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죽음
작가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 님을 소개하는 글을 인용할께요
우리는 톨스토이에 관한 책들만으로도 도서관 하나를 꽉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볼테르와 괴테 이래로 그토록 오랜 기간에 걸쳐 그런 명성을 누린 작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문학작품 대부분이 두말할 나위 없는 걸작의 대열에 든 반면, 그의 인물됨은 예나 지금이나 의문에 싸여 있다. 그가 살아있을 당시에 이미 그의 인물됨을 둘러싸고 형성된 신화는 지금도 계속 남아 있다. 그 신화는 어찌나 강렬한지, 심지어 실제 사실이나 톨스토이의 본질마저 흐리게 할 정도다.
- 얀코 라브린
진정 이게 피서죠 ㅎㅎ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었는데 마침 휴관일이어서 출판된 책들을 대략 훑어보고 걔중에 번역이 매끄러운 한 권을 빌려오겠다는 나의 야망은 이루지 못했지만, 모바일 책으로 한 권 올라와 있던, 2017년 북스데이에서 출판한 책으로 다운 받아 읽을 수 있었다.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카페에서 혼자 여유로이, 읽고 싶던 책을 읽는 즐거움을 무엇에 비할까. 블랙 코미디를 보는 것 같은 빠른 전개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앉은 자리에서 절반 이상 읽었다. 속도감도 속도감이었지만 책 속에 그려진 그 시대의 러시아 사람들과 지금의 나와 내 주위의 지인들이 다를게 없다는 점이... 말그대로 웃펐다. 코메디... 이런 코메디가 있나.
책 내용을 소개할까요
이반 일리치는 사교성 있고, 자기 통제에 능하며, 속심과 겉으로 보여지는 태도를 조절할 수 있으며, 주어진 업무를 탁월하고 성실하게 소화해내는... 일명 엄친아다. '삶이란 유쾌하고 품격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믿는 바대로 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교계의 높은 사람들과 어울리려 노력하고 그들 사이에 암암리에 깔려있는 기대된 스펙들을 성실히 갖추어 간다. 결혼이라는 것도 하나의 악세서리처럼 가격과 조건, 디자인을 고려해 배우자를 선택한다.
그가 그토록 철저히 쌓아올린 스펙들은 높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판단하는 모든 것이었다. 그들의 판단대로 사는 대신 사치와 자만심을 충족시키며. 그는 그가 왜 프라스코비야 표도로브나와 결혼하는지 잘 알고 스스로 선택했다. 하지만 임신으로 인해 생기기 시작한 배우자의 요구나 태도가 자신이 지향하는 유쾌하고 품격있지 못했던 바, 공무를 핑계로 삶의 그 누추함과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며 회피한다. 주위의 평판에는 예민하게 반응하나 정작 자신의 배우자의 임신으로 인한 불편이나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주인공.
문 손잡이에 옆구리를 찧는 사소한 사고만으로도 죽을 수 있는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는 존재처럼 삶의 수많은 순간들을 스펙쌓기 마냥 쌓아올렸던 이반 일리치. 그 사소했던 사고로 시작된 병이 깊어감에 따라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아무도 공감해주지 않는 나의 고통, 외로움, 어쩌면 이 모든게 다 가짜였을거란 공포를 철갑상어 요리 정도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지인들, 가족들.
거짓말, 죽기 직전까지도 멈추지 않을 이런 거짓말, 이 무섭고 장엄한 죽음의 의식을 인사차 들었다든지, 커튼이 어떻다든지, 오찬 자리의 철갑상어 요리가 어떻다는 따위의 일상의 사소한 것들과 같은 수준으로 격하하는 이런 거짓말, 바로 이런 거짓말이 이반 일리치는 소름이 끼치도록 끔찍하고 싫었다. … 그가 보기에 주변 사람들은 모두 이 무섭고 끔찍한 죽음의 의식을 그저 있을 수 있는 기분 나쁜 일, 특히 조금 품위가 없는 (온몸에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 응접실에 들어온 것 같은) 일 정도로 격하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평생 지키려고 애써온 품위라는 것이었다.
건강했을 때에는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인정받는 그였으니 그의 인생이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죽어가는 지금, 모든 것을 잃게 될 그가 직시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이었고, 그 사실을 직시하게 되는 순간 그는 극한 신체적 고통에 정신적인 고통까지 겹쳐 사흘 밤낮을 울부짓으며 몸부림친다.
죽어가던 이반 일리치는 절망적으로 소리치며 필사적으로 손을 내젖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손이 아들의 머리에 부딪쳤다. 아들은 아버지의 손을 잡아 입술에 대고 울음을 터뜨렸다. 바로 그 순간 이반 일리치는 구멍 속으로 굴러떨어졌고 빛을 보았다. 동시에 그는 그의 삶이 모두 제대로 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아직은 그것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문했다. ‘그게’ 뭐지? 그리고 조용히 귀를 기울이다가 입을 다물었다.
