쿼런틴 (Quarantine)
아... 그렉 이건. 이 분은 또 뉘신지... 찐 이공계 오빠가 쓴, 앞뒤가 착착 맞아 떨어지는, 현학적인 플레이에 소름이 돋을 정도다. 채사장님의 신작 소설 <<소마>>를 마친 후 집어 든 <<쿼런틴>>. SF 장르는 내겐 별 관심이 없던 장르인데, 이래서 독서모임이 중요하다. 덕분에 내 취향이 아니었던 장르에서 보석 같은 책을 만났으니.
호주 작가라는 점이 반가웠고, 양자물리학을 소재로 쓴 소설이며, 김상욱 박사의 ‘감동으로 울며 볼 책 또는 이해는 안되는데 재미있어 책을 놓지 못하는 참으로 신비한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지적 유희의 끝판왕’ 이라는 추천사를 읽으니 매우 궁금하다.
개인적으로는 헤르만 헤세가 <<싯다르타>>의 깨달음 그 궁극의 장면을 글로 묘사하는 것 이상으로 양자물리학의 원리를 나같은 독자가 이해하도록 쓰는 것이 어려운 일일거라 여겨지는데... 그것도 이야기의 옷을 입혀서 말이다.
작가 그렉 이건(Greg Egan)님을 소개합니다
그렉 이건은 호주 Perth 출신으로 Western Australia 대학에서 수학 학위를 취득한 후 대학 병원 부속 의학 연구소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며 SF 작품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1980년대 말에 작가 활동을 개시해서 1990년대에 들어 전업 작가가 되었다. 데뷔 장편 <<쿼런틴>>이 디트머상 최우수 장편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으며, 이후 작품 활동을 하면서 휴고상, 로커스상, 아시모프상, 존 W. 캠벨 기념상 등을 줄줄이 탔다.
그렉 이건은 최신 양자물리학과 유전공학 등 첨단과학 지식을 종횡무진으로 구사한 정교한 사변론적 하드 SF로 명성을 얻었지만, 지금까지 국내에 번역된 장편은 SF 평론가 김상훈이 기획하고 번역한 <<쿼런틴>>이 유일하다. 워낙 복잡하고 정교한 개념과 과학 용어가 많이 나와서 읽기도, 번역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SF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은 중간에 포기하거나 완독한 것만으로 성취감을 느낄 정도이지만, 쿼런틴은 그렉 이건이 쓴 소설 중에서는 비교적 읽기 쉬운 편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게, 일단 정독을 통해 작가가 말하려는 바를 이해하면 SF 특유의 엄청난 경이감(sense of wonder)과 감동이 몰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책 내용을 소개할까요
잠깐! 책 내용 스포일이 오지니 스크롤 다운은 여러분 책임이애오 :P
“인류가 외계의 검은 구체에 의해 ‘격리(쿼런틴) 상태’가 된다”
양자역학을 토대로 인류를 ‘우주 파멸’의 존재로 구축한 충격적 상상력
- 교보문고 소개글
2066년이 배경이며, 지구는 '버블'이라 불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구체로 뒤덮여 우주로부터 격리된지 한참인 상태.
주인공 닉 스타브리아노스는 엄근진 스타일이며 양자물리학에 대해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아는 똑똑이. 꿈꾸던 대테러 조직 부서로 배치 받을 승진 건으로 인해 테러 집단인 ‘나락의 아이들'의 공격으로 아내 캐런이 사망했던 불행한 개인사를 가지고 있는 전직 경찰, 현직 사립탐정.
전직 경찰이었던 고로 감정이나 외부 환경에 동요없이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해주는 P1에서부터 P5까지 각종 나노 모드들을 뇌에 설치하고 있고, 다루는데 매우 능하다.
캐런은 모드 강화 상태인 그를 ‘좀비 보이스카우트'라며 경멸하지만 정작 닉 본인은 인격을 변화시키는 이 모드들에 별 불만이 없어 보인다. 임무를 수행할 때 이상적인 상태로 바꾸어주고 심지어 아내를 잃은 상실감마저 상쇄해주니 말이다.
