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책읽기

판단중지 <<도덕경 - 노자>>

소라언냐 2023. 7. 11.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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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중지 - 도덕경 (The Tao Te Ching)

 

 
도덕경(큰글씨책)
자기를 완성하는 진리를 담은 『도덕경』 전편을 넉넉하고 유연한 해설로 시처럼 잠언처럼 들려준다.
저자
노자, 오강남 (풀이)
출판
현암사
출판일
2016.07.15

 

작가 노자님을 소개합니다

도덕경의 저자는 잘 알려진 대로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노자다.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시호는 담(聃)이다. 은둔 철학자인지라 성문을 빠져나가면서 남긴 5천여 자의 글귀가 <<도덕경>>이라는 책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중국에서도 가장 주석본이 많은 책 중 하나라고 한다. 

 

해설본 작성자 오강남님을 소개합니다

이 책에 더욱 흥미가 있었던 것은 <<도덕경>>이라는 고서를 이제 접하는구나 하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해설본의 저자가 캐나다의 비교종교학자 오강남 교수인 점이었다. 그의 저서 <<또 다른 예수>>를 읽었을 때 나그함마디에서 발굴된 도마복음의 실존을 알게 되었고, 가히 혁명적이라고 밖엔 할 수 없는 도마복음의 내용을, 주류 비교종교학자를 통해 알게 되어 정말 크게 감사하며 읽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었던 나는 왜 이런 문서를 공을 들여 찾아야만 닿을 수 있었을까... 나그함마디 문서에 대한 오강남 교수의 안내를 덧붙인다.

나그함마디 문서의 발견은 1947년 발견된 ‘사해두루마리 Dead Sea Scrolls’의 발견과 더불어 성서 고고학상 최대의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해 두루마리가 주로 히브리 성서와 유대교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면, 나그함마디 문서는 특히 신약 성서학과 초기 그리스도교 연사 연구를 위해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 오강남 <<또 다른 예수>>

각설하고, 여러 작가들의 그 많은 <<도덕경>> 해설본들이 존재하지만 오강남 교수의 해설본이 우리 독서 모임 싸목싸목에서 추천되어 함께 읽게 되었다는 사실이 우연일까? 지금도 거듭 감사할 뿐이다.

 

책 내용을 소개할까요

노자, 도가, 도덕경, 노장사상, 장자, 호접몽, 복숭아, ... 등등 기존에 내가 도교하면 떠올랐던 이미지는 구름 위 흰 수염을 기른 신선들이 장기를 두고 있는, ‘도가도비상도'라는 글귀만치나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이었달까. ㅎㅎ

 

하지만 채사장의 <<지대넓얕 0>>에서 처음 제대로 접한 <<도덕경>>의 내용은 놀랍게도 베다, 불교, 도가, 서양 철학, 그리고 초대 기독교까지 한 목소리로 전하는 신비한 지혜 즉, 일원론의 세계관의 가르침이었다.

 

정말이지 충격적이지 않은가? 고대의 일원론의 세계관 지혜가 동일하다는 것도 충격적이지만 나는 어쩌면 이렇게도 철저한 이원론의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는지... 또 노자의 도교 사상에 대해 이렇게나 오해를 하고 있었던건지...

 

춘추전국 시대에 살았던 노자의 <<도덕경>>은 개인의 삶과 위정자들의 정치를 어떻게 도에 입각해 꾸려나갈지에 대해 알려주고 있으며, 이렇게 도에 따라 생활하고 경영하면 도가에서 말하는 이상향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치적 이유로 저자를 알 수 없게 익명의 글을 남긴 것이라고도 전해질만치 급진적이기도 하다. 책을 읽으면서  메모를 남겼던 부분들을 정리해 서평으로 갈음한다.

 


 

<<도덕경>>하면 주로 ‘무위’를 가장 많이들 인용하는 것 같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등장했던 노자의 조언은 판단중지. 너와 나, 선악 미추와 같이 이분화 된 개념 즉 분별지를 버리라고 가르친다. 존재의 세계는 비존재의 세계를 통해서만 그 유용성을 발현하게 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추함이 있어 아름다움이 있고 비어 있음이 있어 공간이 생기는 것이므로 분별심을 내는 것이 아무런 소득이 없슴을.

 

도의 상징 중 하나인 ‘자기라는 의식마저도 없는 활달한 자기’인, 갓난아기처럼 피아/주객의 분별심을 갖지 말아야 할 것을 거듭 거듭 당부한다. 익숙한 분별의 세계, 상식의 세계를 초탈해 인식의 천이(noetic reversal)를 가지고 분별 그 너머에 살라는 것.

 

이미 실낙원했다면 복낙원하는 것이 갈 길이며, 그 길이 어렵고 힘들지만 잃어버렸던 경험 후 다시 찾은 복낙원은 낙원에서만 머물었던 것과는 급이 다른 체험이므로. 그리하여 살아서 천국을 맛보라는 예수의 말씀과 동일하다.

