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책읽기

성장소설이라고 쓰고 '꿈 깨!'라고 읽는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소라언냐 2023. 8. 11. 13:29
반응형

데미안 Demian

 

 

 

헤르만 헤세

 

작가 헤르만 헤세님을 소개합니다

사진으로 만난 그리고 <<싯다르타>>를 읽고 난 후 연상되는 헤세의 이미지는 왠지 모를 동양적 현인의 풍모가 느껴졌는데, 그의 부모는 일찌기 인도에서 선교사 활동을, 외삼촌 또한 일본에서 활동한 불교 연구의 권위자였던 그의 집안 배경이 있어 그의 작품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가 더 궁금해져 이러저러한 작가에 대한 글들을 읽다 우연히 접하게 된 심리분석학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그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키워드들은 기독교적 경건주의와 가족으로부터의 트라우마, 전쟁 그리고 10여년에 걸친 칼 융 학파를 통한 심리분석학 치료로 정리된다.
 
<<페터 카멘친트>>로 일약 독일어권에서 성공한 그는 이후 전업 작가의 길을 간다. 멜랑콜리라는 신경증 진단을 받았던 그는 펜을 놓아야 할 정도로 우울증이 심해지면 심리분석 치료를 받고, 경과가 좋아질 경우 역작용으로 경조증을 앓게 되는데 왕성한 집필들은 대부분 이때 이루어졌다고 한다. 우울증은 헤세 본인에게는 지난한 경험이었으나 동시에 작품 활동을 위한 보고 그 자체였으므로 병을 치료하지 않겠다고 했을 만치 그의 작품들은 그 자신의 치료를 위했던 심리 분석과 증상의 호전, 악화와 궤를 같이하는 듯.
 
세 번의 범상치 않았던 결혼 생활과 독일과 스위스의 이중 국적. 두 번의 세계 대전과 대공황을 겪은 작가는 2차 세계 대전시 반전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고국 배신자의 프레임과 함께 그의 작품은 인쇄에 필요한 종이를 배당해주지 않는 나치의 탄압을 받게 되고 스위스 국적을 취득하게 된다.
 
고국이 패망한 후 노벨상을 받게 되고, 이후 독일 정권에서도 그에 대한 부정적인 비판들을 지워내면서 독일의 대문인으로 추앙하게 된다. 대표적인 저서들로 필독서들이었던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서>> <<전쟁과 평화>> <<나르치스와 골트문트 (지와 사랑)>> 그리고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유리알 유희>> 등이 있다.
 
 

책 내용을 소개할까요

목차는 간략했으나 매우 기독교적인 모티브들이 흥미로웠다. 
 
제 1장  두 세계
제 2장  카인
제 3장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
제 4장  베아트리체
제 5장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제 6장  야곱의 싸움
제 7장  에바 부인
제 8장  종말의 시작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려는 것,
난 그것을 살아 보려 했을 뿐이다.
그게 왜 그리 힘들었을까?

주도적으로 나의 삶을 나의 방식으로 살아 내어 궁극의 나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가는 것. 이 책은 위의 문장으로 시작으로 열 살의 어린 싱클레어(참고로 헤세는 '에밀 싱클레어'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다)의 이야기를 꺼낸다. 싱클레어는 밝은 세계로 상징되는 집안 배경을 가진 소년으로 이미 어두운 세계도 접해 있다는 것도 알고는 있으나 두려움에 의도적으로 외면한다. 그저 나에게 편안한 이 유아기 상태로 머무르고 싶은 욕망. 그럼에도 그는 존재함이 확실한 어두운 세계를 무시할 수 없었고 결국 ‘사과’를 훔친 무용담을 꾸며내면서 프란츠 크로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
 
 
새로 전학 온 데미안은 언뜻 보기에도 또래보다 성숙했고 뭔가 알 수 없는 신비한 분위기의 소년으로 싱클레어 집 대문의 새의 문장에 대한 언급을 하고, 그 그림을 그리는 등 낡고 오래된 '표식'에 깊은 관심과 의미를 둔다. 성경의 카인에 대한 전혀 새로운 -밝은 세계의 부모님과 전혀 달라 두렵지만 한편 매우 설득력 있고 매력적인- 접근을 보여주었고 독심술을 한다는 소문도 있어 싱클레어는 동급생이지만 약간의 경외심마저 가지고 데미안을 대한다.
 
그의 도움으로 싱클레어의 모든 일상을 잡고 뒤흔들었던 프란츠의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싱클레어는 그 즉시 다시 어머니의 따듯한 세계로 도망쳐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아이로, 아벨로 살며 데미안과 거리를 두려고 한다. 실은 두려웠기 때문이다. ‘세상에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을 가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내키지 않는 일이 없다는 것을!’
 