익명의 의뢰인이 힐게만 병원에 입원해 있다 유괴된 정신지체 환자 로라를 찾아달라는 사건을 닉에게 의뢰하고 수임함으로써 1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1부는 사실 로라를 찾아 가던 과정을 통해 앙상블에 스카웃 되기까지의 이야기였는데, 이 부분에 개연성이 많아 지루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엔 로라의 선택이 개입했기에 닉이 언뜻 말도 안되는 추리를 해내 결국 발견하게 하는 스토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신지체라 거의 감방과도 같은 병실에서 종일 누워만 있었을 로라. 그러나 전직 동료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이전에도 두 번이나 병원을 탈출한 경력이 있으며, 혼자서는 문 손잡이도 돌릴 수 없는 그녀의 처지로 봐서는 누군가의 유괴로 볼 수 밖엔 없으나 그조차도 아무런 행적도 남긴 바 없으므로 완전히 미궁에 빠진 사건이었다.
닉은 우여곡절 끝에 BDI 건물에 로라를 찾아 침입하면서 정원에서 보행보조기에 기대고 있는 로라를 발견하지만 곧 발각되어 잡히게 된다. 죽을게 뻔하게 예상되는 상황이었지만 의외로 BDI는 그를 스카웃했고, 이 과정 중에 닉에게 충성모드가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충성모드의 특징을 조지 오웰 <<1984>>의 이중사고를 인용해 설명한다. 앙상블에 대한 충성 모드. 충성모드는 무조건적인 세뇌가 아니라 해당 모드가 조직에 의해 강제로 깔렸다는 것을 인지를 함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자발적으로 충성하도록 한다. 인간적인 사고도 물론 허용이 되므로 부단히 자신의 기존의 신념, 정체성과 모순 없이 일치시키도록 노력하는 정신적인 피로를 동반한다. 허나 교묘하게 본인의 사고의 결과로 얻은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므로 더욱 신뢰, 충성하게끔 되는 메카니즘.
BDI의 청은 추천서를 써주며 닉을 ASR로 위장취업 시킨다. BDI와 ASR은 모종의 비슷한 프로젝트를 진행중인데, BDI와 앙상블과의 연결에 대해 누설하지 말라는 경고를 함께 받는다. 뇌에 충성모드가 설치된 닉은 이를 앙상블이 자신의 충성을 인정해 프로모션해준 것으로 이해하고 기뻐한다. 그가 ASR에서 맡은 일은 포콰이라는 여성 실험 자원자의 경호를 맡는 일이다.
포콰이와 세 사람의 과학자들로 이뤄진 실험은 겉보기에 매우 간단한 반복적인 실험으로 보인다. 포콰이는 닉이 이 실험에 대해 아무런 이해가 없음에 놀라며 그녀가 이해하고 있는 한에서의 실험의 의미와 경과를 설명해준다. 닉은 앙상블의 존재가 ‘버블’과 관련있음을 깨닫고 더욱 가열차게 충성하기로 결심한다. 나의 정체성과 뭔가 핀트가 맞지 않는 듯한 부분이 걸렸는데 마침내 모순이 해결된 듯 보였으므로. 버블을 연구하는 앙상블과 실험 지원자 포콰이의 보호는 중대한 가치를 테러집단인 ‘나락의 아이들’로부터 지켜내는 것임으로.
포콰이의 실험을 지켜보고, 그녀와 대화함으로써 닉은 로라 뇌의 선천적 결함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파동함수를 수축시키는 기능의 결함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파동함수의 확산 상태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물리적인 인간의 뇌의 형태로 갖고 있는 그녀였기에 BDI는 1부의 그 지난한 과정을 거쳐 그녀를 힐게만에서 빼왔던 것. ASR의 포콰이가 실험시에 쓰는 확산이 가능하게 하는 모드도 후에 앙상블이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똑같은 모드이다.