<<도덕경>> 전체를 놓고 볼 때 여기서 무지를 강조한 것은 우리의 이원론적 사고에서 얻어진 일상적인 지식, 세상을 도의 입장에서 보지 못한 데서 나온 단견, 소위 분별지로서의 지식을 버려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른바 잘못된 배움을 ‘없애 가는 (unlearning)’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비본래적인 작은 자기에 죽으면, 본래의 큰 자기가 되살아난다는 ‘죽음과 부활'의 종교적 역설의 논리이다.
처음 낙원에서는 주객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의 ‘꿈꾸는 듯한 천진성 (dreaming innocence)’에서 살았지만 이런 상태를 잃고 지금처럼 주객 분리의 상태에서 살다가 이런 상태의 한계성을 자각하고 이 상태를 벗어났을 때는, 처음 상태와 두 번째 상태가 변증법적 종합을 이룬 제3의 더욱 고차원적 의식 상태로 승화하기 때문이다. … 이렇게 변증법적 변화 과정을 꿰뚫어보는 것이 ‘미명' 즉 ‘은근한 명찰'이라는 것이다.

 

또한 ‘하지않는 함’인 ‘무위’를 거듭 강조한다. 자연을 지배하고 극복하려 대상화하는 이원론의 세계관과 철저히 반대되는 ‘무위’는 물처럼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하나가 되라는 가르침이다.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럽고(natural) 너무 자발적(spontaneous)이어서 자기가 하는 행동이 구태여 행동으로 느껴지지 않는 행동, 그래서 행동이라 이름할 수도 없는 행동, 그런 행동이 바로 ‘무위의 위' ‘함이 없는 함'이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도덕경>> 역시 체험을 강조한다는 점이 반가웠다. 첫 장인 제 1장에서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라고 시작하듯 궁극의 실재인 도는 직관과 체험의 영역이므로 그것이 무엇인지 꼭 집어 말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도는 본시 개인의 지극한 체험일 수 밖에 없으므로.

계속 버려서 결국 우리의 제한된 안목에서 얻어졌던 일상적 지식이 완전히 없어지는 완전한 ‘무지'의 경지에 이르면 그 때 새로운 의미의 완전한 앎, 궁극 지식의 경지가 트이는 셈이다. 이를 ‘박학한 무지 (docta ignorantia)’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혜안이 열려 개오하는 체험이 있으면 진리의 말이 단순한데, 그런 체험이 없으니 이처럼 이해할 수도 없고 따를 수도 없는 것이다.

 

제 6장 ‘도는 신비의 여인'에서 오강남 교수가 페미니스트의 지침서로서 <<도덕경>>을 추천했을 만치 도는 갓난아기, 다듬지 않은 통나무, 물, 계곡과 함께 여인을 도의 아이콘으로 설명하고 있음을 상기시키며 ‘하느님 어머니'와 같은 표현을 제안한다. 공감한다.

‘도’는 신비의 여인, 우리를 낳고 기르고 먹이고 감싸주는 어머니. 이런 표현이 ‘만왕의 왕', ‘만주의 주' 보다 훨씬 부드럽고 안온하고 포근하게 들리는 것이 사실 아닐까?

 

제20장 ‘세상 사람 모두 기뻐하는데’'와 제 70장 ‘내 말은 알기도 그지없이 쉽고' 챕터에서는 <<싯다르타>>에서 읽었던 깨달은 자의 절대고독, 그 실존적 고독이 다시 읽힌다. 아래 작가의 말에 십분 공감한다.

역사적으로 이렇게 일반 사람들의 이해를 넘어서는 경지에서 고독했던 사람이 얼마일까? 인간 역사는 이런 위대한 사람들이 그들의 고독 속에서 밝힌 진리의 등불로 이 정도라도 밝음을 유지하고 있는 것 아닐까? 우리는 이런 분들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지를 부끄럽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감사할 줄 알아야 하리라.

 

제 13장과 21장에서는 남들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 도를 체득함으로 자유를 구가하는 삶을 이야기한다. 지난 번 모임이 니체 입문서였던 까닭인지 나는 이 부분이 니체의 ‘힘에 의지' 그리고 ‘노예의 삶'을 버리라는 동일한 메시지로 읽혔다.

덕이란 도를 따르므로 세상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힘, 여유 같은 것이다. … 이런 사람은 윤리적 차원을 완성하고 이를 넘어서서 훌훌 자유로이 살아가는 능력 때문에 ‘덕'의 사람, ‘힘'의 사람이 된 것이다.
결국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이 불가능한 삶, 그저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면서 사는 ‘비교급 인생'으로 전락하고 만다. 차분하고 홀가분한 삶의 담백한 맛을 모르고 사는 비참한 삶이다.

 

그동안 오지게 오해하고 있었던 <<도덕경>>을 마쳤다. 노자님께 죄송죄송 굽신굽신한 마음 ㅎㅎㅎ

먼저 깨달았던 분들이 남긴 주옥같은 가르침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기에 세상이 이마만치나 살 만하다는 작가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남이 남으로 보이지 않는 경지이므로 가던 길을 멈추고 즉시 오천자나 되는 글을 남긴 것이 아니었을까. 말로는 전할 수 없는 비밀임을 익히 알면서도 아직 어두운 눈으로 세상에 치여 사는 또 다른 내가 딱하기 그지 없었을테니.

 

 

도덕일치, 범아일여, 일체유심조, 관념론, 내면의 빛.

고대의 거대사상을 관통하는 하나의 목소리. 노자의 가르침이 예수, 붓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채사장을 통해 먼저 알고 찾아 읽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놀랍기 짝이 없다. 이제 내게는 친숙치 않은 베다의 내용도 몹시 궁금하다. 거기엔 또 어떤 말로 같은 가르침을 주려나… 책을 찾아 읽는 즐거움이 참으로 쏠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