 
카인의 표식으로 돌아가서, 데미안은 카인과 그의 후세에게 찍힌 낙인은 역으로 그들이 신이 보기에도 옳았고 강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니체의 향기를 강하게 느꼈는데, 알고 있다시피 헤세는 니체와 융 학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니체는 유럽 사회가 오랫동안 조직적이고 정치적인 기독교 지배 하에 놓이면서 약하고, 병들고, - 주인이 두려워 복종하며 살고 있으나 끊임없이 복수를 꿈꾸므로써 종국에는 스스로 자신을 해치는 꼴이 되는 - 노예의 마인드로 살아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여기서 헤세가 말하는 카인이 바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바 대로, 주체적으로 책임지고 살아가는 니체의 인간상이라 할 수 있겠다. 
 
 
상급 학교로 진학하면서 싱클레어는 자기 안의 밝고, 어두운 두 세계의 합의점을 찾아내지 못한 딜레마로 방황한다. 매우 무용하나 본인에게는 죽고 사는 구원의 문제가 되어 버린 딜레마. 술에 취해 지내고 학사 경고가 누적될 무렵 베아트리체를 발견한다. 여성스러우면서도 소년같은 그녀를. 다시 수행자와 같은 생활을 하며 그녀를 그리고 그린 그림을 붙여두고서야 그는 그가 그린 것이 데미안이면서 또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융 학파의 꿈 이론이랄지 호접몽 등의 도가 사상 그리고 싯다르타의 강물과 돌멩이 비유가 생각이 난다. 그는 마침내 데미안이 말했던 황금색 새 그림을 완성해 오랜 친구의 옛 주소로 무작정 보내버린다. 꿈인듯 데미안으로부터 쪽지 답장을 받게 되는데 여기에 <<데미안>>하면 생각나는 그 유명한 문장이 씌여 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수어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아브락사스 신의 이름을 매개로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를 만나 영성 이론의 지식을 쌓고, 벽난로의 불의 변화무쌍한 움직임을 지켜보는 등의 명상도 함께 하며 의지하지만, 성직자의 아들로 자라온 피스토리우스는 그 결정적인 순간의 한 발을 마저 내딛지 못하고, 싱클레어는 그렇게 머뭇거리는 그를 떠난다.  

"정말 자신의 운명 이외에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미 동류란 없어. 완전히 홀로 서 있고, 주위는 그저 차가운 우주 공간이 감싸고 있을 뿐이지. 자네 아나. 그게 바로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라네."

 <<싯다르타>>에서도 주인공이 고타마 현존을 만난 이후 무리를 떠나 오면서 본인만의 깨달음이 여정 즉 진정한 출가가 시작되었음을 알아차렸을 그 때, 바로 그 때 싯다르타가 느꼈던 그 ‘절대 고독’을 이전에 썼던 이 책 <<데미안>>에서도 언급한다.
 

"하지만 그것을 실행하거나 충분히 강력하게 원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그 소망이 완전히 나 자신 안에 있을 때, 실제로 내 존재가 완전히 그 소원으로 꽉 차 있을 때 뿐이야. 그렇게만 되면, 너의 내면으로부터 요구되는 것을 실행하자마자 잘 될거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다. 모임에서 함께 읽었던 <<닥터 도티의 마술가게>> <<상처받지 않는 영혼>> <<싯다르타>> 그리고 <<기적수업>>까지. 후반부의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부인에게서도 다시 듣게 되는 ‘별을 사랑한 청년', 그 일원론의 메세지. 이런 저런 책들을 읽으면서 이렇게 한결같은 메세지를 찾아내는 즐거움은 독서 여정에 큰 동력이 된다. 위의 두려움에 관한 싱클레어의 고백부터 소망을 이루는 방법까지. 어쩌면 이렇게 다른 책들과 스토리들에서 한 목소리를 발견할 수 있는 건지! 
 

그러나 사람은 저마다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단 한번뿐이고 아주 특별한, 그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고 주목할만한, 이 세상의 여려 현상들이 단 한 번, 반복되는 일 없이, 거기서 그렇게 교차하는 하나의 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한 것이다. 때문에 어떻게든 살아가며 자연의 의지를 실현해 가고 있는 한, 한 사람 한 사람은 경이롭고 충분히 주목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많은 지혜로운 이들이 다독을 권하는 것은 다양한 책들을 많이 접할수록 내가 지금껏 당영하다고 믿고 있던, 이 견고한 이원론의 세상이 어쩌면 진실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의심하게 해주고, 그럴수록 지금껏 나의 믿었던 바에 대해서도 그리고 새로 발견한 길에 대해서도 둘 다 확신할 수 없으니 계속해서 정반합의 그 합일점을 찾아 떠나도록 해주는 동력이 되는 것이 아닐까. 더 나아가 일원론의 우주가 진실이었음을, 그리고 종국에는 내가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여정으로 이끌어주기 때문이 아닐까.

 
낙타처럼 보이는 대로, 들은 대로 나의 의지 없이 믿었던 것들이 주는 안일함을 가장한 구속에서 벗어나, 이러다 내가 파괴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사자와도 같이 살아내고, 끊임없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고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 그것이 궁극의 목표 즉, 피아 구분이 없는 어린아이 같은 참 나 자신에, 구원에 이르는 길이니. 
 
