽고는 지금의 현재의 이야기를 읽는 듯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분희 부인으로부터 며느리 경숙 그리고 손녀 후남이로, 심지어 여자에서 여자에게로 이어지는, 조금의 악의적인 의도를 드러내지 않고도 마음 먹은 대로 여자를 길들이는 음모. 

요컨대 이십 호 남짓한 이 폐쇄된 사회의 여론은 분희의 외며느리 노릇의 어려움을 동정하는 척하면서 한편 홀시어머니의 심술 또한 무슨 기득권처럼 인정하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 2>

(며느리)경숙이 조금만 신중하거나 음흉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분희 부인은 경숙의 이런 당당함이 심히 아니꼬웠다. 그러나 조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내색을 하느니만 못한 음모를 조금씩 키워가고 있었다.
...
그녀는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새롭게 처량해했고 한스러워했다. 이제 사람들은 (시어머니인 분희부인이) 망령났다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분희 부인이 꾸민 음모의 진행이었다. 그녀는 외아들을 수태하기까지의 비화를 통해 결코 그녀의 맺힌 한을 넋두리 하려는 게 아니었다. 면면히 이어 내려오는 혈통을 끊기지 않게 하려는 조상의 섭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말하고 싶은 거였다. 그런 섭리를 감히 거스르려는 앙큼한 며느리를 나무라고 싶은 거였다.

자기는 나서지 않고 뒤에서 서두르지 않고 그러나 끈질기게 자기가 원하는 게 사회적인 분위기가 되게끔 조작하려는 그녀의 음모는 철저한 것이었다.
...
첩이라도 얻어주어 아들을 보게 하자는 발상은 분희 부인이 은근히 바라던 대로 경숙이네 친정 쪽으로부터 나왔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 3>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손녀 후남)는 미리 투지를 상실하고 있었다. 그녀답지 않은 일이었다. 졸지에 아들을 지방으로 좌천시킨 며느리에 대한 시집 식구의 비난쯤은 그래도 견딜 만했다. 견딜 수 없은 건 그녀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애걸이었다. 이 두 늙은 여자들은 후남이가 이번 일로 남편이나 시집 식구 눈에 나 시집을 못 살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들의 여생이 유일한 낙은 후남이가 그들처럼 팔자 사나운 여자가 안되고 아들 딸 잘 낳고 살림 잘하고 풍파 없이 사는 거였다.

후남이는 거듭한 고배로 의식은 더욱 명료해져 눈 아래 거대한 도시, 그 갈피 갈피에 여자 길들이기의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가 공룡처럼 징그럽게 도사리고 있음까지를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성공 물려줘>

<성공 물려줘>에서는 공동체 마을에서 세를 사는 동안 그 변변찮은 음식마져도 나눠야 하는 너나 없는 생활로부터 염증의 느끼던 주인공이 소위 성공해 아파트 한 채를 소유하고 난 후 이웃과의 단절을 겪은 후, 다시금 공동체 생활에 향수를 느낀다. 나와 다름 없는 주인공을 본다. 윤회를 본다.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개인의 소외

박완서 작가의 글은 재미있게 읽히기도 하고 읽는 동안 남얘기가 아닌 듯 우리 가족 친인척들이 쉽게 연상되는 익숙한 스토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글들이 힘있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우리 일상 속의 소외된 개인들을 정확히 짚어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농촌에서 도시로 올라와 가열차게 앞만 보고 사회에서 요구하는 지식을 쌓고 경력을 만들어 주류로 진입해가고 있다고 느끼며 안도감을 느끼지만, 노동 수입이 끊기는 순간 누리던 이 모든 생활로부터의 단절이 확실한 무산 계급으로서의 공포와 불안감은 상수이다. 직장인은 단칼에 죽고 자영업자는 서서히 죽어간다 하지 않는가.
 
도시의 화려함이 곧 나의 성공인 듯 도취되어 지내지만 불쑥불쑥 내게 주어진 자유란 기실 나의 노동력을 어디에 팔 자유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허무함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그 쳇바퀴에서 쉽게 내려올 수는 없다. 이제는 나뿐만 아니라 나의 가족 모두가 달리고 있는 상황이므로.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만났던 서늘한 문장을 인용하며 마친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자유를 반납하게 되었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자유는 '자본'이 있어야 자유롭다. 즉 내가 살아가는 것은 나의 자유이지만, 동시에 내가 살아남는 것도 나의 책임이 된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란, '경쟁에서 살아 남는 자유'인 것이다. 누가 자신의 생계를 돌봐주는 사람이 없고 그럼에도 스스로 먹고 살아야 하니까 사람들은 치열하게 경쟁할 수 밖에 없으며, 이러한 경쟁은 끊임없는 불안과 고독감을 야기시킨다. 우리는 이러한 불안과 고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권위에 자유를 반납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