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책읽기

계급투쟁의 역사 << 미학 에세이 - 진중권>>

소라언냐 2023. 7. 24. 15:15
반응형

미학 에세이

 

예술의 눈으로 세상 읽기 - 미학 에세이

 

 

작가 진중권님은... 다들 아시죠?

미학 Aesthetic. 개인적으로는 피부 관리실의 명패로부터 알게 된 단어였는데 '아름다움에 대한 철학'이라는 심오한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인 줄은 몰랐다. 한국에서 미학에 관해서는 손꼽는다는 진중권 작가가 쓴 글. 2010년대 초반 한참 유시민 작가와 함께 두 작가가 쓴 칼럼이라면 묻고 따지지도 않고 일단 정독했던 작가들 중에 한 사람이다.

 

그의 다소 거친 표현도, 공격적이고 시니컬한 문체의 글도 그때에는 진보 정당의 입이려니 하면 그리 거슬리지 않았는데 현재 이 분은 뉘신지... 온라인 상의 그의 현재의 글, 말들에서 점프해 2013년도 출판된 <<미학 에세이>>의 그의 글을 읽으려니 사뭇 서글픈 마음이 든다.


 

관심이 많았던 책이었는데 시작하면서부터 난해하다. 진작가 특유의 현학적인 표현과 전문가들끼리만 찡긋찡긋하며 알아들을 법한 어휘들. 미학 전공 서적을 공부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으면서 포털사이트에 몇번이나 검색을 하며 따라갔다. 그래도 끝까지 읽어나갈 나름의 지적 허영과 챌린지가 쏠쏠했던 책. 채사장의 <<지대넓얕 2>>의 미술사를 한 번 그렇게라도 훑어 얻었던, 그 얕은 지식이라도 없었더라면 포스트 모더니즘의 ‘해체'에 그리도 열을 올린 작가들의 이야기들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싶다. 다시 한 번 이 어려운 얘기를 쉽게 쉽게 내 수준에 맞춰 책을 써 준 채사장님께 감사.

 

책을 분명 다 끝냈는데... 뭘 읽었더라? 허허. 서평을 쓰려고 앉았는데 책 내용을 내 머리에서 그대로 옮기는 건 알다시피 불가능하다. 박식한 미학 전문가가 쓴 글이고 <씨네 21>에 연재했던 칼럼들을 엮어 출판한 책인 탓에 목록의 짜임은 느슨하나 그리스 비극, 페르소나, 언캐니(uncanny), 시학의 ‘하마르티아', 에로티즘과 죽음, 분변증, 예술과 정치, 기술 미학, 평론, 그리고 한국미까지 다양한 분야로 확장시켜 이야기를 전한 책이니. 기억을 더듬어 인상 깊었던 파트에 대해 글을 남겨 봐야겠다.

 

 

해체

지인 중에 미술 관련 부분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분이 계셔서 뒤샹이라는 작가가 현대미술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줄은 익히 알고 있었다. 뒤샹은 ‘에로즈 셀라비'라는 여성 부캐로도, ‘샘'이라는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남성용 변기에 작가의 서명만 하고 작품이라며 전시함으로써 ready-made, 즉 기성품의 작품화를 열었다.

 

책 내용과는 동떨어졌지만 지인에게 전해들은 뒷 얘기 좀 하자면, 이 작품은 여동생의 친구였던 여성 작가의 아이디어를 훔쳐 본인 이름으로 진행했다는 가설이 있고, 뒷받침하는 칼럼들과 증빙 자료들이 많아 미술계 쪽에서는 믿을 만한 가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한다.

 

여성 작가들의 작업물을 남성들이 가로채 이름을 올린 일들이 비단 예술계 쪽에만 있겠느냐만 전형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의 예술을 ‘해체'하겠다는 그의 작업은 정작 그가 이제 미국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자리잡은, 예술계의 기득권이 되어버린 탓에 부르주아의 ‘전형적인' 예술을 공고히 하는 작가가 되어버렸다.

 

그냥 얘기만 들었을 때에는 알고보니 나쁜 x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치웠겠지만, 미학에세이를 읽고 나니 다른 각도에서 이 에피소드가 읽힌다. ‘샘'이라는 작품을 전시하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 작가는 이렇게 되리라고 기획했을까. 아니면 그저 ‘해체' 본연의 작업에만 열중했었을까.