먼저 깨달았던 많은 이들이 그들의 소중한 지혜를 글로 남겨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지금껏 살아온 경험치를 돌려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려면 뇌를 바꾸는 수준 그 이상일텐데 끈기를 가지고 많은 책들을 통해 여러 간접경험이라도 거쳐야만 내가 믿고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크랙이라도 생길테니 말이다.

 

알을 깨부수고 날아가라고. 꿈에서 깨라고.

나의 아끼는 책 <<기적 수업>>의 핵심적인 내용들이 <<데미안>>에서도 다시 한 번 등장했다. 데미안이 강조했던 아이콘. 상징들. TV에 나오는전쟁이나 정치와 연계된 모든 드라마 같은 피하고 싶은 뉴스들이나 또는 여름을 맞아 짙푸른 자연의 아름다움... 이 모두 나의 의지가 상징으로 나타난 것이니 이를 볼 때 내 안의 결핍 또는 풍요로움이 투사된, 상징이란 점을 끊임없이 자각해야 한다는 것. 선악미추로 판단하지 말 것. 판단중지는 진정한 용서로 가는 지름길이기에. <<티벳 사자의 서>>도 똑같이 반복해서 알려준다. 양극 너머에 단일한 것이 있다고. 선한 신이나 악한 신이나 네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니 두려워 말라고.
 
책을 읽는 중간중간 마음에 와 닿아 줄쳐놨던 문장들을 다시 타이핑하면서 보니 어쩌면 <<기적 수업>>의 그것과 같아 그저 놀랍다. 분열되어 정신 나간 에고의 ‘은밀한 만족'과 성령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작은 용의'까지! 미지 속으로 그저 던져져 태어난 인간이 길을 찾아 자기 자신에 이르는 것. 그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일을 치워두고 다른 것에 골몰해 있으니 본향을 떠나온 떠돌이 같이, 해야 할 일을 미루고 노는 것 같이 항상 마음이 불안한 것 아닐까.
 
상시 불안한 그 마음 상태가 고착이 되어 이제는 안락함까지도 느껴지는, 이제는 내 새로운 버전의 밝은 세계라고 느껴져 다시 그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고, 알고 싶지도 않은, 그냥 이렇게 유아기의 아벨로 죽치고 살고 싶은 에고의 욕망. <<싯다르타>>에 앞서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부터 외치고 있었다. 니가 살고 있다고 믿는 그런 세상은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두려워 말고 알을 깨부수고 날아가라고. 꿈에서 깨라고.



남기고 싶은 글귀들

인생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이다.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면 그건 그에게 자기 위에 군림할 힘을 내주었기 때문이지.”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우린 그 누군가의 모습에서 바로 우리 내면에 들어앉아 있는 무엇인가를 미워하는 거야. 우리 자신 속에 있지 않은 것은 우리를 흥분시키지 못하거든.”
“그래도 우리는 아직 서로가 있고, 우린 남들과 다르다는, 반항한다는, 비범한 것을 원한다는 은밀한 만족감이 있어. 이 또한 떨쳐버려야 해. 그 길을 온전히 가고자 한다면 말이야.”
“(아브락사스)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시키는 상징적 과제를 지닌 어떤 신성의 이름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모습들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 비이성적으로 얽히고 설킨 기이한 자연의 형상들에 몰두하는 것은 내심 우리의 내면이 이 형상들을 있게 한 어떤 의지와 일치하고 있다는 느낌을 만들어 낸다.
그것을 할 수는 없었다. 아마 나도 언젠가는 그런 무엇이 되겠지만, 내가 그걸 또 어떻게 안단 말인가. 아마 나 또한 찾고 또 계속 찾아야겠지, 여러 해 동안. 그러고는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어떤 목표에도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떤 목표에 도달하지만, 그것은 악하고, 위험하고, 끔찍한 것일지도 모른다.
‘한 인도자가 나를 떠났습니다. 나는 캄캄한 어둠 속에 서 있습니다. 혼자서는 한 발짝도 내딛을 수 없습니다. 도와주세요!’
책상 위에는 니체의 책 몇 권이 놓여 있었다. 나는 그와 더불어 살고, 그의 영혼의 고독을 느꼈으며, 그를 그토록 쉴 새 없이 몰아간 운명의 냄새를 맡으며, 그와 더불어 괴로워했다. 그리고 그렇게 가차 없이 자신의 길을 간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원래의 감정은 가장 과격한 것조차 적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고, 그 피비린내 나는 행동은 단지 내면의 발산이요,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미쳐 날뛰고 죽이고 말살하고 스스로 죽어 버리려는, 제 안에서 분열된 영혼의 발산이었다. 거대한 새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 버둥거리며 싸우고 있었다. 알은 세계였고, 그 세계는 산산히 부서져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