포콰이는 우리 조상들이 파동함수를 수축하는 능력을 갖추기 전과 지금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을 거라 말한다. 다른 가능성들을 모두 파괴하고 남은 생물의 진화. 자기들 대다수를 소멸시키는 우주가 우리의 존재방식이라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포콰이의 실험은 그녀가 고유상황들이 수축하지 않게 앙상블 모드를 이용해 막아 확산한 상태에서, 위 아래를 말함으로써50:50의 확률로 있는 개연성을 조작해 확률을 바꾸면 실험에 참여하고 있은 박사들이 이를 관찰해 계를 수축시키는 원리이다. 실험 성공시 포콰이가 말한 방향으로 은이온이 움직이고 진행 그래프가 50:50의 운용범위에서 한 방향으로만 변해 나가게 되는 것. 이는 은이온의 이동방향을 무작위에서 방향 정할 수 있다는 것으로 실험자가 원하는 결과, 즉 원하는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양자 물리학 실험이었던 것.
이제 지체가 부자연스러웠던 로라의 병원 탈출이 가능했던 것이 이해된다. 그녀는 선천적인 뇌 결함으로 인해 수축하지 않고, 관찰자가 없는 병실에 오랜기간 퍼져있을 (확산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수 있었으니, 확산시의 여러 버전의 능력들이 발생, 자체 진화해 탈출까지 가능했던 것.
모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포콰이가 침실에서 확산할 때마다 복도에서 대기중인 닉에게는 죽은 와이프 캐런이 밀키웨이 등의 환영을 보여준다거나 복도에 꽉 차는 등의 경험을 하게 된다. 강화모드 P3로 근무하고 있는 닉이 따분함이나 캐런 등의 감정적 동요를 일으켰다는 것 = 시스템의 개연성이 외부 요인에 의해 변화하고 있음 = 포콰이가 이온 조작처럼 닉을 조작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닉의 몸 자체도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수축하는 과정이 아닐 때 = 확산이 가능하다. 하지만 모드를 가지고 있는 포콰이는 대부분 잠들어 있으므로 잠자는 포콰이-더하기-닉의 계에서는 닉이 포콰이의 모드를 몰래 사용하는 것이므로 (포콰이는 존재도 알지 못하는) 그가 캐런을 불러낸 것이 된다. 아직 아무런 까닭을 모르는 닉은 모드들이 고장을 일으켰다고 생각할 뿐.
건물내 엘리베이터 앞에서 포콰이 실험의 일원인 뤼 박사가 닉의 채용 경로를 알고 있으며, 그 자신도 같은 경로로 채용되었음을 알려주고 사라진다. 이후 닉의 아파트에 찾아온 그는 자신도 충성모드를 사용중이며 조직 내에 같은 모드를 사용중인 ‘캐넌'이라는 조직이 있고 이 사람들이야 말로 진정으로 앙상블을 위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므로 함께 뜻을 합쳐서 가짜 앙상블의 폭주를 막아내자고 설득한다.
불현듯 내가 무시할 수 없는 사항이 하나 있음을 깨달았다. 진정한 <앙상블>은 어떤 형태로든 로라의 기묘한 재능을 탐구하는 일과 관련이 있어야 한다. 이중벽으로 둘러싸인 지하실 안의 방. 포콰이의 이온 실험, 그리고 이제... 고유 상태 모드와 나 사이의 기괴한 관계. 그리고 내가 진정한 <앙상블>에게 봉사하는 유일한 방법은, 힘이 닿는 데까지 이런 탐구에 참여하는 일이다.
닉이 진정한 앙상블에 충성할 수 있다는 논리로 BDI의 ROM을 훔치기로 결심하는 장면과 그 논리. 충성모드가 만든 정신적인 매듭을 푸는 것은 불가하나 그것을 무관하게 변형시키는 것은 가능 = 이는 충성모드를 가진 사람들만의 자유 = 즉 ‘충성모드는 자유다’라는 이중사고로 이어진다. 하지만 진정으로 앙상블에 충성할 수 있다는 명분과 논리만 얻었을 뿐 ROM을 입수한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 지에 대해서는 정작 아무 생각이 없다.
