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사장의 책 <<지적인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에 이어지는 책 <<지적인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2>>. <지대넓얕 2 - 현실 너머>편이라고도 불린다. 짧게 <<지대넓얕 1>>과 <<지대넓얕 2>>라고 쓰겠다. 불만 있다면... 발 들어주세요.
<<지대넓얕 1>>이 역사/ 경제/ 정치/ 사회/ 윤리의 현실세계에 대한 지식에 대해 다뤘다면 <<지대넓얕 2>>는 말 그대로 철학 /과학 / 예술/ 종교/ 신비 등 작가의 말에 따르면 진리의 후보들에 대한 지식들이 되겠다. 현실 세계와 현실 너머의 지식들을 분류하여 각 1, 2권으로 출판 되었으나 관통하는 큰 주제는 ‘자아와 세계의 관계’라는 동일한 주제이다.
이상하게 책이 안넘어가네...
<<지대넓얕 1>>은 졸라맨 삽화, 중간/최종 설명 등에 감탄하며 알고 있던 내용을 이렇게 쉽게 정리해준다면서 정말 수월하게 읽은 것 같은데 <<지대넓얕 2>>는 재독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원래 형이상학적인 내용이 그렇지 뭐...’ 하기에는 뭔가 수상하다. 왜 같은 작가가 정리해준 것이었는데도 1편 보다는 어렵다고 느꼈을까? 나름의 이유를 정리해보자면 <<지대넓얕 1>>이 우리가 통상 정규 교육시에도 배웠고, 시험도 봤던, 익숙한 내용에 대한 채사장의 정리라 읽기 수월했던 건 아닐까? 사회가 우리에게 친절하게 이건 꼭 공부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류의 지식들 말이다.
반면 <<지대넓얕 2>>는 내용이 형이상학적일 뿐만 아니라 신비 등의 분야는 배운 적도, 들은 적도 거의 없었기에 독서 근육이 전무했던 내 개인적으론 이런 ‘신비’ 같은 분야의 내용이 공공연히 출판되어 베스트 셀러로 읽히고 있다는 점 그 자체가 신기했을 정도. '나만 이런 책에 관심이 있는게 아니었어 허허'.
역으로 이 책을 읽은 후 독서 분야를 넓히는데 자신감이 생겼달까? ‘좀 이상한’ 내용을 담은 책. 개신교도로서 관심 가지면 안될 법하다고 여겨지는 내 마음 속의 금서 분야. 영적이거나 신비한 분야에 대한 영성 서적들을 고르는 데에 주저함이 없어졌다.
책 내용을 소개할까요
정리하자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서양 근대의 경험론이 승리한 세계, 즉 세계가 먼저 있고 내가 이후에 와서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살고 있는데, 이제 자아와 세계가 하나라는, 내가 사라지면 우주도 사라진다는 일원론적인 세계관을 역설하는 주장들을 주로 다루니 기존의 나의 세계관을 크게 흔드는 내용이라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당황스러웠던 것이리라.
게다가 한 분야만 그런 것이 아니라 2권 통틀어 모든 분야가 그렇다. 철저히 이원론의 세계관이라 생각했던 서양 철학, 과학, 그리고 유일신교까지... 깊숙히 그 뿌리를 들여다보면 일원론의 세계관을 말하고 있었다니. 자고로 진리란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며, 불변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 진리에 대한 고찰이 시대적인 흐름에 따라 바뀌어왔다는 사실에 대한 충격. 이래 저래 쉽게 읽힐 수는 없는 내용이었다고 위안을 한다.
[ 철학 ]
우선 철학은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철학을 다뤘다. 주류 서양 철학의 세계와 자아에 대한 이분법적인 입장을 ‘코페르니쿠스적으로' 뒤집은 칸트의 관념론을 책 전반에 걸쳐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시험 치고 잊어버린게 미안할 정도로 칸트의 ‘물자체'에 대한 숙고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어디부터가 철학이고 어디까지가 종교인가. 그 옛날의 석가모니와 칸트는 어떻게 닿을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사유를 저토록 깊이 할 수 있었을까? 친절히 글로 써놓은 걸 반복해 읽어도 이해가 될락말락하는데... 그 사유의 깊이에 대한 존경과 동시에 해탈은 저 글로 써놓을 것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순간 이루어지겠다는 어줍잖은 해석을 했다.
