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책읽기

채사장이 궁극적으로 쓰고 싶었다는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 - 채사장>>

소라언냐 2023. 7. 18.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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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넓.얕 0의 키워드를 공개합니다 : )

 

 

현대인들은 인류 사상의 역사가 파편적인 정보의 무더기일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실제로는 놀라운 정합성과 일관성으로 이어져 있다. 하나의 철학, 종교, 사상 속에서는 찾아낼 수 없지만, 마음을 열고 위대한 스승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거대 사상의 맥락을 발견하게 된다.

 

책은 처음부터 이 책의 목표와 결론을 뚜렷이 밝히고 시작한다. ‘위대한 스승들'과 ‘거대 사상.' 그리고 이 신비한 사상은 일원론이라고. 단적으로 서양철학/기독교와 동양철학/불교는 태생이 달라 결코 연결되어 한 목소리를 낼 수는 없다고 믿었던 나의 무지. <<지대넓얕1>>을 읽고 나서 각 분야를 독립된 교과로만 배웠지 그렇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놀라움과는 결이 다른, 충격에 가까웠다.

 

내게는 진리나 마찬가지였던 이원론이 아닌 일원론 세계관의 사유 (범아일여, 도덕일치, 일체유심조, 관념론, 내면의 신)가 특정 지역이나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인류 역사상의 모든 지역과 시대를 포괄하는 보편적인 사유 방식이라니. 고래로부터 이렇게 친절히 여러 스승들의 가르침들이 남겨져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제사 이런 지혜를 얻다니… 정보의 홍수에 산다는 나는 어쩌다 이렇게 철썩같이 이원론의 세계관을 갖게 되었을까.



책 내용을 소개해 볼까요

우주의 탄생

작가가 시간 이전의 시간부터 다중우주, 평행우주, 우주 너머의 우주 그리고 인간중심 원리까지 긴 지면을 할애해 설명한 다음 내린 결론은 세계가 발현된 주요 요인인 관찰자로서의 나를 설명하기 위해서였고, 이 관찰자는 놀랍게도 동양과 서양의 거대 사상으로 이어진다. 현대인들은 아무래도 ‘과학적인' 증명이 되어야 수긍할 수 있을테니.

양자물리학을 인정하는 관점에서 의식적 존재 즉 관찰자에게 결코 발견될 수 없고 내부에 의식적 존재를 잉태할 수 없는 우주라면 그 우주가 존재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바꿔 말하면 어떤 우주가 우주로서 존재하려면 그 안에 의식적 존재를 포함해야만 한다. ‘우리는 왜 우주를 이해하려고 하는가?’ 에 대한 심오한 답은 이것이었다. “그것은 우주의 자기반성 과정이다.” 어쩌면 우리 우주는 우리가 이곳에서 눈떴기에 비로소 존재론적 의미를 획득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무거운 원소들은 오랜 시간 동안 우주를 돌아다니며 뭉치고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지구라는 행성을 이루기도 하고 생명들과 인간의 몸을 이루기도 했다. 우리 몸을 이루는 무거운 원소들 대부분은 모두 거대한 별 안에서 생성된 것이다.



베다

이 책을 읽지 않았으면 알지 못했을 것이고,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불편했을 사상. 나와 세계의 관계를 설명한 우파니샤드와 기대없이 행하고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내려놓음에 대해 설명한 바가바드 기타. 작가의 말처럼 내게 친숙한 브랜드가 아니라 조금 애정을 가지고 들여다 봐야 했었는데, 오~ 왜 인류의 반이 이 사상에 적을 두고 있는지 이해가 된다. 특히나 바가바드기타는 모든 종교가 겪는 탈속과 세속의 경계 문제를 현명하게 해결하는 방안도 제시한다. 



도교

책을 읽기 전 노자 도덕경의 도덕일치라는 말은 막연히 도덕 윤리에 대한 얘기로만 알고 있었다. 동양철학을 공부해 본 적도 없으면서 은연중에 서양철학보다 한 수 아래처럼 생각하던 나... 탈속을 주장한 노자와 세속에 있으면서 지금 여기에서의 변화을 추구한 공자의 가르침의 대립은 다른 지역의, 다른 종교에서도 발견되는 보편적인 문제라는 것까지도 공통점이란게 신기할 따름이다.

 

허나 예를 강조하는 사회는 이미 인, 의가 사라진 사회라는 노자의 일침. 최근 중국 공산당은 교과서 등에 다시 공자의 예를 강조하기 시작했다는 책을 읽었다. 닥치고 ‘군군신신부부자자’하란 거겠지. 차가운 철권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동원되는 ‘예’.



불교

불교 사상의 읽으면서 도티 박사의 <<삶을 바꾸는 마술가게>>와 론다 번의 <<시크릿>>에서 언급했던 인류의 오래된 비밀이라는 것은 ‘일체유심조', 실상은 불교 사상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이원론의 세계관을 가진 서양인들에게는 충분히 불교의 일원론 세계관이 동양의 오래된 신비로 비춰졌을 수 있었을 것이다.