BDI에 재침입하기로 마음 먹은 닉은 이제 포콰이가 그간 실험을 통해 얻은 통제력을 위한 팁을 빨리 습득해야만 한다. 에둘러 물어본 질문에 포콰이는 확산시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그녀가 한 행동은 그저 실험의 성공만을 절실하게 원했던 것 뿐이라고 약간은 실망스러운 답을 한다. 또 농담 반 실험 설계자가 이를 알고 있어 승부욕 또는 성질(?) 강한 포콰이 자신을 대조군으로 두지 않고 진짜 수축 억제 모드를 설치했다고. 끌어당김의 법칙이 연상되지 않는가.
포콰이의 실언으로 알게된 모드의 이름. 진정한 앙상블의 존재는 포콰이 뇌 안에 설치된 모드명이었다. 즉, 포콰이가 잠든 사이 그녀의 머릿 속의 모드를 훔쳐쓰는 닉은 포콰이 뇌 속의 앙상블 모드의 도움으로 확산해 진정한 앙상블에 봉사할 수 있다는 사실.
확산시 선택의 개연성을 높이는 법을 부지런히 연마하는 닉. 반복되어 나타나는 주사위의 1과 1. 뱀의 눈은 계속 확산해 있음을 의미하고, 이윽고 주사위를 보고만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연속으로 뱀의 눈이 나오는 경지에 이른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이제 닉이 확신했다는 점.
BDI 침입시 감시요원에 의한 수축을 걱정하지만 확산한 닉은 파동함수를 다룰 수 있으므로 관찰자와 겨룰 수 있으나 그들은 파동함수의 존재 자체를 모르니 게임이 안됐다. 쑥스러운듯 닉으로부터 고개를 돌리는 경호원들. 로라가 힐게만 병원을 두 번이나 탈출할 수 있었던 증거였다.
닉이 확산중 깨어난 포콰이와 대화한 후 포콰이가 다시 잠들 때까지 수축하지 않고 확산한 상태로 있도록 제어함으로써 그녀가 그 고유상태를 꿈으로 믿게 만드는데, 여전히 확산중인 포콰이는 꿈에서 닉과 같은 마음으로 건물의 같은 동선을 다녔다고 말한다.
포콰이-더하기-닉. 대화를 선택한 건 하나로 결합한 두 사람의 파동함수였다. 닉은 파동함수를 다룰 줄 아는 포콰이와 대화하면서도 수축되지 않을 정도로 통제력이 생겼음을 보여주는 반면 동시에 모드를 마스터 한 포콰이의 호기심만으로도 평생 입밖에 낼 확률이 없었던 캐런의 죽음과 자신의 강화 모드에 대한 신념을 줄줄 털어놓는다. 내가 주도적으로 상상하지 않으면 남이 상상하는 대로 살게 된다던 <<닥터 도티의 마술가게>>의 내용이 생각났다.
뤼와 닉은 확산시 포콰이의 영향력이 더 증대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코자 BDI 침입 실행을 서두르게된다. 관건은 확산한 ‘내’가 계획에 유리한 방향으로 수축해줄 지 여부. 확산한 '그'의 입장에서는 자살과 같은 과정이 되므로. 나는 확산해서 그가 되고 그는 수축해서 내가 된다. 하지만 ‘그’의 수축 동기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불안감.
침입전 뤼가 건낸 작은 검은색 상자. 뤼는 그것의 성공이 의미하는 것은 일에 대한 어떤 인간적인 계획, 지식조차 없어도 잠입 수행을 해낼 것이라는 증거라고 했다. 그저 결과를 선택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며, 100만자리의 숫자를 무작위로 인수분해해 암호를 해독하는, 정상적으로는 10-30년 걸리는 업무를 수행하는 일종의 양자 컴퓨터라고 말하자 닉은 일종의 배신감을 느낀다. 뤼는 고작 돈을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인가? 뤼는 충성 모드를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캐넌의 조직을 유지하는 비용과 닉에게 설치한 모드 비용도 든다는 뤼의 변명에 성공시 50:50으로 나누기로 딜하고 건네 받는다. 며칠 후 검은 상자에 고유 상태 모드가 on 표시를 나타내고 뤼가 거래하는 모드 상에게 건낸다.