[ 과학 ]
과학도 익숙한 주류 과학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간략하게 다뤘고, 코펜하겐 선언 이후 새로운 시대의 물리학으로서 과학계의 회의주의로 분류되는 양자물리학에 무게를 두고 설명하고 있어 시종일관 ‘관찰자로서의 나'를 소환해 세계와의 관계를 말한다. 관찰자로서의 나는 이후 채사장의 책 <<우린 언제가 만난다>>에서 '우주의 자기반성의 결과로서의 나'로 소환되어 더욱 깊이 있게 설명이 이루어진다.
‘과학은 진보하지 않는다'는 쿤의 패러다임 이동 아이디어가 신선하다. 과학=진보는 진리 아니었던가. 과학도 주류과학은 역시 권력이었다는 사실을 과학자의 입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 예술 ]
예술은 서양 미술사를 다루는데 대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던 고전미술에서 대상 해체를 근간을 하는 현대 미술로의 변화를 짚어준다. 미술사를 다 읽고 난 후에는 컨템포러리 아트 전시회에 가서 도오전! 하고픈 의지가 생겼다. 구상화, 추상화들의 그 난해함을 미술사에 대한 간단 이해만으로도 대략 ‘아! 새로운 무엇인가를 시도하려고 노력하고 있구나.’ 또는 ‘예술의 대상, 주체, 의미 중에 무엇을 흔들고 있는것이지?’라고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준 작가에게 감사하다. 미술관에서 노는 방법이 +1 되었습니다.
[ 종교 ]
종교는 상대적 다신교와 유일신교를 비교해 보여준다. 그 중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절대적 창조주를 유일신으로 믿으며 세계적인 종파가 되었지만 구약의 하나님만 공통으로 믿는다. 예수와 모하메드는 메시야와 선지자의 어디쯤으로 서로 인정하고 하지 않는 부분이 다르고.
유일신이라며... 유일한 절대신에 대해 어디까지만 믿고, 어디부터는 논외로 하니 그렇게 알고 믿으라고? 마치 한국의 보수와 진보가 같은 조국의 건국기념일을 달리 계산하는 것처럼 매우 정치적인 냄새가 난다. 이 책을 발판으로 읽었던 종교 서적들을 바탕으로 개인적으로는 초기 기독교조차 예수의 가르침은 분명 일원론이었으리라 믿는다. 그래야 성경의 비유들이 이해가 된다.
[ 신비 ]
신비의 내용은 태어남과 죽음의 체험, 그 궁극의 자아만이 체험할 수 있는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 이외의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체험이라 과학적으로 실험, 검증될 수 없는 한계에 대한 대안으로 뇌과학이 발전되어 왔다고 하는 점이 쉽게 이해가 된다.
뇌 과학책들이 그렇게 잘 팔리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누구나 ‘과학적으로’ 검증 불가능한 나의 고유한 체험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읽고 싶어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 또는 나만 자폐가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을 갖기 위한 것이 아닐까.
단순하지만 비교를 통한 이해
<<지대넓얕 1>> 글에서도 말했지만 채사장의 지대넓얕 시리즈는 복잡한 세상을 너무나 단순화해 설명한다는 비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책을 두세 번 읽게 하는 힘은 이렇게나 복잡해보여 쉽게 들여다보기도 엄두가 나지 않는 이 거대한 세계와 그 너머를, 그리고 그 세계와 나와의 관계를 간단명료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책도 드물기 때문일것이다.
‘이 지도를 들고서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대화하고 위로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인생의 의미와 깊이는 타인과의 대화 속에서 비로소 빛을 낸다.’ 에필로그의 작가의 말처럼 이 두 권의 책으로 나의 독서 여정과 만남의 간단 버전 지도를 가졌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어디로 갈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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