 

도티 박사의 경우에도 ‘마음 열기'가 어려웠고, 그점에 실패해서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자신과 주위 사람들에게 겪게 했었다고 했었는데, 그 마음 열기라는 과정이 당신과 나, 세계가 하나라는 일원론의 세계관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과정이지 않았을까. 머리로 이해하기는 쉽지만 마음을 열어 진심으로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니. 어린 도티에게 마술을 알려준 루스의 당부도 그러했고, 작가도 이책에서 경계를 했듯이 일체유심조가 단순히 ‘네가 마음먹은 대로 될 것'이라는 자기계발적인 메시지로 해석하기 어려운 것이 이 때문이리라.

일체유심조는 존재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꿰뚫으며, 공은 단순히 허무나 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의미로 단순히 없다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실체가 없이 존재는 연기 안에서 잠시 일어선다.



서양 철학

왜 때문일까나…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고전이라는 <<길가메시 서사시>>를 읽었을 때 ‘노아의 방주 사건'이 떠올랐듯이 자꾸만 칸트가 동양 사상에서 힌트를 얻어 그의 ‘코페르니쿠스적' 관념론을 완성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ㅋㅋㅋ. 이런 농담이 가능할 정도로 외부의 세계를 내면의 세계로 끌어들인 그의 관념론은 동양의 거대 사상과 일치한다.

 

이는 역으로 시간과 공간은 달라도 궁극의 진리에 닿는 방법은 한가지라는 것. 보이는 현상에 휘둘리지 않고 내면의 눈으로 보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칸트의 철학을 다시 읽으면서 화해할 수 없을 것 같던 동서양의 철학이 실은 하나를 가르켰다는 사실에 마음이 벅차다. 

 

 

기독교

읽는 동안 바울이 조금 원망스러웠을 정도. 본인도 부인할 수 없는 강렬한 체험을 동력으로 열렬히 복음을 전파했겠지만 그의 체계화를 통해 신의 반열에 오른 예수의 기독교는 세계 종교로 도약은 가능했으나 덕분에 지금, 여기 현실의 땅에서 천국을 누리며 살기를 말했던 예수의 말씀과는 괴리가 생겨버렸다고 생각한다. 

 

마에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신앙에 대해 알게 되면서, 몇년 전 금서를 읽는 듯한 두근거림을 가지고 읽었던 <<도마 복음>>. 비교적 최근인 1945년 나그함마디 지방에서 발견된 두루마리에는 제자였던 도마가 기억하는 생전의 예수와의 대화만을 직접 화법으로 기록해두었는데(그래서 Q복음서라고도 불린다), 이 말씀들로만 비춰보아도 초기 기독교는 분명 일원론의 사상이었다. 왜 이런 문서는 발견 이후에도, 정보 통신이 이토록 발달한 지금도 종교학자들을 통해서만 닿을 수 있는건지… 지금의 조직화된 기독교에서 예수의 생전 말씀은 외면당한다는 느낌이 든다.

내 주변에서 나를 걱정해주는 이들, 가족, 학교, 사회, 국가, 이념, 종교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조차 위험한 일이라고 나를 단속해왔으니 말이다.



남기고 싶은 문장들

고대인들에 비해 우리는 더 행복하고 지혜로와졌는가. 책을 읽는 동안 여러차례 탄복했다. 어떻게 그 시절에, 그 아무런 과학적 지식이 없을 때에도 나의 심연으로 내려가야 탈출구가 있고, 그 출구는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을까. 외려 상대적으로 단순한 삶을 살았기에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걸까. 인생 중 깨달음을 위한 별도의 시간을 준비했던, 현실과 구도를 다 챙겼던 고대 인도인들은 또 얼마나 지혜로운가.

 

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교회를 통해야 하고, 아! 소리할 수 없는 과학적인 증거를 들이대야만 믿는 현대인의 눈으로 보니 이리 경탄스러워 보이는 것인가? 마에스터 에크하르트의 말처럼 내면으로 눈과 귀를 돌리는 것은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깨달음의 방법이었던가보다.