BDI 침입후에 본인의 확산 여부를 주사위를 던져 확인한다. 반복할수록 확산중인지는 확인할 수 있지만 수축시 선택되지 않을, 그만큼의 수많은 ‘나’들의 희생이 누적된다는 사실이 불편하다. 닉이 확산 중에 할 일은 그 ‘나’들 중에 내가 원하는 고유상태들만을 선택하는 과정.
BDI로 들어가는 밴 안에서도 차안을 보는 관찰자가 없으므로 주사위는 여전히 뱀의 눈 = 확산중임을 보여준다. 경호 직원들도 마치 닉을 마주치는 것을 부끄러워하듯 눈을 돌리고, 문들은 자연스럽게 열린다. 금고 자물쇠도 닉이 방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더른 무생물들과 마찬가지로 확산되어 있어 곧 열렸고, 금고 안의 23,600개의 칩들 중 하나였던 앙상블 칩을 당연하게 고르고 복사를 마친다. 1,000번 확인 검사를 수행하라고 지시한 후 돌아서는 순간 로라의 모습을 한 로라의 대변자와 대면한다. 그녀는 정확히 자신이 ‘로라-더하기-확산한 닉과 포콰이-그 밖의 다른 사람들을 대변하는 존재’라고 답한다.
로라가 닉이 앙상블을 훔치는 것을 저지하고 싶어하지는 않으나 그것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닉이 이해하길 바란다고 말한다. 닉-더하기-포콰이가 어린애 같아서 신뢰할 수 없어 단일 고유상태에 집약한 필수 데이터를 전달하지 않았다고. 앙상블 사용법을 닉이 이해할수 있는 대화 형식으로 가르쳐줄 수 있는 분신을 만들어 낼 정도로 확산한 로라는 진화한 단계였다.
수축은 국소적인 현상이며, 초공간 즉 무한한 고유상태들을 내포한 공간의 일부를 고갈시키지만 말 그대로 일부라 무한한 전체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설명한다. 그 남은 무한한 초공간의 수축되지 않은 곳에 고유 상태들을 가로지르는 지적 생명체들이 있고 그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고갈된 영역을 발견, 연구 후 버블을 만들어 영역을 봉쇄한 것이라고.
하지만 버블 밖의 존재 중 한 개체가 탐험으로 고갈된 영역에 들어왔는데 그것이 로라였다. 그녀를 본 지구인들이 수축시켰는데, 확산하는 기능이 있는 그 개체의 본연의 상태와 유사하려면 로라와 같은 모습이어야 했다. 확산한 로라는 그 탐험가의 부활.
로라가 계속 확산을 유지한다면 전 인류의 수축을 억제해야하니 고갈된 영역이 가득 차게되어 인류는 버블을 통과하고 나머지 초공간과 만나게 되고 = 이는 자력으로 버블 메이커의 진실을 알아낸 뤼의 바람 = 즉, 인류의 버블 탈출 또는 인류 대각성이라고 믿는 듯 하다.
수축은 수축이 현실로 만들었을때에만 현실이 되는 것이므로 역으로, 수축이 현실로 되지 않고 계속 확산하는 세계 역시 존재할 수 있다. 로라가 계속 확산하지 않았던 이유는 인류가 그런 파국(?)에 이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고, 닉이 앙상블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그걸 쓰는 사람은 누구나 같은 재앙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다시 그녀의 정체를 묻는 닉에게 로라의 대변자는 ‘나는 너를 설득할 수 있었던 지각의 집합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라고 답한다.