회복 

체 게바라가 프린트 된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을 그저 대수롭지 않게 보았었는데, 작가의 설명을 듣다보면 서글프다. ‘혁명의 아이콘이 어느새 그가 그토록 증오했던 자본주의의 상품경제에 포섭되어 소비의 아이템이 되어버렸다.’ 자연스러운 미, 눈에 거슬리지 않는 아름다움 = 기득권의 미, 즉 부르주아 자본주의 미술에 저항해 시작된 포스트 모더니스트 작가들의 집중했던 미술사의 ‘해체'로부터의 ‘회복'이다.

 

‘회복'이라는 말은 긍정적으로 들리나 미학에서는 아닌 듯. <위키피디아>는 미학의 ‘회복'을 이렇게 정의한다.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사상이나 형상이 미디어 문화와 부르주아 사회 내에서 뒤틀리고, 포섭되고, 흡수되고, 병합되고, 상품화되어 중립화하고, 무해하고, 사회적으로 좀 더 관습적인 시각으로 해석되는 과정.’

 

회복의 과정을 통해 체 게바라는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까지 사살당한 셈이다. 섬뜩하기 짝이 없다. 표면 뒤에 숨은 저의를 읽어내는 통찰력이 없다면 누구라도 체 게바라를 존경하는 의미로라도 선뜻 프린트 된 티셔츠를 사입지 않겠는가. 새마을 운동처럼 사람들을 드러내놓고 계몽하고, 선동하는 것은 애교로 보일 정도다. 

 

 

전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는 법. ‘해체'에서 ‘회복’, 그 이후에는 상황주의자들의 ‘전환'이라는 전략으로 ‘회복'에 다시 저항한다. ‘전환’은 ‘회복'의 과정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는데, 다시 말해 그 자체로서는 결코 전복적이지 않은 지배 문화의 요소를 티나지 않게 전복적, 혁명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후아~ 

 

실제로 부르주아의 생산 및 출판 기구는 제 계급의 이해를 유지하면서 수많은 혁명적 주제들을 동화할 수 있다. 가령 ‘즉물적 사진은 르포르타주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비참한 생활까지도 완벽하게 유행적 방식으로 파악하여 즐거움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예를 들자면, 철거를 앞둔 판자촌의 삶을 담은 사진 등이 이에 해당하겠다. 이는 상황주의에서 말하는 ‘회복'의 상황이다. 때문에 예술적, 문학적 생산 수단의 기능 전환이 요구된다.

브레히트는 영화, 라디오와 같은 대중매체들을 응용하고 배워, 연극의 기능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지 않았던가. 상황주의자들이라면 이를 ‘전환'이라 부를거다… 디지털 시대에 ‘전환'은 차라리 일상이 되었다. 오늘날 대중은 자본주의가 제공한 도구의 수동적 ‘소비자'로 머물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디지털 기기를 사용해 직접 메시지의 ‘생산자'가 되려 한다.

 

미학에서조차 계급과 투쟁의 역사를 보게 되다니...

<<미학 에세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으면서 이토록 뿌리 깊은 계급과 체제 투쟁의 역사를 읽게 될 줄은 몰랐다. 처음 지인으로부터 뒤샹의 소변기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왜 저런 기행(?)을 하는 건지, 왜 언론은 그걸 그렇게 대단하다 띄우는 건지, 애써 찾아 읽었던 논평은 알아들을 수도 없고... 다들 잘났어 정말. 또 그 말만 뻔지르한 예술 작가의 돌발 행동 정도로 이해하고 치워버렸었던게 사실이다. 

 

아직도 현대미술은 어렵기 짝이 없으나 눈에 보이는 시를 읽는 느낌으로 프레임을 바꿔보려고 한다. 이게 생각과 상상의 힘을 이용할 줄 아는 사피엔스 종 특유의 유희 방법 중의 하나가 아닐까? ㅎㅎ 숨바꼭질을 하듯, 책을 읽듯 작가가 숨겨둔 깊은 생각과 메시지를 나만의 세계에서, 나의 버전으로 재창조하는 즐거움.

 

언제나 새로운 놀이를 배울 때에는 게임의 규칙을 알아야 시작할 수 있다. 게임을 하는 와중에 나만의 꽁수를 발견하면 놀이의 즐거움에 푹 빠져버리듯. '예술의 눈으로 세상 읽기'에 정답은 없다는 건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