“데리고 나가… 불쌍해, 당신도…” 그는 ‘용서해줘’라고 한마디 덧붙이고 싶었지만 ‘보내줘’라고 말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말을 바꿀 힘도 없어서 손을 내저었다.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들을 것이다. 그러자 돌연 모든 것이 환해지며 지금까지 그를 괴롭히면 마음속에 갇혀 있던 것이 일순간 밖으로, 두 방향으로, 열 방향으로, 온갖 방향으로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다. 가족들이 모두 안쓰럽게 여겨지고 모두의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해주고 싶었다. 이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신도 벗어나고 가족들도 다 벗어나게 해주어야 했다. ... “아, 이렇게 기쁠 수가!” 이 모든 것은 한 순간의 일이었고 이 한 순간의 의미는 이제 흔들리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 그를 정신적 고통과 절망에서 해방시켜준 것은 어린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흘린 순수한 눈물이었고, 아버지의 고통에 대한 안타까운 공감이었다. 아들의 눈물 젖은 공감으로 극한으로 치닫던 자기부정과 회한, 증오가 한 순간 정화되어 비로소 그 자신도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의 용서를 구할 수 있게 된 이반 일리치. 아직도 자신이 쌩쌩했을 때 살았던 모습들로 생각없이 살고 있는 남은 자들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그들도 자신처럼 죽는 순간에 크게 후회하게 될 것이 뻔하니 말이다.
그렇게 사는 거 아니라고 알려주고 싶지만, 뱉은 말도 다시 고칠 기력이 없는 무력감이 안타깝지만, 그러면서도 한편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들으리라는 편안한 믿음.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이 있었지만 그로 인해 그는 운 좋게도(?)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정화되는 체험을 한다. 죽음과 맞닥뜨린 그 순간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오롯이 본인만의 체험을 통해 '아, 이렇게 기쁠 수가!'라고 고백한다.
이반 일리치는 내 얘기였어요
학교를 졸업하면 당연히 친구들처럼 대학을 가는 거고, 취업해 돈 벌고, 연애해서 결혼도 하고, 집도 사고 아이도 갖고… 무엇하나 의심스럽지 않아 보이던 나의 미래에 대해 의심하고, 삶이 무엇인지를 희미하게나마 생각해보기 시작했던 건 IMF를 겪으면서였던 것 같다. 취업이 확실했던 전공임이었음에도 어쩌면 취업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을. 어른들도 겪어본 바 없는 금융구제, 구조조정과 쏟아지는 대량실업. 아무런 준비없이 떠밀려 당하는 퇴직. 당시의 퇴직은 곧 죽음과도 같았다. 하지만 퇴직명단을 함께 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각기 다 달랐으리라. 이반 일리치의 부고 기사를 읽은 후 동료와 후배들이 각자 계산했던 자리이동과 자신에게 미칠 영향을 셈했던 것처럼.
'이건 이반 일리치에게 일어난 일이지 나한테 일어난 일이 아니야. 나는 이런 일을 겪을 리 없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이토록 와닿게 읽히는 이유도 이미 내가 그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었으니 그렇게 몰입해 읽지 않았을까. 나 또한 이반 일리치처럼 주어진 조직 안에서 조직에 기여하고 인정받는 것이 응당 내가 해야 할 바라고 믿었고 그렇게 충실히 살려고 했으니까. 그렇게 이바지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말이다. 아니 왜 그렇게 해야하는지에 대해 한치의 의심 없이 그렇게 살았다고 하는게 맞겠다.
하지만 그렇게 눈 감고 사는 와중에도 불쑥불쑥 내 마음의 소리가 들렸던 것을 기억한다. 이건 아닌데… 이렇게 사는게 맞아?... 하는 불편한 소리. 하지만 이내 치울 수 있었다. 바빴으니까. 뭐 그렇다고 달리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내가 받는 평판이 그리 나쁘지 않았으니까.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뭐.
이 정도만 나이가 들어도 이제 경사보다는 애사가 많아졌다. 누구 말따나 부쩍 내 주위에 젊은 사람들이 많아진 걸 느끼고 있으니. 주위에 알고 지내던 지인분들이 작고하시면 내 버전으로 그분들의 삶을 복기하게 된다. 이렇게 사셨던 분이었지 또는 그때 이렇게 저렇게 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부질없는 복기 말이다.
내 삶을, 나의 실수를 복기해야겠다. 생각 없이 살다가 떠밀리듯 죽음 말고 죽음을 향해 지금도 한 걸음씩 가고 있다는 것을 늘 떠올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늘 잊고 있는 내 인생의 그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지 않기를, 아니 인간적으로... 조금만 후회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 Scott Nea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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