BDI를 빠져나오는 밴을 뤼가 막고 수축 당했다면서 폭탄이 발견됐으니 빨리 떠나라며 50만불이 들어있는 카드를 주며 닉을 종용한다. ASR에 폭탄이 발견되었고, 건물 보안이 올라갔고 닉이 사라진게 발견되었다고. 이는 나중에 포콰이를 통해 뤼가 거짓으로 꾸며낸 것으로 밝혀진다.
닉으로부터 로라의 대변자를 만났고 그녀에게서 들은 내용을 무감동하게 전해들은 뤼는 자력으로 이미 닉이 버블메이커에 대해 배운 바를 알아냈었다며 인류는 이 감옥에서 벗어나야한다고 말한다.
뤼와 대화하면서 닉은 자신이 나락의 아이들의 일원으로 의심 받고 있고, 뤼에게 앙상블 모드를 주면 위험하게 사용될 수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동시에 진정한 앙상블의 비밀 따위는 자신에게 전혀 소중하지 않다는 점을 깨닫고 놀란다. 머릿속의 충성모드가 사라졌다!
뤼가 고용한 사람들의 공격으로부터 정신을 차린 후 홀로 남은 닉은 자신의 충성모드가 언제 사라졌는지, 혹은 아직도 확산중인건지 아니면 계획에 실패한 고유 상태들 중 하나인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공황에 빠진다.
캐런이 나타나 앙상블 모드에는 두가지 기능이 있었음을 복기해준다. 앙상블의 두가지 기능 = 수축을 억제하는 기능 + 고유상태를 선택하는 기능. 이 두 기능이 뇌의 중복된 뉴런을 사용할 이유가 없으므로 닉이 복사해 가지고 있는 95% 이외의 빠진 부분만 확산을 거듭하면서 얻게 되는 진화력을 믿고 복구하라는 것. 내면의 목소리라 쓰고 캐런 천재설이라 읽는다.
어찌어찌 앙상블 모드를 복구해 뇌에 설치한 후 확산을 이용해 뤼를 찾아나선다. 닉이 찾아낸 뤼는 플라스크 안에 앙상블 모드에 막강한 전염력을 더해 둔 엔드 아메바를 만들고 있었다. 뤼는 버블메이커들이 외계에서 온 어떤 존재들이 아니라 인류 중 개연성이 너무 낮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인간들이었다고 설명한다. 이제 엔드 아메바를 퍼뜨려 뿌리기만 하면 전 인류에게 급속히 확산되어 모두가 확산만을 계속하면 버블에 닿을 수 있고, 그 이면의 무한한 초공간으로 나갈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뤼는, 로라의 대변인 입장에서는, ‘어린애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다.
닉은 결국 플라스크를 깨뜨리려고 하는 뤼를 총으로 죽인 후 자책감에 빠진다. 방에 들이닥치자 마자 그를 결박해두었다면 굳이 죽이지 않았을 수 있었는데... 다시 확산해 뤼를 죽이지 않을 고유 상태를 골라 뤼를 설득하지만 이번 버전에서 뤼는 엔드 아메바 플라스크를 창 밖으로 던지고 도시는 확산한 이들의 모든 고유상태들이 중첩되는 기묘한 상태가 된다.
왜 닉은 뤼가 플라스크를 던지지 않는 고유상태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확산한 ‘그'는 수축 상태의 닉과 같은 생각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뤼와 마찬가지로 인류가 버블 너머로 뻗어나갈 수 있는 자유를, 왜 자신의 광대한 자유의 무한히 작은 일부에 해당하는 닉이라는 무의미한 존재를 기쁘게 하기 위해 포기하겠는가 말이다.