어린 코끼리가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단순하다. 자유를 향한 자기 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하고, 세상이 혼란스럽지 않은 척하는 것이다. 어쩌면 파잔 의식을 시행하는 자들도 피해자일지 모른다. 그들의 영혼도 이미 산산이 부서진 것일지도 말이다. 그들이 처음 아기 코끼리를 구타하는 것을 주저할 때, 그의 가정과 사회는 그에게 친절하게 말했을 것이다. 질문을 멈추라. 그것은 먹고 사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네가 지켜야 할 사랑하는 이들의 생존을 위해 어른스럽게 행동하라. 질문을 멈추라. 생각을 멈추라, 다만 소비하는 노동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라.
결과적으로 오늘날 우리는 동양인으로 태어난 훌륭한 서양인이 되었다.
문제는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갖가지 느낌과 상념이 사실은 우리가 이원론의 세계관 위에 발 딛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갖게 된 것들이라는 점이다. 눈앞의 세계가 실재한다고 믿는 것도, 그래서 마음이나 정신은 소홀히 하고 눈앞의 물질 세계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도, 세계와 자아를 독립된 실체로 느끼며 자신이 소멸한 이후에도 세계가 존속할 것이라고 믿는 것도, 그러니 나의 인생이라는 것은 덧없고 허무하다고 느끼는 것도, 나의 내면은 보이지 않으니 그 안을 들여다 볼 생각은 하지 못하고 타인의 말에 휘둘리게 되는 것도 모두 우리가 자아와 세계를 나누는 이원론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갖게 된 사유의 흔적들이다.
우주의 창조와 소멸을 말하고 물질의 탄생과 생명의 의미와 모든 존재하는 것의 가치를 논하는 자. 이렇게 놀라운 초월적 존재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당신이다. 당신이 세상을 보는 유일한 자이고, 세상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최후의 존재다.
이제 당신이 알려줄 차례다. 자신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출구를 찾아야 한다. 그곳에서 찬란히 빛나는 우주의 본질과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당신이 깨달은 진실을 당신의 입으로 다른 이들에게 전해줘야 한다. 위대한 스승들이 당신에게 그러했듯이.

 

믿고 읽는 채사장이 <<지대넓얕 2>>의 신비편을 좀 더 깊이 팠다는 제로편 재독을 마쳤다. 힌두교 베다, 불교, 도가, 서양 철학, 그리고 기독교까지 기본 삽질만을 마쳤는데도 뿌듯한 이 기분 무엇. 작가의 에필로그 내용처럼 이제 고전을 읽을 간단한 채비를 막 마친 것만 같은 기쁜 마음이 든다. 나는 이제 세상의 목소리에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 있으리만치 충분히 나이 들었고, 맘에 드는 곳을 깊이 파 그곳에 보물을 뭍어둔, 그 옛날의 사람들과 대화할 준비가 되었으니.




덧붙임

도티 박사의 <<삶을 바꾸는 마술가게>>를 읽으면서 다시 조금 흔들렸었다. 도티 박사의 세상적인 성공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나도 맘만 먹으면 그리 될거라 들떴던 마음은 반대로 정작 마술을 가르쳐준 루스와 루스의 아들이 상대적으로 보통의 삶을 살았던 것에, 말년에는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는 조금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아직도 막연히 그림 그려지지도 않는 세상적인 성공을 이루고 싶었구나. 부유하고 인정도 받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삶. 돈이 있어 내 하고 싶은대로 다 하고 살 수 있는 삶.

 

도티 박사가 하고 싶었던 말은 마술로 니맘대로 다 하고 살라는 메시지가 아니었는데. ‘일체유심조’는 자기계발서에서 쉽게 인용할 사상이 아니라는 채사장의 경계에 마음을 들킨 듯 뜨끔했다. 정말로 세계와 내가 하나라는 사실을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졌다면 남에게 인정 받을 일 따위가 없고, ‘남이라고 보여지는’ 이웃의 고통에 함께 아파할텐데 나는 아직 그 정도가 전혀 아니지 않나. 아직도 마음은 열지 않은 채 마술의 열매만 갖고 싶어하는 나. 그토록 마술을 부리고 싶은 것도 결국 남과의 비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나의 세계관의 반증이다.    

 

거대사상 맛보기를 마치고 드는 생각은 빛이라는 나의 존재가 우주의 반성의 과정일 정도로 찬란한 존재인데, 이런 존재감에 일체유심조의 창조력까지 갖춘 나. 그러나 불교에서는 철저히 무아이며, 그저 인연이 있어야만 생기는 존재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내가 가진 창조력으로 좋은 인연을 만들어야겠다. 좋은 카르마를 습으로 유지하면 노력하지 않아도 좋은 인연이 오는 법이니. 행복하게 살아온 사람은 그 습, 카르마로 계속 행복할 것이고 불행하게 살아온 사람은 불행할 확률이 높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도 이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돌고 돌아 다시 왔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나만 빠져있는 미친 생각이 아니라는 걸... 인류의 방대한 사유를 남겨준 위대한 스승들과 이를 압축해 현대인인 내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알려준 작가가 있어 외롭지 않고 진심으로 감사하다. 게다가 독서모임을 통해 이런 생각들을 나눌 수 있다니! 지금 여기서 천국을 맛보고 사는 삶. 루스처럼 평범해 보일지언정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고 평화로운, 남을 생각할 여유가 있는 삶. 부처님의 바른 생각, 언어, 행동 등의 팔정도는 누구에게 심판 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카르마, 즉 좋은 습관을 만들어 좋은 인연을 만드는 것이라 정리가 된다. 그게 나를 돕는 궁극의 방법일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