BDI에 침입하기 전 뤼는 검은 상자를 건네주면서 이제 이 상자의 LED 불이 들어오게 하면 침입시에 닉이 수행해야 할 아무런 인간적인 계획도 하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옳은 결과로 귀결될 고유 상태들을 선택할 수 있다는 증빙이라고 했다. 확산한 ‘닉’은 버블 밖의 자유를 찾는 고유 상태를 의도적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중첩된 세상에서 죽은 아내 캐런 그리고 포콰이를 조우한 닉. 그는 이제 캐런을 만날 수 있게 해주었던 인위적인 모드와 그로부터 얻었던 리얼했던 가짜 위로를 포기한다. 이제 그런 장치를 머릿속에 둔다는 사실 자체에 염증이 생겼으므로. 이는 닉의 자의식이 돌아왔음을 암시한다. 인위장치를 혐오했으나 역으로 그 인위장치를 사랑할 수 밖에 없도록 했던, 캐런으로부터의, 집착으로부터의 해방.
우리는 각자 격리된 채 생을 사는 존재
어찌보면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격리상태로 살아왔던 닉. 유년 시절은 나타나지 않지만 경찰이었을 때에는 강화모드를, 사립탐정이었을 때에도 각종 인격들로 바꿔주는 모드들로 무장하고, BDI에 스카웃 된 이후로는 충성모드를 뇌에 설치한 채 본인이 자유인이라고 착각하고 살았던, 캐런과 포콰이가 혐오했던 인위적인 장치들에 대한 옹호자였던 닉. 제목 <<쿼런틴>>처럼 격리된 인생이었다.
버블을 만난 이후로, 그간 확산을 거듭한 진화로 닉이 깨어났다. 이 책을 다 마친 이후 <<쿼런틴>>은 닉의 깨어남에 대한 책이라 읽혀진다. 뤼의 언급대로 버블메이커 그리고 로라는 인류의 각성을 꺼리는, 버블의 안과 밖이 따로 존재한다는 이분법적인 현실에 안주하려는 인류의 집단지성을, 뤼는 자력으로 충성모드를 벗어나 어쩌면 무한히 하나로 연결된 전체와 합쳐지리라는 대각성을 되찾으려는 의지의 상징으로 말이다. 닉은 결국 미래의 인류가 닉을 원하는 미래 방향으로 가도록하는 파이프 라인 역할을 담당했기에 그동안 ‘그'의 수많은 버전 중 살아남은 버전이었던 것 아니었을까.
확산중인지 수축한 현실인지 주인공 닉도 헤매는 장면이 자주 나올 때마다 호접몽이 연상되었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는 닥터 도티의 마술, 부처님의 일체유심조. 닉은 본인이 응시하는 것이 무한인지 자신의 눈꺼풀 안쪽인지 알 수 없다면서도 해답을 알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모든 것은 평범한 일상으로 귀속되는 법이므로. 즉, 내가 믿는 바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내가 그렇게 될거라고 확신하는 것의 중요성. 지상에 천국과 지옥이 함께 출현해 있는 무상한 세상. 내가 평범하다고 확신하는 바대로 될 것이므로.
그리고 어젯 밤,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아마 확산한 인류는 <버블> 가장자리까지 도달했고, 결국 뒤로 물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지구는 여전히 확산한 상태인지도 모른다. 고유 생태당 하나씩 존재하는 의식이, 끊임없리 분기하는 식으로 말이다. 다세계 모델이 현실화 되었다고나 할까? 뉴홍콩의 마천루 사이에서는 여전히 피의 비가 쏟아지고, 어린아이들은 여전히 춤추는 꽃들을 소환하고 있다. 모든 꿈, 모든 비전이 생명을 얻었다. 천국와 지옥이 지상에 출현한 것이다.
모든 꿈, 모든 비전. 그중에는 이 세계도 포함되어 있다. 범용하고, 무한한 행복과 무한한 고통의 중간께에 위치한 세계. 그리고 지금 나는, 어둠을 올려다보며, 내가 응시하고 있는 것이 무한인지, 아니면 내 눈꺼풀 안쪽인지 의아해하고 있다. 그러나 해답을 알 필요는 없다. 잠을 선택할 수 있을 때까지, 마음속에서 이 말을 몇 번이라도 되풀이하면 그만이므로.
모든 것은 결국 평범한 일상으로 귀속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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